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42화
2021. 4. 15. 09:17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42화
☞ 劉邦(유방)의 등장
진시황이 죽고 호해가 2세 황제로 등극하여 불알도 없는 환관 조고가 사실상 전권을 휘두르고 있을 무렵, 패현(沛縣)에는 유방(劉邦)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유방은 어려서부터 무술에 능하여 사상(泗上)이라는 마을의 정장(亭長, 지금의 洞長동장 格격)이 되기는 하였으나 벼슬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주색(酒色)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유방은 체구도 큰데다 성품도 활달하고 관인후덕(寬仁厚德)하여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포용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는데, 얼굴 또한 용을 닮아 특이하게 생겼다. 게다가 왼쪽 허벅지에는 72 개의 점이 있어 그를 본 관상가들은 ‘장차 큰 인물이 될 사람’이라고들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 본인은 남들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말을 하든지 전혀 관심이 없이 매일 술과 계집만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렵 그 지방에는 여문(呂文)이라는 60대의 도학자(道學子)가 있었다.
여문은 학문에 해박했는데, 특히 관상학(觀相學)에 조예(造詣)가 깊어 그 지방에서는 그를 따를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여문이 어느 날 객주집 앞을 지나다가 그곳에 혼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유방을 유심히 살펴보더니 발걸음을 멈춰 섰다.
그리고 생면부지의 유방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젊은이! 우리 집에 좋은 술이 있는데... 자네에게 한잔 대접하고 싶으니 나와 함께 우리 집으로 가지 않으시겠나?”
유방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는다.
“노인장께서는 무슨 연유로 저에게 술을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이 사람아! 늙은이가 좋은 술 한 잔 대접하겠다는데 무슨 뜻이 있겠는가?”
“좋습니다. 저는 술이라면 워낙 사족을 못 쓰는 놈인데, 좋은 술을 주신다니 무조건 따라가겠습니다.”
이리하여 여문은 유방을 데리고 집으로 와서 술잔을 나누는데, 유방의 관상은 볼수록 제왕지상(帝王之相)이 분명하였다. 이에 여문은 내심으로 결심한 바가 있는지 안방으로 들어가 마누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보, 마누라! 지금 사랑방에 와 있는 젊은 청년과 우리 집 큰딸 아이를 결혼시켜야겠소.”
마누라는 너무도 뜻밖의 말에 기절초풍할 듯이 놀란다.
“이 영감이 정신이 돌아버린 모양이구려. 그 아이는 이미 이 고장 현령(縣令)에게 주기로 약속이 되어 있지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오늘 처음 보는 낯선 청년과 결혼을시키겠다는 거예요?”
“그런 약속이야 파기해버리면 그만 아니겠소?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당신은 나만 믿고 있어요."
그래도 마누라는 화를 내면서 극성스럽게 반대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건 안 돼요. 현령을 사위로 맞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데 그것을 마다한다고요?“
마누라가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현령이라면 한 고을의 사또가 아니던가! 사또를 사위로 맞이하면 장인도 장모도 호강을 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여문 노인의 판단으로는 사또 따위는 문제가 되지도 않았다.
“여보, 마누라~ 당신도 잘 알고 있다시피 우리 집 큰딸 아이는 보통내기가 아니오. 장차 황후의 기상을 타고난 그 아이를 겨우 마을 현령 따위에게 주어버리자는 게요?”
“그 아이가 황후가 된다니 영감은 그 것이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시우? 보자보자하니까 엉터리 관상만 보아가지고 쯔쯧..!”
“에이 참! 이 마누라쟁이하고는... 관상학으로 보아 우리 큰 아이는 틀림없이 황후가 될 아이란 말이야!”
“영감의 관상 따위를 누가 믿어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마누라는 영감의 관상 실력을 당초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여문 노인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했다.
“허참! 남들은 모두 내가 보는 관상을 최고로 알아주는데, 집안에서는 영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니... 쯔쯧! 하여튼 당신이 끝까지 내 의견에 반대한다면, 딸아이를 이 자리에 불러다 놓고 본인더러 결정하라고 합시다. 됐소?”
“맘대로 하시구려. 물어보나 마나 그 애는 현령한테 시집가겠다고 할 거예요.”
두 내외는 딸을 불러서 자초지종을 자세히 설명해 준 뒤에 물어본다.
“너는 현령에게 갈 테냐, 그렇지 않으면 장차 제왕이 될지도 모르는 젊은이에게 시집을 갈 테냐?”
큰 딸은 미혼의 처녀치고는 워낙 생각이 깊은 여인이었다. 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즉석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현령은 싫어요. 그 젊은이에게 가게 해주세요.”
어머니가 너무도 기가 차서 호통을 친다.
“이것아! 네가 지금 제 정신이냐? 어째서 현령을 마다하고, 유방인지 젖통인지 별 볼일 없는 일개 ‘난봉꾼’에게 시집을 가겠다는 게냐?”
“어머니! 제 일은 저에게 맡겨 주세요. 사내대장부가 여자를 모른다면, 그런 사내를 어디에 쓰겠어요? ‘자고로 영웅호걸이 호색한다.’는 말도 있고요. ‘유방’이라는 청년이 아버님 말씀대로 장차 제왕이 될지 어쩔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기는 하지만, 젊은 그 사람에게는 미래라는 것이 있지 않아요? 그러나 현령이라는 사람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버린 사람이고요!”
아버지 여문은 딸의 똑 떨어지는 명쾌한 대답을 듣고 크게 감탄한다.
“과연 너는 황후감이 분명하다. 네 뜻을 알았으니, 이제는 이 애비가 알아서 하겠다.”
여문 노인은 다시 사랑방으로 돌아와 유방과 다시 술잔을 주고받다가 문득,
“여보게 젊은이! 내게는 사랑스런 딸이 있는데, 자네가 내 딸아이와 결혼을 해주지 않겠나? 그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라네.”
하고 말했다.
처음 만난 청년 유방을 사위로 맞이할 결심이었던 것이다.
유방은 너무도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하였다.
“노인장께서는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여문 노인은 유방에게 다시금 술잔을 권하면서 말했다.
“내게는 자식으로 자매가 있는데, 큰딸의 이름은 ‘안(顔)’이라고 하네. 그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니 자네가 그 아이와 결혼을 하라는 말일세. 다시 말하면, 자네가 내 사위가 되어달라는 말일세.”
“노인장과 저는 오늘이 초면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보고 저한테 따님을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자네가 궁금한 모양이니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해 줌세. 나는 관상학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일세. 자네와 나는 오늘이 초면이지만 관상학적으로 보아 자네는 먼 장래에 반드시 제왕이 될 사람이야. 그래서 자네에게 내 딸을 주려는 것일세.”
“제 얼굴이 먼 장래에 제왕이 될 상이라고요? 아무튼 잘 보아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긴 사람 팔자는 알 수 없는 것이지요. 하니 저라고 제왕이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겠지요. 제왕의 씨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저는 지금으로서는 장가갈 형편이 못 됩니다. 따라서 노인장 말씀은 고맙지만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방은 완곡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여문 노인은 끈덕지게 설득한다.
“이 사람아! 자네가 장가갈 형편이 못 된다니 그것은 무슨 소린가? 어째서 장가를 갈 수 없다는 것인지 그 이유나 한 번 들어보세.”
두 사람이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을 때, 뒷문 밖에서는 이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처녀가 있었으니, 그 처녀는 여문의 딸 ‘안랑(顔娘)’이었다.
안랑은 문틈으로 엿본 유방의 얼굴이 마음에 들어 ‘아버지가 나의 신랑감을 정말로 잘 고르셨구나.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저 사람과 결혼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러나 유방은 여문 노인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제가 지금 형편으로는 결혼할 수 없는 사유가 세 가지 있습니다.”
“무슨 사유인지 말해 보게나.”
“첫째는 제가 아직 학문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아직 수양을 제대로 쌓지 못해 인생의 목표를 뚜렷하게 세우지 못하였기 때문이고, 셋째는 집이 가난하여 아직 처자식을 먹여 살릴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뒷문 밖에서 그 말을 들은 안랑은 크게 실망하였다.
거절을 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여문 노인은 단념하지 않았다.
“이 사람아! 그게 어디 결혼을 하지 못 할 사유가 되는가? 자네 말을 들어 보니 자네의 됨됨이가 더욱 믿음직스럽기만 하네.”
유방은 여문 노인에게 술을 따라 올리며 다시 말했다.
“저는 학문도, 용기도, 재산도 없는 놈인데, 뭐가 믿음직스럽다는 말씀입니까?”
그러자 여문 노인은 약간 나무라는 어조로 말을 하였다.
“이 사람아! 나는 자네의 재산을 보고 딸을 주려는 것이 아니네. 그 점은 오해하지 말아 주게.”
“그러나 처자식을 먹여 살릴 재산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불알 두 쪽밖에 없는 저에게 무슨 까닭으로 딸을 주시려는지 저는 도무지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불알 두 쪽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장가갈 자격은 충분하지 않은가? 하하하!”
여문 노인은 한바탕 크게 웃고 나서 다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내가 왜 자네를 믿음직스럽게 여기는지 그 이유를 말해 줌세. 사람이란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는 법이라네. 그런데 자네는 자기 자신의 부족한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니 그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청년인가? 보통 청년들 같으면 내가 딸을 준다고 하면 누구나 감지덕지했을 걸세. 그러나 자네는 생각이 깊어서 매사를 냉철하게 처리해 나가려고 하니 그 또한 믿음직스러운 점이 아닌가. 자네 관상이 워낙 제왕지상으로 생긴데다가 생각하는 바가 이처럼 신중하니 내가 어찌 사위로 탐을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노인장께서 보잘 것 없는 저를 지나치게 잘 보아 주셔서 송구스럽습니다.”
“그러면 나의 딸과 결혼을 하겠다는 말인가?”
“글쎄올시다.”
“내 입으로 이런 말을 하면 자네가 믿어 줄지 모르겠네마는 내 딸 역시 용모로 보나 평소의 행동으로 보나 자네의 배필로 부족함이 없는 아이일세. 내가 보기에는 자네와 내 딸은 하늘이 정해주신 배필인 것 같으이. 내가 자네에게 간곡히 부탁을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일세.”
유방은 아무 대답도 안 하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매우 죄송스러운 말씀이오나제 결혼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말아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여문 노인은 크게 실망하며 말한다.
“그래?.. 내가 이처럼 간청을 하는데도 안 되겠다는 말인가?”
“죄송합니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부득이...”
“그렇다면 2~3년쯤 기다려 주면 가능하겠나?”
“글쎄요. 그때 사정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2~3년 후에라도...”
유방이 거기까지 말했을 그때 별안간 뒷문이 사르르 열리더니 안랑이 유방에게 눈인사를 하면서 살포시 들어오는 것이었다.
※ 註) 안랑(顔娘)은 ‘안(顔)이라는 이름의 아가씨’라는 뜻으로 안(顔)을 높여 부른 것이다.
여문(呂文) 노인이 자신의 큰 딸을 유방(劉邦)에게 소개하며 이름이 ‘안(顔)’이라 했는데, 이 여인이 후일 유방이 중국을 통일하고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되었을 때, 여황후(女皇后)라 불린 ‘여치(呂雉)’를 말한다. 아마도 어려서 이름이 ‘여안(呂顔)’이었던 것 같다.
-제 4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