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 63화

2020. 10. 12. 18:41김삿갓 방랑기


시인 김삿갓 방랑기 063화

[결코 만만치 않은 만만(滿滿)집 주모. 上]

인왕산을 내려온 김삿갓은 세검정을 지나 무악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파주, 장단을 거쳐 오백 년 망국지한이 서린 고려의 도읍지 송도에 가보려는 것이었다.
무악재 고개 위에 올라서니 넓은 들판이 한눈에 환하게 내려다 보여 한양을 돌아보며 생겼던 갑갑증과 함께 우울했던 가슴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터벅터벅 산길을 내려오던 김삿갓의 눈 앞에는 커다란 소나무 그늘 아래서 농사꾼인 듯싶은 장정 하나가 지게와 낫을 옆에 둔 채 네 활개를 쫙 펴고, 태평하게 낮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나무를 하러 가다가 낮잠을 자고 있는 듯하였다.

김삿갓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불현듯 벌떡 일어나 앉는데, 두 눈이 왕방울처럼 부리부리하고 머리에는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있는 것으로 보아 호락호락한 위인은 아닌 듯 보였다.
김삿갓은,

“날이 많이 덥군요. 산에 나무하러 가시던 길인가요.”
하고 말을 걸었다.
그러자 농사꾼은 자신이 앉아 있는 옆자리를 가리키며,

“산에서 내려오시던 길인가 보죠? 여기 좀 쉬어 가시오.”
하며 앉기를 권한다.
그러면서 자리에 앉은 김삿갓의 행색을 살피더니,

“그런데 남들은 좀체 쓰지 않는 삿갓을 쓰고 다니시는구려.”
하며 이상한 눈으로 김삿갓을 바라본다.
김삿갓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삿갓이야 사정이 있어서 쓰고 다니지요. 그나저나 아까부터 목이 컬컬하여 술 생각이 간절한데, 혹시 부근에 술집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시오?”
하고 물어 보았다.
농사꾼은 술이라는 소리를 듣더니 정신이 번쩍 드는지 왕방울 같은 눈알을 대번에 희번덕거리며 입맛부터 다신다.

“술집이요? 술집이라면 나한테 잘 물으셨소. 저기 보이는 고개를 넘어가면 만만(滿滿)이라는 술집이 있다오. 술맛도 기막히지만 안주도 천하일품이지요.”
“저 고개 너머에 그렇게나 좋은 술집이 있어요? ‘만만’이라, 술집 이름도 참 이상하네...”
김삿갓이 이렇게 말을 하자 농사꾼이 대뜸 대답하는데,

“술집 이름이 이상하긴요? 아, 글쎄, 술 한 잔 가득, 또 한 잔 가득, 그래서 찰 만, 찰 만, 만만 집이라오.”
“그것참 재미있는 술집 이름이오.”
김삿갓은 농사꾼의 너스레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보아하니 노형도 술을 어지간히 좋아하시는 모양이구려.”
“아따, 사내대장부치고 술 싫어하는 사람 보셨소. 돈이 원수라서 그 좋은 술을 맘껏 못 먹고 밤낮 촐촐하게 지내는 것뿐이지요.”
“그러면 내가 한 잔 살 테니 같이 가시려오?”
농사꾼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벌떡 일어서며,

“돈은 넉넉하시오?”
“돈은 걱정 말고 같이 갑시다.”
“그럼 나를 따라오시오.”
“지게와 낫은 안 가져가시려오?”
“술을 먹으러 가는 판인데, 그깟 지게와 낫은 가지고 가면 뭘 하오.”
“그러다가 누가 가져가 버리면 어떡하죠?”
“아따, 그 양반 걱정도 팔자요. 그깟 지게와 낫을 누가 가져간단 말이오. 어서 나를 따라오시오.”
김삿갓은 누가 술을 사고 얻어먹는 것인지 주객이 전도된 기분이었지만 농사꾼의 수작이 여간 흥미진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앞장서 허적대며 가는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윽고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 산 아래로 따라 내려오니 산모퉁이에 ‘滿滿’이라는 초라한 주막이 보였다.
그는 술집 안마당으로 들어서며 호기롭게 주인을 불러 젖힌다.

“만만 아줌마 계시오?.. 내가 오늘은 손님 한 분 모시고 왔소. 술은 넉넉하겠지?”
그러나 주모는 목소리만으로도 누가 왔는지 아는 듯 문도 열어보지 않고 짜증스런 어투로 대꾸한다.

“에구 저런! 백수건달이 또 왔는가 보네! 오늘은 아직 개시도 못했는데, 마수걸이 외상술을 먹겠단 말이오? 에구머니!.. 오늘은 제발 그냥 좀 가시구려.”
이렇듯 대꾸하는 주모의 말로 미루어 보건대, 이 사람 외상 술값이 어지간히 달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주모에게 백수건달로 불린 이 사내는 주모의 매몰찬 냉대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며 또다시 호기를 부린다.

“아따, 외상이 몇 푼이나 된다고 이 야단이야, 내가 주모 외상술값 떼먹을 사람으로 보여? 걱정 말라구!.. 그렇지만 오늘은 내가 외상술을 먹으러 온 게 아니고 큰 손님을 모시고 왔으니 아무 걱정 말고 어서 술상이나 차리라구!”
토라진 듯 방문을 등 뒤로 돌아앉아 있던 주모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들어서자, 그제서야 뒤를 돌아보더니 놀란 듯이 말을 한다.

“어머나! 다른 손님이 계신 것을 몰랐네...”
그러면서 김삿갓을 흘깃 보더니,

“어서 오세요. 상제님이 같이 오신 것 같군요. 우리 집은 밑천이 딸려서 외상술을 드리긴 곤란한데 어쩌지요?”
삿갓을 쓰고 있는 김삿갓을 상제로 알고 말을 한다.
김삿갓은 삿갓을 벗어들고 빙그레 웃으며 말을 했다.

“오늘 먹는 술값은 내가 맞돈을 드리죠. 염려 말고 술이나 주시오.”
그러자 백수건달로 불린 사내는 아랫목에 배짱 좋게 주저앉으며 한마디 한다.

“것 보라구!.. 오늘은 맞돈 주겠다는데, 주모는 웬 잔소리가 그리도 많지?”
그러나 주모도 만만치 않은 소리를 한다.

“내가 술장사를 시작한 첫날부터 삼 년 동안이나 외상술을 먹어온 주제에 무슨 낯짝으로 큰소릴 치는 게야. 어쩌면 사람이 염치가 있어야지 원...”
“아따, 외상술 주기가 그렇게나 아까우면 숫제 나를 서방님으로 모시면 될 것 아니겠나, 하하하.. 안 그래요? 삿갓 양반!”
백수건달이 능글맞게 나오자 주모가 입을 삐쭉이며 말을 한다.

“이봐요, 백수건달 씨!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아들 같은 댁을 서방으로 삼겠소?”
김삿갓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나이를 가늠해 보는데, 백수건달로 불리는 사내는 갓 40이 넘은 것 같아 보이고, 주모는 오십 중반으로 보였다.
그러자 백수건달이 대꾸하는데,

“아들 같은 젊은 사람하고 살면 더 좋지!.. 젊고 싱싱한 물건을 밤마다 맛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사람이 밥을 먹고 살아야지, 그 물건만 먹고 사는가?.. 개떡 같은 수작은 그만하고 밀린 외상값이나 어서 갚아요.”
김삿갓이 두 사람 하는 수작을 듣노라니 그냥 두었다가는 결판이 나지 않을 행색이라,

“외상값이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술값은 내가 낼 테니 염려 말고 술이나 가져 오시오.”
하고 재촉의 말을 하니 그제서야 주모는 얼굴에 화색이 돌며,

“오늘 술값은 틀림없이 손님이 맞돈으로 주시는 거죠?”
하고 또 한 번 묻는다.
이렇듯 주모가 하도 미심쩍어하므로 김삿갓은 숫제 주머니에서 돈 자루를 꺼내 보였다.

“자, 돈이 이만큼이나 있으니 무슨 걱정인가. 아무 걱정 말고 술이나 가져오라구!”
돈 자루를 보자 눈이 휘둥그레져 놀란 사람은 주모만이 아니라 백수건달도 왕방울 같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며 주모에게 호기롭게 소리치는데,

“이것 보아요, 주모! 지금 저 돈 자루 보았지? 아까부터 내가 큰 손님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술을 얼마든지 가져오라구. 이런 제기랄, 의심이 이렇게 많아서야, 쯧쯧...”
하며 제법 혀까지 차면서 주모를 나무란다.
주모는 그제서야 부엌으로 달려 나가 주안상을 들고 들어오며,

“백수건달이 오늘에서야 삿갓 양반 덕택에 술을 마음껏 마시게 되었구먼. 그러나 남의 호주머니 돈을 내 돈으로 착각은 하지 말아요.”
하며 또 한마디 쏘아 갈긴다.
그러자 백수건달은 지지 않고 한마디 하는데,

“이런 제기랄, 본래 돈이란 돌고 도는 것, 술자리에서 네 돈 남의 돈이 어디 있어? 안 그래요, 삿갓 양반?”
김삿갓은 동의를 강요당하자, 너털웃음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술자리는 시작되었다.
김삿갓은 비록 백수건달이라 불리는 사나이와 초면부터 술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지만 노상에서 술친구를 만난 것조차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수건달은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술잔을 쪽쪽 빨아대는 소리가 나도록 마시며 말한다.

“어~허.. 술맛 조오타... 이렇게나 좋은 술을 한 번도 마음껏 마셔보지 못하고, 그놈의 외상값 때문에 주모한테 밤낮 구박을 받아 오고 있으니 신세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네... 삿갓 선생! 어쩌다 내 신세가 이런 꼴이 되었는지 모르겠구려.”
김삿갓은 백수건달에게 술을 다시 따라 주고, 자기도 잔을 채워가며 말한다.

“나도 술을 좋아하지만 노형도 술을 어지간히 좋아 하는가 봅니다.”
“물론이지요. 남자의 인생에서 술과 계집을 빼놓으면 뭐가 남겠소.”
“하여튼 돈은 넉넉하니까 오늘은 마음껏 마셔 보시오.”
김삿갓이 그렇게 말을 하며 다시 술을 따라 주었다.
그러자 백수건달은 감격해 마지않으며,

“원, 이렇게도 고마운 일이 있나. 내가 어젯밤 돼지꿈을 꾸었더니 오늘은 술 복이 한꺼번에 터졌습니다그려.”
“그나저나 노형을 두고 주모가 백수건달이라고 부르던데, 그 연유나 들려주시오.”
김삿갓은 백수건달로 불리는 사나이의 속내가 무척 궁금했다.
그러자 그는 킥킥 웃더니 말을 한다.

“내 본래 이름은 백남봉이라오. 그런데 남봉, 남봉하며 남들이 부르다 보니 난봉꾼처럼 들리게 되었고, 결국은 난봉을 일삼는 백수건달로 불리게 된 것이라오.”
“허허.. 매우 재미있소이다.”
김삿갓은 별 일 다 보았다는 듯 호쾌하게 웃었다.
그러면서 곧 정색을 하며 백수건달에게 말했다.

“내가 노형에게 한 가지 따져야 할 일이 있소이다.”
“예?... 나한테 따질 일이 있다구요?”
“그렇소. 노형이 아까 나를 이 집으로 데리고 올 때 이 집에 술안주는 천하일품이라고 말하지 않았소이까? 그런데 정작 이 집에 와보니 안주라고는 고작 도토리묵 한 접시뿐이 아니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김삿갓이 안주 투정을 하자, 주모가 얼른 앞으로 나앉으며 대답을 가로 막는다.

“우리 집 술안주는 언제나 도토리묵 한 가지 뿐인 걸요. 한양에서도 제법 떨어진 첩첩산중이라 다른 안주는 재료를 구할 수가 있어야 말이죠.”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백수건달을 다시 나무랐다.

“노형은 이 집 술안주가 천하일품이라고 분명히 말하지 않았소. 그런데 주모의 말을 들어보면, 이 집 술안주는 언제나 도토리묵 한 가지 뿐이었다고 하니 노형은 처음부터 거짓말을 한 게 아니오?”
그러자 백수건달은 술 한 잔을 또다시 단숨에 쭈욱 들이키고 나더니 도토리묵 한 조각을 입안에 집어넣으며,

“이 집에 술안주는 언제나 도토리묵 한 가지 뿐이라오. 그러니 그게 바로 천하일품이 아니고 뭐겠어요, 하하하...”
하고 방안이 떠나갈 듯이 통쾌하게 웃어넘긴다.
김삿갓이 들어보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속은 것은 분명한데, 괘씸하지는 않았다.

“에이 여보시오. 나는 마침 출출하던 차에 안주가 천하일품이라 하기에 큰 기대를 걸고 왔다오. 그런데 도토리묵 하나를 가지고 천하일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하지 않소.”
백수건달은 그 말을 듣고 커다란 눈알을 두어 번 꿈쩍거리더니 별안간,

“이봐, 주모!”
하고 큰소리로 주모를 부른다.

“왜 또 부른대요?”
“이 집에 씨암탉 몇 마리 있지 않은가? 오늘은 큰손님이 오셨으니 한 놈만 안주 삼아 잡아먹자구.”
그 소리에 주모는 펄쩍 뛸 듯이 놀란다.

“백수건달이 미쳤나? 씨암탉은 우리 집 귀중한 재산인데, 그것을 어떻게 안주로 삼자는 말이야?”
“그 대신 돈을 많이 받으면 될 것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돼요.”
“허긴, 이집 씨암탉이 주모보다 더 가치 있다는 것은 내가 알지만 오늘은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그깟 씨암탉이 대수인가?”
“그깟 씨암탉이? 나보다도 가치가 있다고?”
주모가 주먹다짐하듯이 백수건달을 노려보며 말한다.

“그럼, 씨암탉은 매일같이 달걀을 하나씩 낳아 주지만 주모야 달걀도 못 낳는 식충이 아닌가! 하하..”
씨암탉 이야기가 오가자, 김삿갓은 새삼스럽게 시장기가 들었다.
그래서 주모에게 간청을 했다.

“주모, 내가 허기가 져서 그러니 닭을 잡을 수 있거든 한 마리만 잡아 와요. 닭 값은 넉넉히 줄 테니.”
“돈이 문제가 아니고 내 손으로 키운 닭을 내 손으로 잡아먹기가 마음이 괴로워서 그러죠.”
그러자 백수건달이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끼어들며 한마디 한다.

“이봐! 서방이 씨암탉이라도 잡아 오라면 냉큼 잡아 올 일이지, 무슨 핑계가 그리도 많아!”
“아따, 누가 누구의 서방이라는 거야. 내가 언제 서방질 했다고 서방이래!”
“아참.. 이불 속에서 꼭 그 짓을 해야 서방인가? 마음이 서로 통하면 그게 바로 서방이 아닌가? 안 그래요, 삿갓 선생 하하하.”
김삿갓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수도 있지요. 비록 남녀 간에 통정은 안 했더라도 마음이 통하면 애인이라고도 볼 수가 있으니까 말이오.”
“것 봐라, 벽창호 주모야. 이 손님으로 말을 할 것 같으면 손이 크신 어른 아닌가. 닭을 한 마리만 잡아오면 으레 대여섯 마리 값을 치러주실 것인데, 그것을 왜 모르느냐 말야. 술장사를 하려면 사람 보는 눈이 있어야지 원..”
백수건달은 슬쩍 주모를 도와주기 위해 김삿갓에게 바가지를 씌우려는 눈치로 말을 한다.

“어마, 한 마리를 잡아 오면 한 마리 값만 받아야지, 도둑놈 모양으로 어떻게 대여섯 마리 값을 받아요?.. 아무튼 손님이 시장하신 모양이니 한 마리 잡아 올게요. 닭을 잡는 동안 두 분은 술을 천천히 들고 계세요.”
주모가 닭을 잡으려고 바깥으로 나가 버리자, 백수건달은 주모에 관한 이야기를 이렇게 말한다.

- 06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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