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69화
2021. 5. 12. 06:35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69화
☞ 범증의 유방 암살 실패
항우는 그런 생각까지 들자 유방을 의심했던 것이 오히려 민망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몸소 단하로 내려와 유방의 손을 다정히 잡고 단상까지 끌어올리며 말한다.
“패공의 설명을 듣고서 나는 모든 오해가 깨끗이 풀렸소. 실상인즉, 패공의 휘하에 있는 좌사마(左司馬) 조무상이라는 자가 ‘유방은 모반을 도모하고 있는 중이다.’라는 밀서를 보내왔기로 나는 그 밀서의 내용을 믿고 패공을 일시나마 의심하게 되었던 것이니 과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속으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조무상이라는 자가 형님에게 어떤 밀서를 보냈는지는 모르오나, 하찮은 자의 밀서로 인해 이 아우에게 일시나마 의혹을 품고 계셨다는 것은 매우 섭섭한 일이옵니다. 하하하!”
하고 일부러 통쾌하게 웃어 보이기까지 하였다. 항우도 따라 웃으며 말한다.
“내가 아니라도 나를 배반하는 자가 있다는 밀서를 받아 보았다면 누군들 의심을 하지 않으리오? 자, 이제 과거사는 불문에 붙이고, 오늘은 술이나 마음껏 마시기로 합시다.”
두 사람이 단상으로 올라와 주안상 한복판에 좌정하자 범증, 진평, 장량, 항백 등도 좌우에 배석하였다. 그러자 항우가 시종을 돌아보며 명한다.
“지금 막사에는 점령 지대의 제후(諸侯)들도 있으니 그들도 불러 함께 즐기도록 하라.”
항우의 명령으로 점령 지대의 지방관 수십 명이 몰려 들어와 연회는 순식간에 사람들로 북적이며 성대하게 벌어지게 되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아가자, 백여 명의 악장(樂匠)들이 총동원되어 삼현육각의 풍악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수십 명의 무희(舞姬)들이 나비처럼 춤을 추고 돌아갔다.
그러나 범증만은 마음이 초조하여 술을 마셔도 술맛이 나지 않았다.
‘유방의 능수능란한 언변에 속아 넘어가 첫 번째의 계략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제는 두 번째의 계략으로 유방을 죽여 버려야 할 것인데, 항우 장군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범증이 항우의 동태를 유심히 살펴보니 항우는 술을 연방 들이켜며 웃고 떠들기만 할 뿐 유방을 죽일 기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두 번째의 계획을 실행에 옮길 때는 범증이 술잔으로 식탁을 세 번 두드리면 항우가 손을 들어 신호를 내리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범증이 아무리 술잔을 두드려도 항우는 손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항우는 어째서 약속을 무시하고 손을 들지 않았던 것일까?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유방을 죽일 생각이 없어졌기 때문으로 항우가 생각하기에 유방은 ‘죽일 가치도 없는 조무라기 무사(武士)’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범증은 유방을 대단한 인물로 보고 있지만 내가 보아서는 보잘 것 없는 시골뜨기에 지나지 않는다. 제후들이 보는 앞에서 요만한 위인을 죽인 데서야 내 체면이 뭐가 될 것인가?’
항우는 맘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범증은 점점 초조할 수밖에 없었다.
제2의 계략마저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는 제3의 계략대로 유방을 대취(大醉)하게 만들어 죽일 수밖에 없어서 범증은 진평에게 눈짓을 해보였다.
유방에게 술을 권하는 책임을 진평에게 맡겨 놓았기 때문이었다.
진평은 얼른 유방 앞으로 달려와 커다란 술잔에 술을 넘치도록 따라 올리려고 했는데...
“패공께서는 이 술잔을 받아 주시옵소서. 오늘 연회에서 술 상무를 맡고 있는 진평이라 하옵니다.”
진평이 그렇게 말을 하며 유방을 정면으로 바라보니, 유방의 얼굴은 첫눈에 보아도 제왕지상(帝王之相)이 분명하지 않은가?
‘아! 이렇듯 훌륭하게 생긴 인물을 죽여 없애는 것은 천의(天意)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범증은 사람을 잘못보고 유방을 죽이려 하지만, 제왕지상의 인물을 함부로 죽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진평은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자 유방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하여 유방에게 술을 권하면서도 술은 조금씩 따라주었다.
유방은 진평의 그러한 눈치를 알아채고, 고마운 뜻으로 진평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렇게 술을 마시게 된 유방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술을 많이 마신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술이 정도를 넘어야만 추태를 보일 기회가 생길 것이나 주석(酒席)에서 유방의 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의범절이 또렷하였다.
범증은 제3의 계략마저 실패로 돌아가게 되자 초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유방을 오늘 죽여 없애지 않으면 후일에 커다란 화근이 될 것이 분명할 진데, 이제는 별 수 없이 자객을 시켜 유방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버리게 해야겠다.’
범증은 이렇게 결심을 하고 하수인을 찾아 밖으로 나왔다.
그리하여 사방을 둘러보며 적당한 인물을 찾고 있노라니 항우의 종제(從弟)인 항장(項莊)이 눈에 띠었다.
‘옳지! 항장이라면 무술도 능하고, 더구나 항우의 동생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유방의 목을 따는 중요한 임무를 기필코 성공할 수가 있겠구나!’
범증은 항장에게 이날의 계략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주공은 인정이 많으셔서 유방을 죽이려고 하시지 않으니, 그대가 연회장에서 검무(劒舞)를 추다가 기회를 보아 유방의 목을 반드시 베어버리도록 하라. 만약 이 일을 성공시키는 날이면 그대는 영원한 공신(功臣)이 될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항씨 일문(項氏一門)은 전멸을 당하게 될 것이다.”
“유방을 죽이는 일은 걱정을 마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그리고 항장은 연회장으로 들어와 항우에게 절을 올리며 말한다.
“무사들의 술자리에는 검무가 따르는 법이온데, 이 자리에는 풍악만 도도할 뿐 검무가 없사옵니다. 제가 검무를 추어 손님들을 즐겁게 해드리고 싶사오니 주공께서는 허락을 내려 주시옵소서.”
“검무? 그것 참 좋은 생각이로다. 패공께서 멀리서 찾아오셨으니 네가 검무를 재주껏 추어 주빈을 즐겁게 해드리도록 하여라.”
항우는 남의 속도 모르고 기꺼이 허락해 주었다.
항장은 그때부터 유방의 앞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장검을 뽑아 들고 번개 치듯 칼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장량은 그 광경을 보고 큰일 났다 싶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항백에게 구원의 눈짓을 해 보였다. 그러자 항백은 얼른 검을 들고 달려 나와 항장의 검무에 함께 어울리면서 말한다.
“검무에는 상대가 있어야 하는 법이네, 내가 자네의 상대가 될 것이니 우리 한바탕 어울려 보세나.”
항백은 그러면서 항장이 유방의 앞으로 나서는 것을 자신의 몸으로 가로막으며 숙질간에 어이없는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항백이 항우의 백부이고, 항장은 항우의 종제이므로 항백과 항장은 집안의 숙질간이다.’
이렇듯 항백이 유방을 죽이지 못하도록 방해를 놓고 있기는 했으나 장량은 아슬아슬한 광경을 방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번쾌를 불러오려고 부리나케 밖으로 달려 나오려 하자 수문장 정공과 옹치가 앞을 가로막으며 외친다.
“윗분의 분부가 있기 전에는 아무도 이 문을 나가지 못하오.”
장량은 일순간 눈앞이 아뜩하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얼른 기지를 발휘했다.
“패공이 노공에게 드리려고 진나라의 옥새(玉璽)를 가지고 오셨소. 그런데 그 옥새를 번쾌 장군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옥새를 가지러 나가는 길이오.”
그러나 수문장들에게는 그 말도 통하지 않았다.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더라도 윗분의 분부가 있기 전에는 절대로 내보낼 수 없소.”
마침 그때 조금 전에 유방에게 각별한 호의를 보여 왔던 진평 장군이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아, 진평 장군! 노공에게 바칠 옥새를 가지러 잠깐 밖에 나갔다 와야 하는데, 수문장들이 못 나가게 하고 있으니 이를 어찌 했으면 좋겠소?”
장량은 진평에게 큰소리로 호소하였다.
진평은 장량이 무엇 때문에 밖으로 나가려는지 그 이유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장량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서 수문장에게 이렇게 소리를 질렀다.
“주공께서 옥새를 빨리 가져오라고 말씀하셨다. 옥새를 가지러 나가는 사람을 왜 못 나가게 하느냐?”
장량은 그 틈에 밖으로 달려 나와 번쾌를 붙잡고 연화장 내에서의 긴급사태를 말한다.
“항장이 검무를 추면서 패공을 해치려고 하고 있으니 장군이 빨리 들어가 이 일을 막아야 하겠소.”
“알겠습니다. 소장이 목숨을 걸고 패공을 지키겠습니다.”
번쾌가 장내로 들어가려고 하자, 또다시 수문장이 앞을 가로막는다.
“저 사람은 노공에게 옥새를 바치려고 들어가는 사람이오.”
번쾌는 장량의 기지로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염라대왕처럼 문간에 버티고 서서 항우를 노려보았다.
번쾌는 키가 9척인 데다가 얼굴은 온통 수염투성이였고, 손에는 장검조차 들고 항우를 노려보는 품이 보기만 하여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험상궂었다.
항우는 번쾌를 바라보고 적이 놀라며 측근에게 물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
장량이 얼른 대답을 가로맡는다.
“저 사람은 패공의 경호장(警護將)이온데, 이름은 번쾌라고 하옵니다.”
“아, 그래요? 과연 장사다운 풍채구려. 여봐라! 저 사람에게 큰 술잔으로 술을 한 잔 따라 주어라!”
번쾌는 커다란 술잔을 받아 선 자리에서 단숨에 들이켜 버리자, 항우는 그 광경을 보고 거듭 놀라며 말한다.
“과연 장사로다. 더 마시겠는가?”
“소장은 죽음조차 피하지 않을 각오이온데, 어찌 술 따위를 사양하겠소이까?”
“죽음조차 피하지 않겠다는 것이 무슨 소린가? 누구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있단 말인가?”
“일찍이 진왕은 포악하게도 백성들을 무자비하게 죽였기 때문에 천하가 모두 그를 배반했던 것이옵니다. 초회왕께서는 함양에 먼저 입성한 사람을 관중왕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신 사실도 있었으나 패공은 함양을 먼저 점령하고 나서도 재물과 궁녀들에게 일체 손을 대지 아니하고, 노공이 입성하시기를 고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노공은 그런 공로에 대한 칭찬은 못해 주시나마 소인배들의 참소의 말만 듣고 항장을 내세워 패공을 해치려고 하고 계시니 이것은 망진(亡秦)의 폭거와 무엇이 다르오리까? 만약에 항장이라는 자가 패공을 끝까지 해치려고 한다면, 소장이 목숨을 걸고 패공을 구출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번쾌의 눈에는 분노의 빛이 넘쳐나고 있었고, 항우는 번쾌의 항변을 듣고 소리를 내어 크게 웃었다.
“하하하, 패공은 나와 함께 이렇게 정답게 앉아 있는데, 누가 패공을 해치려고 한다는 말인가? 자네는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네 그려.”
“아니옵니다. 항장이라는 자가 검무를 추다가 패공을 해치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소장이 어찌 그것을 모르고 함부로 말하겠습니까?”
“자네가 그토록 의심스럽다면 검무를 더 이상 못 추게 하면 될 게 아닌가!”
그리고 항우는 항장을 돌아보며 명령을 한다.
“너는 당장 검무를 중지하고 물러가 있거라!”
그러자 항장은 검무를 중단하고 물러가 버렸다. 항우가 번쾌에게 다시 묻는다.
“항장을 쫓아냈으니 이제는 안심이 되는가?”
“이제는 마음이 놓이옵니다.”
“그렇다면 이리 와서 나하고 술을 같이 나누세. 패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하겠다는 자네의 충성심에 감탄해 마지않는 바이네.”
이리하여 항우와 번쾌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연달아 퍼마시는 바람에 항우는 마침내 정신을 가누기 어렵도록 대취해 버렸다.
장량은 그 틈을 타서 유방을 부추겨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러나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수문장 정공과 옹치가 출입문에 버티고 서서 앞을 가로막는다.
이때 진평이 눈치를 채고 뒤따라 나와 수문장에게 소리를 지른다.
“노공께서 대취하셔서 패공을 돌아가시게 하라는 명령이 계셨으니 문을 빨리 열어 드려라.”
이리하여 장량이 유방을 모시고 밖으로 나오니 문밖에는 근흡, 기신, 하후영 등의 장수들이 유방을 기다리고 있었다.
“패공을 빨리 패상으로 모시고 돌아가오.”
유방은 수레에 올라타며 장량에게
“선생도 나와 함께 돌아가셔야 합니다. 어름어름하다가는 큰일 나시오.”
“저까지 돌아가 버리면 후환이 두렵습니다. 저는 혼자 남아 있다가 뒷수습을 깨끗이 하고 돌아가야만 후환이 없을 것이옵니다.”
유방은 뛸 듯이 놀란다.
“이런 위험한 곳에 혼자 남아 계시다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오. 지금 당장 돌아가셔야 합니다.”
“제가 뒤처리를 하지 않고 그냥 돌아가 버리면 큰 탈이 나옵니다. 제 걱정은 마시고 빨라 돌아가시옵소서. 저도 수일 내로 돌아가겠습니다.”
장량은 유방을 서둘러 패상을 보내놓고 혼자만 남았다.
유방이 간다는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자 범증은 가슴을 치며 장탄식을 한다.
‘아아, 내가 그처럼 치밀한 계획을 세웠건만 유방이 살아서 돌아갔으니 천운이 그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항우 장군이 너무도 우둔한 탓인가?’
- 제 70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