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43화

2021. 4. 16. 07:32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43화

☞ 유방(劉邦), 번쾌(樊噲)를 만나 동서가 되다.

방안으로 들어온 안랑(顔娘)은 눈을 들어 유방(劉邦)을 슬쩍 바라본 뒤,

“아버님! 소녀의 혼담에 대해서는 소녀도 한 말씀 여쭙고 싶은 말씀이 있사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여문(呂文) 노인은 딸이 별안간 사랑방에 들어온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아니, 네가 어인 일로 여기에 나타났느냐? 그러나 이왕 들어왔으니 유군(劉君)에게 인사 하거라. 여보게, 유군(劉君)! 이 아이가 바로 나의 큰 딸 안(顔)일세.”
하고 두 사람을 서로 소개시켜주었다.

유방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처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빼어난 미인은 아니었지만, 미간 사이가 넓은 것이 보통 처녀는 아닌 것 같았다.
처녀 안(顔)은 유방에게 머리를 공손히 숙이며, 당돌하게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소녀는 아까부터 뒷문 밖에서 두 분의 말씀을 엿듣고 있었사옵니다. 남의 말을 엿듣는 것이 예절에 어긋나는 일임은 알고 있사오나, 소녀의 일생에 관한 혼담이옵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엿들었사오니 그 점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옵소서.”
“아닙니다. 이야기가 혼담이니 당사자 본인이 엿들었기로 나무랄 일은 아니지요.”
유방은 어색한 말투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안랑은 도도한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계속 말했다.

“이처럼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니 고맙사옵니다. 유랑(劉郞)께서 조금 전 지금으로서는 결혼할 수 없는 이유를 몇 가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그것은 소녀와의 결혼을 거절하기 위한 단순한 핑계가 아니시온지 소녀는 그 점을 분명히 알고 싶사옵니다.”
안랑 처녀가 눈썹 한번 까딱하지 않고 야무지게 따지고 드는 바람에 유방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천만에요. 싫으면 싫다고 사실대로 말하지, 무엇 때문에 핑계를 대가면서 거절하겠소? 다만 지금으로서는 장가갈 수 없는 사정을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오. 그 점에 오해가 없기를 바라오.”
안랑은 그제서야 마음이 놓이는지 얼굴에 가벼운 희색을 띄며,

“그렇다면 소녀는 안심이옵니다.”
하고 밝은 목소리로 수줍은 듯 말을 이어갔다.

“안심이라니, 뭐가 안심이란 말이오?”
이번에는 유방이 물어 보았다. 그러자 안랑은 별안간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아까 유랑께서 말씀하신 사유는 결혼을 못하실 이유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옵니다.”
“학문이 부족하고, 용기가 없고, 처자식을 먹여 살릴 돈이 없는 것이 어째서 결혼을 못할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오?”
“............”
안랑은 유방의 얼굴을 다정한 눈매로 그윽이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있고, 옆에서 듣고만 있던 여문 노인이 그제서야 미소를 지으며 딸에게 말했다.

“네가 유 군에게 첫눈에 반한 모양이로구나. 학문이 없고, 용기가 없는 것이 어째서 결혼 못할 사유가 되지 않는지, 네가 시원스럽게 대답해 보거라!”
유방은 처녀의 얼굴을 새삼스러이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보면 볼수록 호감이 가는 얼굴인데다가 성품 또한 활달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면.., ‘이만한 여자라면 지금이라도...’
유방은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학문이 부족하고, 용기가 없고, 돈이 없는 것이 왜 결혼하지 못할 사유가 되지 않는지 낭자의 생각을 진솔하게 말씀해 주시오. 참고삼아 꼭 들어 보고 싶소이다.”
하고 말하였다.
안랑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유랑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소녀의 생각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나이다. 첫째, 지금으로서는 학문이 부족하여 결혼을 못하시겠다고 하셨으나, 학문이란 것은 평생을 두고 배워도 끝이 없는 것이온 바, 따라서 학문을 연구하기 위하여 일생을 독신으로 살아가신다면 몰라도 어차피 결혼을 하실 거면 지금 하시나 2~3년 후에 하시나 마찬가지 일이 될 것이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안랑의 명석한 사리 판단에 크게 놀랐다.

“듣고 보니 과연 그렇군요. 그렇다면 용기도 없고 돈도 없는데, 그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유랑께서 용기가 없는 것도 결혼을 할 수 없는 사유라고 하셨습니다만, 용기라는 것은 어떤 일에 부딪쳐야 용솟음쳐 오르는 것이지, 아무런 일도 없을 때에 솟아나는 것은 아니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돈이 없어 결혼을 못하겠노라고 말씀하셨으나, 돈이라는 것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겨나는 것이옵니다. 지금은 비록 한 푼 없는 처지라 하여도 두 사람이 결혼 후에 힘을 모아 노력한다면 천하를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는 일인데, 지금 당장 돈이 없는 것이 무슨 허물이 되겠나이까?”
“예? 두 사람이 결혼 후에 힘을 모아 노력하면 천하를 내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요?”
유방은 안랑의 여장부다운 포부를 본 것 같아서 크게 놀라며 반문하였다. 여문은 이때다 싶어 얼른 대답을 가로막고 나섰다.

“이 사람아! 나는 자네가 제왕지상을 타고난 인물이라고 이미 말한 바가 있지만, 이제야 말이지 내 딸 역시 자네 못지않은 제왕지상을 타고난 아이라네! 그러니까 내 딸과 결혼하면 자네는 틀림없이 제왕이 될 걸세!”
유방은 그 소리에 또 한 번 놀라며 묻는다.

“따님께서도 저와 똑같이 제왕지상을 타고난 여인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네! 그래서 두 사람은 하늘이 정해주신 배필이란 뜻일세! 그러니 자네는 내 권유대로 내 딸과 결혼하는 것이 세상을 구하는 길이 된다는 것이야!”
“좋습니다. 안랑 같이 훌륭한 처자를 제가 어찌 싫다고 하겠습니까?”
이리하여 이날 두 사람은 즉석에서 약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날의 예비신부 안랑이야 말로 후일 ‘여태후(呂太后)’로서 천하를 주름잡은 바로 그 여인인 것이다.

유방과 안랑의 약혼이 성립되자, 여문은 즉석에서 축하연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술이 몇 순배 돌아갔을 바로 그때 문득 대문 밖에서 몹시 큰 소리가 나는데...

“이 댁이 여문 선생님 댁입니까?”
하고 벼락치는 듯 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문이 일어나 나가 보니 대문 밖에는 키가 구 척이나 되고 얼굴이 시커먼 수염으로 뒤덮여 있는 몹시 험상궂게 생긴 젊은이 하나가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여문이 관상을 보니 얼굴은 비록 험상궂게 생겼어도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내가 여문인데, 무슨 일로 내 집에 찾아왔는가?”
여문이 묻자, 예의 그 청년은 머리를 꾸벅해 보이고 나서

“저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살고 있는 ‘번쾌(樊噲)’라는 놈입니다. 유방이라는 어른이 이 댁에 계시다기에 그 분을 뵈려고 찾아 왔습니다. 유 대인이 이 댁에 계시거든 잠깐 만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첫인상은 험상궂게 보이지만 관상학적으로는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 틀림없었다.

“유방을 만나게 해줄 테니 나를 따라 들어오게.”
번쾌는 여문을 따라 들어와 유방을 만나자, 방바닥에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

“유 대인께 인사올리겠습니다. 저는 이 지방에 살고 있는 ‘번쾌’라는 놈입니다. 하는 일은 비록 개백정 노릇을 해서 먹고 살고 있으나 나라를 일으켜보려는 큰 뜻을 품은 유대인을 찾아뵈러 왔사옵니다.”
유방은 번쾌의 손을 덥석 붙잡아 앉히면서 말한다.

“오오! 이 지방에 번쾌라는 지사(志士)가 있다는 소문은 진작부터 들어 알고 있었지만, 오늘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구려. 나를 일부러 찾아와 주셨다니 정말 고맙소이다.”
그러자 번쾌는 감격한 듯 머리를 숙이며 말했다.

“평소에 흠모해오던 유 대인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다시 없는 영광입니다. 유 대인께서는 혹시 진승과 오광의 무리가 진시황에게 등을 돌리고 초국(楚國) 재건운동을 펼치고 있는 사실을 알고 계시옵니까?”
유방은 웃으면서 대답한다.

“내가 어찌 그것을 모를 리가 있겠소! 내 비록 겉으로는 주정뱅이 행세를 해오고 있소만, 진승과 오광의 반란사건뿐만 아니라, 진시황 사후에 전국 각지의 영웅호걸들이 출반(出返)한 사실도 모두 알고 있다오.”
“그러한 사실들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다면, 유 대인께서는 어찌 아직도 세월을 허송하고 계시옵니까?”
번쾌의 질책은 은근히 신랄하였다.

“허송세월이라! 하하하.”
유방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통쾌하게 웃으며, 번쾌에게 술을 권하며 말했다.

“급히 마시는 물도 체하는 법이오. 매사에 때가 있는 것인데, 때도 오기 전에 서두르는 것은 도로무공(徒勞無功)이 되기 십상이라, 나는 오랫동안 술과 계집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오.”
번쾌는 그제서야 유방의 참뜻을 알아본 듯 말했다.

“유대인의 큰 뜻을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신중을 기하다가는 때를 놓쳐버릴 우려도 있을 것이니, 진시황이 죽어 천하의 주인이 없어진 이때가 유대인께서 일어나실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유대인께서 일어나신다면 저도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할 터이오니 천하대세를 속히 도모하도록 하소서.”
“고맙소이다. 그렇지 않아도 진작부터 동생공사(同生共死)할 동지들을 은밀히 규합해오고 있던 중이오. 그런데 귀공(貴公)이 이렇게 불시에 찾아와 나의 잠을 깨워 일으켜주니 나도 이제는 마음을 새로이 다잡을 생각이오. 자, 그런 의미에서 한 잔 씩 듭시다.”
유방은 번쾌에게 술잔을 권하며 말했다.

“오늘은 나에게 두 가지의 커다란 경사가 있는 날이오. 오늘이야말로 나에게는 다시없는 대길일(大吉日)인가 보오.”
“두 가지의 경사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첫째는, 귀공 같은 믿음직스러운 동지를 만난 것이고, 둘째는 가인(佳人)을 만나 백년지계(百年之契)를 약속하게 된 것이오.”
번쾌는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니 그럼, 유대인께서는 오늘 약혼을 하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소이다. 이 어른이 바로 나의 장인어른이시오. 어서 인사드리시오.”
그때까지 입을 닫고 묵묵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여문이 별안간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대장부와 대장부의 만남을 보니 마치 고기가 물을 만난 것만 같네 그려. 자네들 같은 두 사람이 뜻을 같이 한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어 놓지 못할 것인가? 그런데 번쾌 자네에게 청이 하나 있네.”
“어르신께서 저에게 청이라니요?”
“다름 아니고, 나에게 딸이 둘이 있는데, 큰아이는 유방과 약혼을 했으니 작은 아이를 번쾌 자네가 맡아 주었으면 하네.”
“저는 ‘개백정’이라고 불리는 천한 몸입니다. 그러한 저에게 어찌 귀한 따님을 주시겠다는 말씀이시옵니까?”
“밑바닥 세상을 모르는 사람은 만인의 친구가 될 수 없는 법일세. 여러 말 말고 내 딸을 맡아주게.”
여문의 결정에 유방도 크게 기뻐하며 번쾌에게 장가 들 것을 권하는 바람에 번쾌는 즉석에서 여문 노인의 둘째 사위가 되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장차 천하 대사를 도모할 유방과 번쾌는 동서지간(同壻之間)이 되었다.

※ 註) 유방(劉邦)과 동서지간이 된 번쾌(樊噲)
유방과 결혼한 여안(呂顔), 즉 여치(呂雉)에게 여동생이 있었으니 번쾌는 바로 이 여치의 여동생인 여수(呂嬃)와 결혼하게 된다.

번쾌가 패현 시절부터 유방을 따라다니던 최측근인데다 동서까지 되었으니 평생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는 충신이었다. 한고조가 죽기 직전 오해로 인해 번쾌를 죽이려 했으나 처형인 여후가 살려준다.

당시 한고조 유방과 여황후는 척비(戚妃)와 척비 소생 조왕(趙王) 여의(如意)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번쾌는 그의 처 여수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거기다가 여수는 언니인 여황후의 심복으로 여황후의 수족처럼 움직일 때였다.

한고조 유방이 죽고 나자 여치는 여태후가 되어 최고 권력자로 실권을 잡게 되는데, 덕분에 번쾌도 말년까지 편안하게 살다가 죽는다. 그러나 여수의 운명은 달랐다.
정권을 장악한 여태후가 여씨 일족에게 왕위며 작위를 내려줄 때, 여수도 여자에게는 드물게 임광후(臨光侯)라는 작위를 받게 되고, 아들인 번항(樊伉)도 함께 후작이 된다.
철권통치를 하던 여태후! 이런 여태후에게도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라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여태후가 죽은 후 정권을 다시 유방의 직계인 유씨(劉氏)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명분하에 진평(陳平) 등 대신들이 여씨 자제들과 여수의 가솔들을 주살하고, 이때 번항도 주살했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의 허망함이었다.

- 제 4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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