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68화

2021. 5. 11. 06:58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68화

☞ 홍문(鴻門) 대연회

유방이 항우의 초대를 받고 홍문전(鴻門殿)에 오기로 한 그날, 군사 범증은 유방을 없앨 준비로 새벽부터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범증이 연회장소를 상세하게 살펴보고 나서 항우를 찾아와 말한다.

“오늘같이 좋은 기회는 다시는 없을 것 같사오니 주공께서는 제가 말씀드린 대로 유방을 반드시 죽여 없애도록 하시옵소서. 그래야만 주공께서 천하를 얻게 되시옵니다.”
“잘 알았소이다. 유방을 틀림없이 죽일 것이니 경은 군사들을 막후에 직접 배치해 놓도록 하시오.”
범증은 요소요소에 군사들을 잠복시켜 놓고, 정공(丁公)과 옹치(雍齒) 두 장수로 하여금 출입문을 철통같이 지키도록 하였다.

이윽고 한낮이 되자, 유방은 백여 기의 호위 군사를 거느리고 나타나는데, 유방의 뒤에는 번쾌, 근흡, 기신, 등공 등의 대장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나 항우 측에서도 험상궂게 생긴 장수들이 요소요소에서 경비를 삼엄하게 하고 있어서 유방은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더구나 유방을 마중 나온 장수는 일기당천(一騎當千)으로 소문이 자자한 영포(英布)가 아니던가?
유방은 영포를 바라보며 수레에서 장량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암만해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그래도 연회에는 꼭 참석을 해야 하겠소이까?”
“저에게 대책이 있사오니 안심하시옵소서. 다만 항우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만 하시면 되옵니다.”
이윽고 유방 일행이 원문(轅門)에 당도하니, 대장 진평(陳平)이 유방을 마중 나와서 말한다.

“연회장에는 패공과 장량 선생만 들어오시고, 그 밖의 사람들은 장외(場外)에서 기다리게 하라는 노공의 분부가 계셨사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유방이 데리고 온 번쾌, 근흡, 기신, 등공 등은 원문 밖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연회장 문전에 당도하니 주변에는 무장을 갖춘 군사들이 여기저기 열을 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유방은 더욱 불안하여 장량에게 다시 묻는다.

“이곳 분위기가 마치 도살장 같은데, 그래도 들어가야 하겠소이까?”
“이미 이곳에 이르렀으므로 이제는 조금도 물러서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단 한걸음이라도 뒤로 가는 날에는 저들의 계략에 빠지게 되옵니다.”
그러다가 문득 무엇을 생각했는지

“여기서 잠시만 머물러 계시옵소서. 일단 제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 전내(殿內)의 사정을 한번 살펴보고 나오겠습니다.”
하고 말하며 연회장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정공과 옹치가 창검으로 앞을 가로막으며 제지한다.

“패공이 들어가시기 전에는 장내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오.”
“나는 패공의 명령을 받들고 노공을 먼저 만나 뵈러 가는 사람이오. 노공을 먼저 만나 뵈려는 나를 어째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그것은 당신 사정이지, 나는 알 바가 아니오. 나는 다만 패공이 들어오시기 전에는 이 문안으로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는 명령에 따를 뿐이오.”
“그러면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장량이란 사람이 패공의 분부를 받들고 노공을 찾아뵈러 왔다는 말씀만이라도 전해주시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오.”
수문장 정공이 안으로 들어가 항우에게 그 말을 전하니 항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좌우를 돌아보고 묻는다.

“장량이라는 자가 유방보다도 나를 먼저 만나겠다고 한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이오?”
그 자리에는 범증과 항백 등이 함께 앉아 있었는데, 범증이 얼른 입을 열어 말한다.

“장량은 일찍이 한(漢)나라에서 재상까지 지낸 지모가 출중한 모사입니다. 그는 지금 유방을 돕기 위해 패상에 와 있사온데, 장량이 먼저 찾아왔다는 것을 보면, 장량은 필연코 주공을 설득하기 위해 온 것이 분명합니다. 장량은 우리에게는 매우 위험한 인물이오니 차라리 이 기회에 그자도 없애버리는 것이 상책이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항백이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범증을 호되게 나무란다.

“주공께서 관중왕이 되시려면 이제부터 인심을 너그럽게 베풀어야 할 판인데, 장량같이 어진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 어쩌자는 것이오? 본시 장량은 나하고는 둘도 없는 친구요. 내가 장량을 설득하여 우리 사람으로 만들고자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니 절대로 장량을 죽여서는 안 되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백부와 장량은 그렇게나 가까운 사이요?”
“우리 두 사람은 막역한 친구입니다. 따라서 주공을 도와달라고 제가 부탁하면 장량은 결코 거절은 못 할 것이옵니다.”
“그렇다면 백부의 말씀을 믿고 장량을 만나보기로 합시다. 장량 같은 현사를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
그리하여 장량이 잠시 후에 전내(殿內)로 들어왔는데, 전내의 분위기가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먼저 항우 자신부터가 갑옷으로 중무장을 한데다가 장검까지 차고 있지 아니한가? 게다가 완전 무장을 한 병사들이 잔칫상 좌우로 무시무시하게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환영연을 베풀기 위한 장소라기보다는 흡사 도살장같이 살벌한 분위기여서 이것을 보게 된 장량은 가슴이 서늘해 올 지경이었다.

장량은 항우에게 큰절을 올리고 나서 입을 굳게 다문 채 일부러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자 항우가 궁금한 기색을 보이며 장량에게 말을 먼저 걸어온다.

“장공은 무슨 일로 찾아왔는지 어서 말씀을 해보시오.”
장량은 그제야 머리를 조아려 보이며,

“매우 외람된 말씀이오나, 소생은 이곳에 들어와 보고 전내의 분위기가 매우 못마땅하게 느껴졌사옵니다. 만약 노공께서 허락을 하여주신다면, 우선 그 점부터 말씀드리고 싶사옵니다.”
“전내의 분위기가 못마땅하게 느껴진다고? 어떤 점이 못마땅하게 느껴지는지 소원대로 말해보시오.”
“허락을 내려 주시니 소생이 느낀 바를 기탄없이 여쭙겠습니다. 자고로 명주(明主)가 천하를 다스리는 요체(要諦)는 무력으로 위엄을 보이는 데 있지 아니하고, 덕으로 자애를 베푸는 데 있다고 하옵니다. 그러기에 참된 거부(巨富)는 재산을 믿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참된 강자(强者)는 약한 듯이 보여 위력을 과시하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노공께서 패공을 초대하여 축하연을 베풀어 주신다고 하옵기에, 그 자리에는 필연코 풍악(風樂)과 가무(歌舞)가 그득 찬 분위기가 지극히 화락하리라고 소생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 하온데 정작 이 자리에 와 보온 즉, 장내에는 중무장을 한 병사들이 좌우에 쭉 도열해 있어서 분위기가 너무도 살벌하게 느껴지옵니다. 장내의 분위기가 이렇게 살벌해서야 어찌 화락을 즐길 수 있으오리까? 노공께서는 장한과 아홉 번 싸워서 아홉 번을 모두 승리하신 만고의 명장이심은 만천하가 모두 알고 있는 일이옵니다. 그러므로 용맹을 굳이 과장해 보이지 않으시더라도 노공의 위세를 누가 모르오리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공께서는 손님을 초대하는 이 자리를 삼엄하게 꾸며 놓으셨으니, 그것은 주인으로서의 예의를 벗어나는 일이 아닌가 하옵니다. 이러고서야 겁이 나서 손님이 어찌 마음을 놓고 기쁨을 같이 나눌 수 있겠나이까? 현명하신 노공께서는 재고해주시기를 바라옵니다.”
장량의 변론은 침착하고도 정연하였다. 그러면서도 항우의 부덕(不德)을 신랄하게 쏘아붙였다.

이에 장량의 말을 들은 항우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더구나 이제부터 관중왕이 되려는 그로서는 ‘명주는 무력으로 위엄을 보이는 데 있지 아니하고, 덕으로 자애를 베푸는 데 있다.’는 말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자기는 어디까지나 ‘명주(明主)’가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항우는 즉석에서 군사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무장한 군사들은 장내에 한 사람도 남지 말고, 모두들 물러가 있거라.”
그리고 자기 자신도 갑옷을 벗어 버리고 평복으로 갈아입었다.
무장한 군사들이 물러가자, 장량은 머리를 조아려 보이며 항우에게 다시 아뢴다.

“오늘의 행사는 패공께서 초대를 받고 오시는 것으로 되어 있사오나 실상인즉, 진작부터 노공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려고 했던 것이옵니다. 그러하니 오늘의 회견(會見)은 노공께서 초청하신 것으로 생각지 마시옵고, 패공이 노공 전에 인사를 위해 찾아오신 것으로 생각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매우 좋았다.

“패공의 내방(來訪)을 나에 대한 예방으로 생각하고 있으라니 매우 기쁘오이다. 그러면 패공을 속히 들어오라고 하시오.”
“패공이 곧 입장하게 되실 것이옵니다.”
장량이 물러 나가자, 옆에 있던 범증이 항우의 태도에 걱정해 마지않으며 말한다.

“주공께서는 장량의 변론에 결심이 흔들려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애초의 계획대로 유방을 죽이도록 하시옵소서. 그렇지 못하면 후일에 커다란 우환을 초래하게 되시옵니다.”
“아, 그래? 그렇다면 처음의 방침대로 단행하기로 하겠소.”
이윽고 유방은 장량을 거느리고 홍문전 연회장에 들어섰다.

유방은 항우와 의형제 결의를 맺은 일이 있는지라, 단상에는 올라가지 않고 단하에서 허리를 굽혀 절을 하면서 말한다.

“형님을 찾아뵙는 것이 너무도 늦었사옵니다. 너그럽게 용서해주소서.”
그러나 항우는 이미 결심한 바가 있는 지라, 단상에서 유방을 굽어보며 다짜고짜 사나운 목소리로 따지듯 묻는다.

“그대는 그동안 세 가지 죄를 지었는데, 그대는 자기 죄를 알고 있는가?”
유방은 허리를 정중하게 굽혀 보이며 대답한다.

“소제(小弟)는 일찍이 패현(沛縣)의 정장(亭長)으로 있을 당시 형님 휘하에 들어와 진나라를 정벌하는데 있어서도 모든 일을 형님의 명령대로 거동했을 뿐이온데, 저에게 무슨 죄가 있으오리까? 소제 불민하여 자신의 죄를 잘 모르겠사옵니다.”
“그대가 자기의 죄를 모르겠다니 내가 분명히 일러주리라.”
그리고 항우는 범증이 미리 일러준 대로 유방의 죄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첫째, 그대가 함양을 먼저 점령한 것은 좋았으나 왕명(王命)도 없이 진황(秦皇) ‘자영’을 마음대로 석방해 주었으니 그 죄가 하나요. 둘째, 그대는 민심을 회유하기 위해 진나라의 법령을 마음대로 철폐하고 ‘약법삼장’을 임의대로 선포해 놓았으니 그 죄가 둘이요. 셋째, 그대는 군사를 파견하여 내가 남전관(藍田關)에 입성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놓았으니 그 죄가 셋이다. 그대는 그래도 자기 죄를 모르겠다는 말인가?”
항우의 논고는 자못 추상같았다.

이런 항우의 험상(險狀)으로 보아 유방은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음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유방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온건하고 침착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하였다.

“제가 비록 어리석기는 하오나 어찌 형님의 명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오리까? 형님께서는 노여움을 푸시고, 제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잠깐만 들어보아 주소서.”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어서 말해 보라.”
유방은 다시금 허리를 굽혀 보이며 말한다.

“첫째는 ‘진황의 석방에 관한 문제’이온데, 진황이 항복을 해오기는 했으나, 그를 죽이고 살리는 것은 오직 형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제가 좌지우지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를 붙잡아 놓고 형님이 입성하시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지, 그를 석방해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영 같은 중죄인을 어찌 감히 제가 맘대로 석방할 수가 있으오리까? 그 점 오해를 풀어 주시옵소서.”
그 말을 듣고 항우는 수긍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묻는다.

“그 문제는 그렇다 치고, 진나라 법령을 어째서 맘대로 철폐했으며, 무슨 이유로 약법삼장을 선포했는가?”
“함양에 들어와 보니, 진나라의 학정이 얼마나 가혹했던지 백성들은 모두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만약 진나라의 법령을 철폐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바뀐 새 나라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여길 것이기에 저는 진법을 신속히 철폐함과 동시에 형님의 덕을 높여 드리고자 ‘약법삼장’이라는 것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은 저의 처사를 크게 환영하면서 ‘선봉장이 이렇듯 후덕할진데, 총사령관인 항우 장군이 입성하시면 우리에게 얼마나 더 크고 많은 덕을 베풀어 주실 것인가?’하고 백성들은 저마다 형님께서 하루속히 입성해 주시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소제는 모든 일을 형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처리했을 뿐이지, 그 외에는 다른 뜻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과연 논리 정연한 대답이었다. 항우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세 번째 죄를 추궁한다.

“그 문제는 그렇다 치고, 남전관에 군사를 배치하여 나를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은 무슨 이유였는가?”
“남전관에 군사를 배치했던 것은 형님의 입성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진나라의 패잔병과 도둑들이 난동을 쳤기 때문에 그들을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형님께서는 형제간의 정의를 생각하시와 부디 오해를 깨끗이 풀어주시옵소서.”
유방은 어디까지나 정리(情理)에 호소하였다.

항우는 본시 우둔하고 단순한 성품인지라, 유방의 설명을 듣고 보니 하나도 나무랄 데가 없어 보였다.
‘음... 유방이 나를 위해 자기 딴에는 제법 애를 써 온 모양이구나.’

- 제 6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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