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妓生) 소백주(小柏舟) - 36회
2025. 4. 28. 08:16ㆍ수호지
기생(妓生) 소백주(小柏舟) - 36회
제36회 꽃과 바람
그것은 기생 소백주에 대한 상호 평등한 인간으로서 최대한의 존중과 예우가 우선된 마음의 자세였다.
평생 글공부만 해온 선비가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고, 돈으로 벼슬을 사려고까지 했으니 갈 데까지 간 타락한 인생임을 김 선비 스스로도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한탄했다고 한다면, 소백주에게 한잔 술을 얻어 마시고, 그 술값으로 글을 쓰는 행위는 최초로 그 글에 대한 값을 매김하는 숭고한 행위라는 것을 김 선비 스스로가 문득 깊이 자각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결코 기생이니 뭐니 하는 대상을 따지지도 말 것이며, 또 결과에도 연연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 했다.
김 선비는 심란한 마음을 가다듬고 쓱쓱 한지를 메워가기 시작했다.
마음에서 용틀임하는 감정을 붓끝에 담아 거침없이 휘갈겨 써 내리는 것이었다.
봄날 새싹이 눈을 비비듯, 여름날 홍수가 장대비로 쏟아지듯, 가을날 찬바람이 살을 에듯, 겨울날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듯, 붓끝은 때론 빨랐다가 또 때론 멈추었다가 그 마음속에 떠오르는 산과 강과 하늘과 바람과 물상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이윽고 김 선비는 붓을 쓱 거두었다.
그런 다음 일하는 아낙을 불렀다.
“여봐라! 술값 여기 있느니라!”
“예에! 나리!”
집안에서 일을 하는 아낙이 달려와 김 선비가 주는 글을 받아 들고 소백주에게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물끄러미 문틈으로 사내의 꼴을 바라보고 있던 소백주는 하인이 가져오는 글을 떨리는 손으로 받아들었다.
여느 때 같잖게 떨리는 마음으로 소백주는 김 선비가 쓴 글을 손에 들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멋들어지게 휘갈겨 쓴 글씨의 모양새가 물 흐르듯 유연했다.
어려서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여 수십 년간 갈고 닦아온 유려한 솜씨였다.
하긴 그런 유려한 글솜씨를 보인 사내가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그러기에 인간의 인연(因緣)은 까닭 없이 홀연 오는 것이고, 또 마음속에 좋고 싫음이 생겨나는 것 또한 제각각이라서 그것은 그야말로 제 마음 내키면 그만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뉘라서 저 소백주의 마음 내키는 뿌리를 알랴!
소백주의 마음 내키는 까닭을 알기만 한다면 그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지어 그 마음에 들면 그만일 것이었지만 그것은 어쩌면 소백주 자신도 모르는 일인지도 몰랐다.
그렇듯 인연은 봄날 꽃잎에 바람 휘돌아가는 숱한 사연만큼이나 속절없는 것이었기에 그 깊이를 헤아릴 길 없었다.
그런 알 수 없는 사람의 만남과 헤어짐을 사람들은 인연이라고 했고, 또 그것을 운명이라고 했던 것이다.
과연 김 선비와 소백주는 그런 인간으로서의 진한 인연의 사슬이 어쩌면 둘 사이에 운명처럼 짙게 드리워진 것이었을까?
- 37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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