조한지91화
2021. 6. 3. 06:43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91화
☞ 전시군법(戰時軍法)
한신은 대원수 직책을 맡고 난 후 한왕 앞에 엎드려 사은숙배하며 아뢴다.
“신, 파초 대원수 한신은 삼가 대왕전에 아뢰옵니다. 초패왕 항우는 의제를 시해하고 대위(大位)를 찬탈했을 뿐만 아니라, 도읍을 팽성으로 옮겨가서도 백성들을 몹시 괴롭히고 있사옵니다. 이는 마땅히 하늘의 노여움을 사고도 남을 일이오니 대왕께서는 정의의 군사를 일으키시어 도탄 속에서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출해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봉강통일(封疆統一)의 거룩한 만년 왕업(萬年王業)을 이룩하도록 하시옵소서. 삼진왕들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고 있기는 하오나 그들은 대왕께서 격문(檄文) 한 장만 보내시면 기쁜 마음으로 대왕의 그늘로 달려올 것이옵니다. 그밖에도 육국(六國)이 따로 있기는 하오나 그들은 우리와 싸울 능력도 없는 조그만 나라들이옵니다. 다만 항우 하나만이 문제가 될 뿐이오나 항우는 이미 인심을 잃어버렸으니 강하면 얼마나 강하겠사옵니까. 그러하니 대왕께서는 천위(天威)의 깃발을 높이 들어 주시기만 하시면, 신은 필승의 지략으로 성업을 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나는 진작부터 봉강통일의 꿈을 품어오고 있었소. 항우를 정벌하려면 언제쯤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좋겠소?”
“항우는 팽성으로 천도한 이후 이쪽 방면에는 전혀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아서 지금 제후들의 국경 경비는 그야말로 허술하기 짝이 없사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군사 훈련을 2, 3개월만 충실히 실시한 뒤에 대왕께서 선두에 출사(出師)하시면, 제아무리 막강하다는 항우의 군사도 우리의 앞에서는 힘을 못 쓸 것이옵니다.”
“그렇잖아도 나는 파촉에 들어온 그날부터 줄곧 동정(東征)의 꿈을 꿔왔던 것이오. 출전태세만 갖추어지면 나는 번쾌로 선봉을 삼고, 조참을 군정사(軍政司)로 삼고, 은개(殷蓋)를 감군 대장(監軍大將)으로 삼아 나 자신이 앞장서 나갈 것이니, 대원수는 군사훈련을 속히 시작하시오.”
다음날 한신은 연병장(練兵場)으로 나가 군사들이 조련하는 모습을 직접 참관해 보았다.
그리고 크게 실망하였다. 훈련하는 군사들은 군법을 전혀 모를 뿐만 아니라, 대오(隊伍)도 문란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에 한신은 훈련대장을 불러 서슬이 시퍼렇게 꾸짖는다.
“그대는 군사들을 이런 꼴로 훈련시켜 무엇에 써먹겠다는 것인가? 군대란 적과 맞부딪쳐서 생사를 걸고 자웅을 겨루는 것인데, 지금 귀관이 훈련시키는 광경을 보면, 사병들은 지휘관의 마음을 모르고, 지휘관은 사병들의 마음을 몰라서 제각기 놀아나고 있으니 이래 가지고야 싸움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대원수 한신의 꾸지람은 준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군사들의 훈련상태에 크게 실망한 한신은, 곧 본영(本營)으로 돌아와 모든 지휘관들을 비상 소집해 놓고 말한다.
“나는 지금 병사들의 훈련장에서 돌아오는 길인데, 군사들의 무질서한 훈련모습에 크게 실망하였소. 군사들을 이런 꼴로 만들어 놓은 것은 지휘관들의 책임이 있는 것이오. 나는 일찍이 ‘대오(隊伍)의 배열(排列)’과 ‘진세(陳勢)의 강약’과 ‘동정(動靜)의 기복(起伏)’ 등을 상세하게 책으로 저술한 바가 있소. 그 책이 바로 이것이오.”
그리고 한신은 자기가 저술한 병서 한 권을 지휘관들에게 보여주면서 다시 말한다.
“귀관들은 사흘 안으로 이 책을 한 권씩 필사(筆寫, 베껴 씀)해서 모든 군사들을 이 책에 쓰인 대로 훈련시켜 주시오. 만약 명령에 따르지 않는 지휘관이 있으면, 수하를 막론하고 군율에 따라 엄중히 처벌할 것이오.”
지휘관들은 한신이 저술했다는 ‘한신 병서’를 읽어 보고, 저마다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 책에는 깃발, 소리, 명령에 따라서 군사들이 취해야 할 일사불란한 대열과 대오의 형성 모습에 대한 지도와 감독의 방법이 상세히 쓰여 있는 것이었다.
‘대원수님이야말로 신기묘산(神機妙算)을 다 알고 계시는 귀신같은 어른이시구나.’
그때부터 각 지휘관들이 ‘한신 병서(韓信兵書)’에 의해 군사들을 훈련을 시키니 병사들은 새사람이 된 것처럼 군율이 엄격하고 기동이 일관되게 민첩해졌다.
이렇게 40여 일이 경과 했을 때는 어떤 군사들보다도 막강한 군사가 되었다.
하루는 한왕이 군사들의 훈련 상태를 친람(親覽)하고자, 백관을 거느리고 훈련장에 나왔다가 이전과는 다르게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다.
“장군은 군사들을 무슨 방법으로 훈련 시켰기에 이렇게도 훌륭한 군대로 만들어 놓으셨소?”
한신은 한왕에게 자기가 저술한 병서를 내보이며 대답한다.
“이 책에 의하여 훈련시킨 것입니다.”
한왕은 한신이 내놓은 병서를 읽어 보고 감탄하면서,
“이 책은 ‘손자병법’에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병서구려. 이 책은 누가 지은 것이오?”
“황공하오나 소신이 저술한 것이옵니다.”
“뭐요? 장군이! 장군이 이처럼 훌륭한 병서까지 저술했을 줄은 미처 몰랐소이다.”
“군사들의 훈련을 철저히 시켜놓았기 때문에, 이제는 20만 밖에 안 되는 우리 군사로도 항우의 백만 대군을 능히 격파할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한신은 자신을 가지고 말했다.
군사들의 철두철미한 훈련상황을 지켜보게 된 한왕은 마침내 전 장병에게 다음과 같은 출사령(出師令)을 내렸다.
“초패왕 항우는 천명(天命)을 어기고 의제를 시해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너무도 괴롭히고 있다.
이에 짐은 천명에 따라 한신 장군을 파초 대원수로 봉하여 항우를 정벌하고자 하노니, 모든 장병들은 대원수의 지휘에 절대복종하여 불의의 무리들을 가차 없이 격파하라.“
한신은 한왕으로부터 ‘출사령’을 받자, 모든 대장들을 원수부(元帥府)로 긴급 소집하여 다음과 같이 ‘전시군법(戰時軍法)’을 새로 제정 공포하였다.
1. 북(鼓)소리를 듣고도 나아가지 않는 자와 징(金)소리를 듣고도 물러나지 않는 자, 깃발을 들어도 일어나지 않는 자와 깃발을 내려도 엎드리지 않는 자는 모두가 군율을 어겼으므로 참형에 처한다.
2. 이름을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 자와 점호(點呼)를 했을 때 현장에 없거나 혹은 늦게 달려온 자는 군무태만죄로 참형에 처한다.
3. 야간 근무 중 적정(敵情)을 늦게 보고하거나 혹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아니하고, 과장 또는 축소하여 보고한 자는 지휘관의 판단을 흐리게 한 죄로 참형에 처한다.
4. 지휘관을 함부로 원망하거나 또는 명령대로 시행하지 않는 자는 명령 불복종죄로 참형에 처한다.
5. 진중에서 소리를 내어 크게 웃거나 금지 사항을 무시한 자, 군문(軍門)을 마음대로 들락거리는 자는 군기를 무시한 죄로 참형에 처한다.
6. 병기를 못 쓰게 하거나 활줄과 화살촉을 뽑아 버린 자, 검극(劒戟, 칼과 창)을 못 쓰게 만들어 놓은 자는 군법에 따라 참형에 처한다.
7. 유언비어를 날조해 퍼뜨리거나 혹은 꿈을 빙자하여 요사스러운 소문으로 사기(士氣)를 어지럽히는 자는 군율에 의해 참형에 처한다.
8. 입을 함부로 놀려 쓸데없는 시비를 걸거나 공무를 비방하여 군과 관의 불화를 도모한 자는 참형에 처한다.
9. 점령지대의 백성들을 홀대하거나 부녀자들에게 간음을 범한 자는 참형에 처한다.
10. 남의 재물을 훔치거나 공리(功利)를 도모하려고 인명을 해친 자는 도둑으로 간주하여 참형에 처한다.
11. 진중에서 회의를 열고 있을 때 군기(軍機)를 엿듣는 자는 간자(間者)로 간주하여 참형에 처한다.
12. 작전명령을 받고 나서 그것을 외부에 누설한 자는 참형에 처한다.
13. 상관에게서 명령을 받았을 때 대답을 분명하게 하지 않거나 난색을 표명하는 자는 명령 불복종 죄로 참형에 처한다.
14. 대오(隊伍)의 질서를 무시하고 단독으로 전진하거나, 큰 소리로 떠들어 우리의 소재를 적이 알도록 하는 자는 난군죄(亂軍罪)로 참형에 처한다.
15. 거짓 상처나 꾀병으로 전투를 기피하거나 죽음을 가장했다가 도망을 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
16. 군수 불자를 배분함에 친분을 가려 불공평하게 배급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
17. 적을 정탐할 때 적정(敵情)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판단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거짓 보고를 하여 지휘관의 판단을 혼란하게 만든 자는 참형에 처한다.
한신은 위와 같은 ‘전시군법’을 모든 대장들에게 상세히 설명해 주고 나서 끝으로 이렇게 명했다.
“모든 지휘관들은 이 군법을 오늘 중으로 한 벌씩 베껴서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도록 하오.”
파초 대원수 한신은 ‘전시군법’을 제정하여 선포한 바로 그날 밤 자시(子時, 자정 즈음)에 모든 지휘관들에게 비상 소집령을 내렸다.
말할 것도 없이 새로 선포한 법령을 지휘관들이 어느 정도 잘 지키는지 직접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명령일하 모든 지휘관들은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원수부에 모여들었다.
평소에 정신 훈련을 준열하게 시켜 둔 효과가 여실히 나타났던 것이다.
한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부관에게 명한다.
“시간이 다 되었으니 원문(轅門)을 잠그고, 이제부터는 누가 와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라. 어느 대장이 오지 않았는지 내가 직접 알아봐야 하겠다.”
한신은 대장들의 이름을 한 명씩 호명해 갔다.
출석 여부를 직접 점검하였더니 모든 대장들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정시(定時) 전까지 도착해 있었으나 감군 대장 은개(監軍大將 殷蓋)만이 보이지 않았다.
감군 대장 은개는 자신의 지위가 높은 것을 믿고 한신을 업신여기는 마음에서 의도적으로 늦게 나오고 있었다. 그가 원수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원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 제 9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