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60화

2020. 10. 9. 08:42김삿갓 방랑기


★ 시인 김삿갓 방랑기 060화

[병자호란, 남한산성에서 당한 치욕의 그 날을 생각하며]

그로부터 두어 달 후 김삿갓이 이천 땅을 떠돌아다니다가 광주 땅으로 들어섰을 때는 어느덧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사람이 사는 세상사는 무던히 변덕스럽지만 계절의 변화는 매년 올곧이 돌아온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추위를 느꼈건만 입춘이 지나고 보니 조금만 멀리 걸어도 등골에 땀이 날 지경이었다.

봄볕에 한결 넉넉해진 김삿갓은 문득 시 한 수를 읊조려 본다.

年年年去 無窮去(연년연거 무궁거)
日日日來 不盡來(일일일래 부진래)
年去日來 來又去(연거일래 내우거)
天時人事 此中催(천시인사 차중최)

(해설)
해마다 해는 가도 가도 끝없이 가고
날은 날이 날마다 끝없이 오고 있네.
해는 가고 날은 와 오감은 끝이 없는데,
우주의 모든 일이 그 속에서 이루어지네.

사람의 일생이란 하루하루가 쌓이고 쌓여 해가 바뀌고, 그런 해가 쌓이고 쌓여 인생이 모두 지나간다.
어느 덧 돌아보면 아무것도 뜻대로 된 것 없는데, 무정한 세월 탓만을 하는 것은 아닌지?

萬事皆有定(만사개유정)
浮生空自忙(부생공자망)

(해설)
세상사 모든 일이 정해진 순서대로 흘러가건만,
사람이 제 혼자 바쁘게 돌아간다.

김삿갓은 모처럼의 봄볕을 맘껏 받으며 무심히 길을 걸었다.
그러다 보니 남한강이 가까워진 것 같은데, 삼전도에 이르러 문득 눈에 띄는 비석이 있었으니 비문에 새겨진 글은 ‘대청황제 공덕비(大淸皇帝 功德碑)’였다.

김삿갓은 그 비석을 보는 순간 병자호란의 치욕이 머리에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진땀이 솟아났다.
이 비석은 병자년 호란 때 청태종 홍타이지(皇太極)가 남한산성에 은거하던 인조대왕에게 항복을 받은 후 우리로 하여금 강제로 세우게 했던 치욕의 비석이었기 때문이다.

김삿갓은 남한산성 위에 올라 병자호란 치욕의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
1627년 만주(滿州)의 여진족 추장인 누루하치가 후금(後金)이라는 나라를 새로 세운 후 우리 조선에 국교수립을 강요해 왔다.

그러나 당시 조선은 전통적으로 명나라와의 국교가 두터웠던 관계로 누루하치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었다. 명나라는 불과 35년 전(1592년), 조선 땅에서 벌어진 왜적의 침입(임진왜란)을 함께 막아낸 조명(朝明) 연합의 은혜를 베푼 나라가 아니었던가?

조선의 국교수립 불가에 앙심을 품어오던 후금 태조 누루하치가 죽은 후 황위를 이어받은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가 인조 14년(1636년) 저들의 국호를 청(淸)으로 고침과 동시에 십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그해가 마침 병자년(丙子年)이었고, 우리는 이후로 이 전쟁을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 부르게 되었다.

청태종 홍타이지가 십만 대군을 몸소 이끌고 심양[봉천(奉天)]을 떠난 것은 그해 12월 12일이었고, 그로부터 여드레 후에는 압록강을 건너오고 있었다.
당시 의주(義州) 부윤 임경업 장군은 백마산성을 굳게 잠그고, 적의 공격에 완강하게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자 청군은 일부의 병력으로 백마산성 공격을 계속하며, 주력 부대는 한양으로, 한양으로 진격을 계속하였다.

파죽지세로 진군해 오는 청군으로 위협을 느낀 조정에서는 척화론과 화친론이 분분한 가운데 전쟁에서의 대책과 지원을 세우지도 못하고, 급기야 임금이 몸을 피하는 천도를 계획하게 되었다.
한양 인근에 강화도는 조수의 간만차가 크고, 내륙과 물살이 매우 빠른 큰 고랑으로 이어져 있는 데다 큰 농토와 풍부한 수량(水量)을 품은 곳이다.
따라서 위급한 국가적 재난을 맞았을 때 제일 먼저 천도의 장소로 꼽는 곳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청군은 한양을 공격하기에 앞서 인조대왕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강화도를 먼저 점령하여 버렸다.
결국 한양의 방어가 무너지자 임금은 장안의 백성을 고스란히 버려둔 채 그해 섣달 하순에 엄동설한을 무릅쓰고 대신과 군사 만여 명만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적은 이 사실을 알아내고 남한산성을 이중삼중으로 에워싸 외부와의 연락을 완전히 차단함과 동시에 사방으로 총공격을 퍼부었다.
이때 남한산성에는 많지 않은 군량과 적은 식수(食水) 밖에 없었으니 불과 두 달을 버티지 못하고 인조대왕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전쟁을 시작한 지 꼬박 1년 만인 정축년 1월 30일에 인조대왕은 특사를 보내 화친을 제의하였다. 말이 화친이었지 실질적으로는 항복을 하겠다는 뜻이었다.

※ 여기서 잠깐! 병자호란은 병자년(1636년) 12월 1일 청태종이 12만 군사를 심양에 모아놓고, 조선에 쳐들어와 다음 해인 정축년(1637년) 1월 30일 인조의 항복으로 끝났으니 실제 두 달 만에 끝난 전쟁이다. 위에서 김삿갓이 꼬박 1년만이라고 표현한 것은 단지 병자년에서 정축년까지를 착각하여 그렇게 말한 것 같다.
이에 승전의 기분이 도도한 청태종이 아래와 같은 무리한 요구를 해왔다.

첫째, 항복을 하는 데 앞서 남한산성 남문 밖 삼전도에 수항단(受降壇)을 쌓고, 청태종이 항복을 받을 때 올라앉을 옥좌를 마련할 것.
둘째, 청태종이 수항단에 앉은 후 인조는 왕세자와 함께 성안에서 수항단까지 홀몸으로 걸어 나와 땅에 엎드려 세 번 큰절을 올릴 것.
셋째, 두 나라는 그 자리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하되, 조선국은 청나라가 요구하는 모든 조항을 무조건 받아들일 것.
넷째, 청태종에게 항복을 올린 역사적 장소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수항단을 쌓았던 삼전도에 ‘대청황제 공덕비’를 새로 세울 것.

그러면서 저들의 요구가 단 한 가지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남한산성을 사흘 안에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엄포도 아울러 밝혔다.
궁지에 몰린 인조대왕은 마침내 청태종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고, 왕세자와 함께 수항단으로 걸어 나와 청태종에게 땅에 엎드려 항복의 절을 올렸으니 그것은 5천 년 역사 이래 처음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처음 겪은 치욕적인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때 강화 조약의 내용 중에서 중요한 몇 가지는
1. 조선의 국왕은 청나라에 대하여 신(臣)의 예(禮)를 행할 것.
2. 조선은 명나라와 국교를 단절함은 물론이고, 이제부터는 청나라 연호(年號)를 쓸 것.
3. 조선은 왕세자와 차자(次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낼 것 등이었다.

이러한 강화조약과는 별개로 더욱 막심한 피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백성들의 피해였다.
오랑캐 군사들이 전국을 휩쓸고 돌아다니며, 백성들의 재산을 닥치는 대로 약탈해 갔을 뿐 아니라 무고한 백성 5만여 명을 포로로 납치해 갔다.
그렇게 납치해간 사람 중 남자는 종[(노예(奴隸)]으로 부려 먹었고, 젊은 여자는 노리개로 삼았다.

전쟁이 모두 끝난 후 납치해 간 우리 백성을 돌려 달라는 요구에 청나라 되놈들은 신분의 차별을 두어 일반 백성은 100냥에서부터 부녀자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1,500냥까지의 보상금을 요구했다.
5만여 명이나 되는 포로의 보상금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가족을 데려오기 위하여 어떤 사람은 가진 것 모두를 내다 팔았고, 조선의 경기는 전쟁의 피해와 함께 형편없이 피폐해졌다.

그러나 전쟁의 여파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병자호란으로 인해 이전에는 없었던 ‘환향녀(還鄕女)’라는 새로운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간 사람 중에 환속금을 지불하고 돌아온 여자들을 특별히 환향녀로 불렀다.
환향녀란 글자 그대로 청나라 군사에게 끌려갔다가 고향에 돌아온 여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청나라 군사에게 끌려갔던 여자들이 깨끗한 몸으로 돌아왔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니 환향녀라는 말 가운데는 정조를 되놈에게 잃은 여자라는 뜻이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었다.
이후로 세월이 지나면서 환향녀는 잊어져 갔지만 말의 씨앗은 계속 남아 오늘날 외방 남자와 정을 통한 여자를 ‘화냥년’이라고 부르는 어원은 병자호란 이후 환속금을 내고 풀려 돌아온 환향녀에서 비롯된 말인 것이다.

※ 註 : 지나는 길에, 병자호란 후의 환향녀나 일제 강점기 이후 정신대 할머니나 우리의 방비가 제대로 되지 않아 나라를 어지럽힌 임금과 정치가들의 실정이 원인일 텐데, 이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억울하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희생자에게 돌을 던지는 이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아직도 이 땅의 정치가들은 나라를 위하고 국민을 위하는 정치를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안타까움의 연속이다.

불가피하다면 전쟁을 해야 한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단 시간 내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결집하여 승리하여야 한다.
아니 그것보다는 지나온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고 만전의 사전 준비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有備無患(유비무환)이다.

우리 조선이 1592년 임진왜란과 1597년에 벌어진 정유재란의 원인을 살펴 방비를 갖추었다면 불과 39년 후 벌어진 1636년 병자년 호란 때 밀려오는 되놈들을 격퇴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 註 : 여기서 한 가지 더.
사실 왜란 이후에 외적이 침입한 것은 병자호란이 처음이 아니다. 1627년(정묘년)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이 이미 침입한 사례가 있었다. 이 전쟁을 정묘호란이라고 했는데, 정묘호란 이후 조선과 맺은 화약(和約)을 무시하고, 후금이 부당한 요구를 계속하자 조선이 불만을 품고 후금과의 전쟁도 불사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를 알게 된 청태종이 병자년에 재침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 정유재란 이후 39년이 아니라 30년 만에 외적의 침입이 있었던 것이다.

안타까운 가슴을 안고 치욕의 현장인 남한산성을 내려오는 김삿갓의 발걸음은 모래자루를 매단 듯 한량없이 무거웠다.

- 06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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