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유묵(安重根 義士 遺墨
2025. 9. 10. 17:36ㆍ자유게시방
▼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자오린공원
(黑龙江省 蛤尔滨市 兆麟公园)
안에 있는 연못 ‘靑草塘’ 의 기념물
안중근 의사 유묵
(安重根 義士 遺墨)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한 뒤
여순감옥(旅順監獄)에서
1910년 3월 26일
사망하기 전까지
옥중에서 휘호(揮毫:
붓으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한 유묵을
일괄 지정한 것이다.
1910년 2월과 3월에 쓴 것으로
글씨 좌측에
'경술 이(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안중근서
(庚戌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安重根書)'라고 쓴 뒤
손바닥으로 장인(掌印)을 찍었다.
글씨 내용은
「논어(論語)」,「사기(史記)」 구절 등
교훈적인 것이 많으며,
자신의 심중을 나타낸 것,
세상의 변함을 지적한 것,
일본에 경계하는 것,
이밖에 어떤 사람의 당호(堂號)를
써준 것 등이다.
유묵 대부분은
당시 검찰관, 간수 등
일본인에게 써준 것들이다.
그중 제569-21호는
러일전쟁 때 종군했다가
전쟁이 끝난 뒤
여순감옥에서 근무했던 사람
절전독(折田督)이 받은 것으로,
8.15 광복으로
그의 가족들이
일본으로 귀국할 때
조카 절전간이(折田幹二)에게
넘겨주었고,
그것이 1989년 2월 20일
단국대학교에 기증되었다.
또 569-25호는
안 의사 수감 당시
여순감옥에서 경관을 지냈던 이의
손자 팔목정징(八木正澄)이
2002년 10월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
기증한 것이다.
또 제569-22, 23호는
앞쪽에 '야스오까
검찰관에게 증여한다
(贈安岡檢察官)'라고 적었듯이
당시 관련했던 검찰관에게
써준 것이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옥중에서
순국하기 직전인
1910년 3월 26일까지
200여 점의 신품과 같은
유묵을 남겼는데
현재 이들 유묵 중
알려진 것은 62점이고,
국가 보물로 지정된 것은
최근에 5점을 포함하여
31점이라고 한다.
개인 통산
최다 보물지정 기록이다.
이러한 안중근 의사의 유묵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고
생동감이 넘치며
유묵의 내용 모두가
나라 사랑하는 마음과
평화를 갈구하는 뜻이
담겨 있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고
3월 26일
형이 집행될 때까지
약 40일간
일본인에게
많은 작품을 써줬다고 알려졌으며,
내용 역시 중복된 것이 없다.
대부분 동양 고전을 바탕으로 삼은
교훈적인 내용과
동양의 평화를 방해하는
현실 고발이나 경계를 담고 있다.
특히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하기 직전인
1910년 3월에 남긴 유묵
(遺墨: 생전에 쓴 글씨) 5점이
최근 한꺼번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 되었다.
이로써 보물로 지정된
안중근 의사 유묵은
모두 31점으로 늘었다.
그 중 안중근의사숭모회가
8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는 평생을 서예가로 살았고
한국사에서 명필로 평가 받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12점,
석봉 한호의 글씨가
4점인 것에 비추어
압도적으로 많은 수량이다.
↑왼손 약지가 잘린 손을 보이고 있는
안중근 의사(安重根義士)
↑안중근 의사 어머니 조 마리아 모습
(1862∼1927)
아들의 사형선고 소식에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짧고 단호한 편지를
아들에게 보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 생각 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대의를 위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안중근 의사 가족사진
↑안중근 의사 순국 15분전 모습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기 전
안중근 의사의 두 동생
정근, 공근과
홍석구 신부
(프랑스 이름 조셉 빌렘,
Nicolas Joseph Marie Willhelm)에게
전하는 마지막 유언 장면이다.
↑안중근 의사 순국 5분전
어머니가 지은
하얀 수의를 입고 찍은 모습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1879년 7월 16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31세의 나이로
1910년 3월 26일
여순 감옥에서
사형으로 생을 마감하신
우리의 자랑스러운 영웅이자
애국자이자,
당시 대한독립군 중장의 신분
이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
아침 9시 도착,
러시아의 재무상과
회담 예정의 날 아침에,
불과 5m의 거리에서
7발의 권총사격으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암살했다.
그가 6차례의 재판을 받는 중에,
왜 그를 암살했나는 질문에
15가지의 이유를
명쾌히 설명,
당시 검찰관이나
형무소 헌병도
그를 존경하게 만들었던 사실이
동영상에 여실히 나온다.
동양평화론은,
그 당시 아무도 생각지 못한
명쾌한 새로운 세계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한중일 3개국이
경제통합하고,
통화도 단일 통화를 채택하면
더욱 번성한다고 역설하기도 했다.
동영상의 하부에서는
일본의 학자도,
1910년 8월 22일의
한일합방은 지나친 것이었다고
시인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간 것은,
한일합방과 만주 이권을
러시아와 담판하기
위해서였다고 밝히고 있다.
1. 보물 제569-1호
백인당중 유태화
(百忍堂中 有泰和)
백 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이 있다.
중국 당 고종이
운주 장공예(張公藝)의 집 당호(堂號)로,
9대가 한 집에 화목하게 산 것을
칭찬하며 지어 준 글이다.
2. 보물 제569-2호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
3. 보물 제569-3호
년년세세화상사
(年年歲歲花相似)
세세년년인부동
(歲歲年年人不同)
해마다 계절 따라 같은 꽃이 피건만
해마다 만나는 사람들은 같지 않네.
4. 보물 제569-4호
치악의악식자 부족여의
(恥惡衣惡食者 不足與議)
궂은 옷, 궂은 밥을 부끄러워하는 자는
더불어 의논할 수 없다.
『논어』 이인(里仁) 편에서 인용
5. 보물 제569-5호
동양대세사묘현
유지남아기안면
화국미성유강개
정략불개진가련
(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 慷慨
政略不改眞可憐)
(동양 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둡거니
뜻있는 사나이 편한 잠을 어이 자리
평화 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슬픈지고
정략(침략전쟁)을 고치지 않으니 참 가엾도다.
6. 보물 제569-6호
견리사의 견위수명
(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논어』 헌문(憲問) 편에서 인용
7. 보물 제569-7호
용공난용 연포기재
(庸工難用 連抱奇材)
서투른 목수는
아름드리 큰 재목을 쓰기 어렵다.
『통감(通鑑)』에
자사(子思)가 위왕(魏王)에게 말한
내용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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