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21화
2021. 4. 4. 08:22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31화
☞ 폭정(暴政)의 끝판, 분서갱유(焚書坑儒)
※ 상아에 관한 후속편은 잠시 뒤로 미루고, 극악무도한 진시황의 폭정과 어지러운 시대상, 망국의 길로 들어선 진나라 말기에 혜성처럼 나타나는 인물들 항우(項羽)와 유방(劉邦), 유방의 책사 장자방[(張子房, 이름은 장량(張良)] 등 초한지의 서막(序幕)을 장식하는 인물에 관하여 먼저 약간의 간을 볼까 한다.
이즈음 진시황은 만리장성을 빨리 완공시키라고 닥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아방궁(阿房宮)을 대대적으로 증축하기 시작한다.
새로 증축하는 궁전은 그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정전(正殿)만 하더라도 동서가 2백 보에 남북의 길이는 50 장(丈, 성인 1인의 키)에 이르렀고, 궁전의 다락에서는 가히 천여 명이 주연을 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뿐만 아니라 궁전과 궁전 사이는 회랑(回廊, 복도)으로 연결하여 흙을 밟지 않고서도 다닐 수 있게 하였으며, 궁전을 짓는데 필요한 석재는 멀리 음산(陰山)에서 조달해 왔고, 모든 목재는 천 리가 넘는 형주(荊州)의 깊은 산에서 운반해 왔다.
이렇듯 광대하고 거창한 아방궁을 증축하다 보니 이곳에 부역하는 노역부만 70만 명에 이르렀고, 이 모든 것이 오로지 백성의 노역으로만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조정에는 수많은 중신들이 있었음에도 어느 누구 하나 감히 시황제에게 공사의 중단이나 부당함을 간언(諫言)하는 충신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의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했다가는 그가 누구든 그대로 끌려 나가서 단칼에 목이 날아가기 때문이었다.
조정의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시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신하들은 오직 듣기 좋은 소리만을 일삼는 간신배(奸臣輩)들 뿐이었다.
진시황 34년 어느 봄날, 이날도 시황제는 아방궁에서 중신들과 더불어 주연을 즐기고 있었는데, 취흥(醉興)이 도도해져 오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70여 명의 박사(博士)들이 입을 모아 시황제의 성덕을 찬양한다.
“옛날에는 진나라의 영토가 천리를 넘지 못했사온데, 폐하께옵서 신령명성(神靈明聖)하시와 해내(海內)를 모두 평정하시고, 오늘날 만백성은 전쟁을 모르고 안락하게 살 수 있게 되었사오니 이는 모두가 폐하의 성덕의 은혜인 줄 아뢰옵니다. 폐하께오서는 부디 일월과 더불어 만수무강하시와 만백성들이 태평성대를 길이 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시황제는 지극히 흡족해 하며, 70여 박사들에게 일일이 술잔을 내렸다.
그중에 한 사람, 제나라 태생인 석학(碩學) 순우월(淳于越)이 머리를 조아리며 건의(建議)한다.
“신이 아옵건대, 그 옛날 은(殷) 왕조와 주(周) 왕조가 천 년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왕의 자제들을 각 지방의 후주(侯主)로 봉(封)하여 왕실을 튼튼히 지켰기 때문이었사옵니다. 그런데 폐하께옵서는 후주 제도(侯主 制度)를 철폐하시고, 군현제도(郡縣制度)를 실시하심과 동시에 아무런 척분(戚分)도 없는 사람들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셨으니 그들이 과연 먼 훗날까지 황실에 충성을 다 할지 매우 의심스럽사옵니다. 폐하께서는 그 점을 깊이 살펴 주시옵소서.”
그것은 군현제도의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한 비판이었다.
시황제는 그 말을 듣고 적이 놀라 승상 이사를 불렀다. 기존에 유지되던 후주 제도를 군현제도로 개혁한 장본인이 승상 이사였기 때문이다.
시황제는 승상 이사에게 물었다.
“순우월(淳于越)의 건의를 들어 보건대, 진황조(秦皇朝)를 오래도록 누리려면 군현제도를 후주 제도로 환원시켜야 한다고 하는데, 경은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승상 이사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역사의 변천을 모르는 부류의 우견(愚見)에 불과한 주장이옵니다. 은나라, 주나라 시대에는 왕자들을 후주로 책봉하였기 때문에 후주들 간에 세력 다툼을 벌이느라고 세상이 그토록 어지러웠던 것이옵니다. 지금 와서 또 다시 후주제도로 환원하신다면 10년이 못가 세상은 또 다시 전국시대가 되고 말 것이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군현제도를 실시하여 각 고을의 군수를 언제든지 갈아치울 수 있게 되었으니 폐하의 권력은 날이 갈수록 견고해지고 있는 것이옵니다.”
“으음~ 듣고 보니 과연 경의 말씀이 옳은 것 같구려. 권력이란 한 사람에게 집중될수록 강해지게 되는 법이지.”
“옳은 말씀이시옵니다. 그러므로 폐하께서는 금후(今後)에는 학자(學者)들의 건의를 크게 경계하시옵소서.”
“학자들을 경계하라니? 그건 또 무슨 말씀이오?”
“학자들이란 본래 현실을 도외시하면서도 입만 살아서 조정의 시책에 비판이나 비방을 하지 않으면 입이 간지러워 못 견디는 족속들이옵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구려.”
“그렇사옵니다. 그들은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정부를 비방하는 것을 매우 고상하게 여기는 무리들이옵니다. 그런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었다가는 나라를 망치기 쉬울 것이니 금후에는 그들을 철저하게 단속하셔야 합니다.”
“으음...”
“더구나 옛날부터 사관(史官)이라는 자들은 역사를 제멋대로 기록해 놓았기 때문에 진나라의 기록이 아닌 역사책은 모두 불태워 버리셔야 하옵니다. 그리고 유생들이 가지고 있는 시서(詩書)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저서 따위도 하나같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사오니 그런 것도 모두 관청에서 몰수하여 불태워 버리도록 하시옵소서. 폐하의 정령(政令)을 비판하는 자가 있어서는 나라를 원만하게 다스려 나가기가 어렵기 때문이옵니다.”
시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옳은 말씀이오. 짐의 명령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있다면 그런 자를 어찌 용서하리오.”
이리하여 시황제는 그날부로 전국에 다음과 같은 엄명을 내렸다.
‘의약(醫藥)과 복술(卜術), 농사(農事), 진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책 이외에는 한 권도 남기지 말고 관가에서 몰수하여 모두 태워버려라. 이 명령이 전달된 날로부터 30일이 경과하도록 책을 제출하지 않는 자는 얼굴에 자문(刺文)을 그려 넣어 만리장성 축조공사에 노역부로 보내도록 하라.‘
모든 책을 몰수하여 태워 버리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시황제에 대한 선비들의 비난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그러나 선비들이 반대를 하거나 말거나 관가에서는 관원을 총동원하여 책을 강제로 몰수하기 시작한다.
이리하여 관가의 뜰에서는 날마다 책을 태우는 불길과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고, 연기는 산과 들을 뒤덮었다.
그러나 뜻있는 선비들은 목숨보다도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책인지라 시황제에 대한 비방을 더해가면서 책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우민(愚民) 정책을 써도 분수가 있지. 성현들의 유산을 불태워버리면 국가의 근본을 어디에 두고 나라를 다스려가겠다는 말인가?”
“만고의 폭군(暴君)이었던 걸주(桀紂)조차 책만은 태워 버리지 않았거늘 시황제 이 자는 어쩌자고 책까지 태워버리라고 하는가? 차라리 내가 불에 타 죽을지언정 책만은 못 내놓겠다.”
뜻있는 선비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서적 몰수에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 註) 걸주(桀紂) : 하걸상주(夏桀商紂)를 줄인 말로 하(夏)나라 걸(桀) 임금과 상(商)나라 주(紂) 임금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두 사람 모두 폭정으로 나라를 망하게 했는데, 걸주(桀紂)는 바로 폭군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말이다. 상(商)나라는 은(殷)나라라고도 한다.
선비들의 항거(抗拒) 원성(怨聲)이 마침내 시황제의 귀에 들어갔다.
“뭐라고? 차라리 제 몸이 불에 타 죽더라도 책만은 못 내놓겠다고?
그런 놈들은 불에 태워 죽일 것이 아니라 구덩이를 깊이 파서 모조리 구덩이 속에 쓸어 넣고 생매장을 해버려라.”
시황제는 무자비하고도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전국 각처에서 끌려 온 선비들은 460여 명에 달했다.
시황제는 그들을 굽어보며 말했다.
“너희들이 생매장 당하기 전에 용서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지금이라도 책을 내놓겠느냐, 아니면 죽겠느냐?”
그러나 선비들은 대답하는 대신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시황제의 얼굴을 향하여 침을 뱉었다. 시황제로서는 난생처음 당하는 치욕(恥辱)에 몸을 떨었다.
“여봐라! 이놈들을 짐의 눈앞에서 당장 생매장시켜라!”
이리하여 460여 명에 달하는 고명한 학자들이 한 구덩이에 생매장되었으니 이는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전무후무(前無後無)한 그 유명한 ‘분서갱유(焚書坑儒)’ 사건이다.
흡사 로마의 전 시가지를 불태우고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자작시를 읊어대는 로마제국의 폭군 네로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시황제는 책을 내놓지 않은 선비들을 생매장시키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다시 이런 명을 내렸다.
“오늘 이후 책을 단 한 권이라도 숨겨 둔 자가 있으면 가차 없이 생매장에 처하라!”
그리하여 전국 각처에서 생매장 당한 선비의 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고 하였던가!
이렇듯 시황제의 폭정이 심해질수록 백성들의 마음은 그를 떠나게 되었다.
시황제에게는 아들 형제가 있었다. 맏아들은 부소(扶蘇)이고, 둘째 아들은 호해(胡亥)였다.
태자 부소는 일찍이 경서(經書)에 통달하여 학문이 깊고 후덕(厚悳)하였다.
그러나 차남 호해는 어려서부터 주색잡기(酒色雜技)를 좋아하는 천하의 망나니였다.
태자 부소는 아버지 시황제가 명을 내려 전국에 있는 책을 모두 불태우고, 이에 불응하는 선비들은 모두 생매장한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리하여 대궐로 달려 들어와 울면서 간한다.
“아바마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바마마께오서 모든 책은 불태워 버리라 하시고, 선비들을 생매장하라고 하셨다는데, 그것이 사실이옵니까?”
시황제는 태연히 대답했다.
“모든 것은 네가 알고 있는 그대로다. 쥐뿔도 모르는 것들이 입만 살아서 ‘불알 보고 탱자, 탱자’하는 격이며, 조정에 대하여 비방만 일삼고 있으니 그런 것들을 살려두어 어디에 쓰겠느냐?”
부소는 아버지의 대답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하였다.
“아바마마! 그것은 크게 잘못된 처사이옵니다.
천하가 통일되었다고는 하오나 복속된 백성들 중에는 아직도 아바마마께 귀복(歸服)하지 않은 사람이 많사온데, 언제 어디서 어떤 불상사가 일어날지 모르는 마당에 민심에 이반하는 정책을 쓰시는 것은 매우 위험하지 않겠사옵니까?”
“입 닥치지 못할까? 젖비린내 나는 것이 무엇을 안다고 방자하게 주둥이를 놀리느냐?”
시황제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부소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 그냥 물러설 수가 없었다.
“아바마마! 소자의 말씀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여 주시옵소서. 선비들은 모두가 공맹사상(孔孟思想)에 근거를 두고, 정부의 시책을 정당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옵니다. 그런데도 아바마마께서는 임기응변(臨機應變)으로 만들어 놓은 법을 근거로 그들을 탄압하고 계시는데, 그래서는 민심의 안정을 기하기 어렵사옵니다. 그 점을 재삼 살펴주시옵소서.”
시황제는 그 말을 듣자 전신(全身)을 부들부들 떨며 대노(大怒)했다.
“이놈아! 네놈이 언제부터 부유(腐儒, 썩은 선비)들의 앞잡이가 되어 이처럼 요망스러운 입방아를 찧고 있느냐? 꼴도 보기 싫으니 썩 물러가라!”
태자 부소는 호위병에게 끌려나왔다. 그러나 시황제는 그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던지 다시 이렇게 명령하였다.
“여봐라! 태자 부소를 즉시 만리장성의 공사현장으로 보내라!”
이렇게 시황제는 자기 아들의 간언조차 귀담아 듣지 아니하고, 정배(定配 = 유배)까지 보내라고 명령을 했으니 그의 정신상태가 온전한 것인지 적이 의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제 32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