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천의 추억

2020. 3. 12. 00:38자유게시방



 (..맑은 하천엔 철새와 붕어가 놀고 아이들의 놀이터가 된 중랑천 풍경..)




중랑천의 추억



언젠가 큰물이 져서

중랑천이 넘칠 뻔 했다


그 때 비가 좀 더 왔더라면

이문동 석관동 일대가 물바다

청량리까지 물에 잠길 뻔 했지


당시 신혼방을

이문동 외대앞 단독주택에

처 할머님이 손녀 키워주며

오손도손 살던 시절이었다


당시 우리집까지 물이 들어

지하실이 물에 잠겨 수해민


북한이 남한 수재민 돕겠다며

쌀 5만섬을 지원하겠다 했는데

남한 정부에서 덜컥 받겠다 해

공언한 북한 도리없이 약속지켜

우리가 처음 북한쌀 받아 먹었지


남북관곈 아직도 깊은 첩첩산중

평화통일의 길은 멀어져 가지만

자연이 살아 숨쉬는 맑은 중량천은

철새랑 잉어랑 아이들의 지상천국 


2020년 3월 11일

'어제는 종일 봄비가 오더니

오늘은 하늘이 더 없이 맑고

푸른 수요일 아침'

푸른 돌(靑石)




  


  

        
1.어제는 종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봄비가 추줄하게 내리며 기분이 우울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고 푸른
하늘이 가을 하늘 같다. 봄비에 미세먼지도 다 씻기고 날아 갔는지 가까운 남한산성이 똘망똘망 눈뜨고 훤해 기분이 좋다. 하루
사이 맑았다 흐렸다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도 이런게 아닐까 싶다. 이전 신혼 살림을 이문동 외대 앞 동네다 전세방을 얻었다.
시청 공무원인 집사람이 주경야독으로 야간대학을 다녔기 때문이다. 이듬해 딸이 태어나 맞벌이를 해야 하니 처 할머님을 같이
모시고 살았다. 어느 해 여름 아이가 세살 때 큰 홍수가 났는데 전국이 엄청난 물난리로 비상사태가 걸렸다..=>
                          
 
        
2.생방송으로 전국의 위험 지구를 계속 알리며 위기시 주민들을 대피시키고 협조를 구하고 있었다. 중랑천도 위험하니 주변
주민들은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비상 대기하라면서 집집마다 모래나 흙을 한 포대씩 중랑천 범람 대책반에 갖다 달라 하였다.
집안에 있는 작은 모래 포대 하나를 들고 아이와 함께 중랑천을 올라갔다. 비는 그쳤지만 시커먼 먹구름이 마왕처럼 하늘을
휘저으며 달렸다. 늦은 밤 시간이었지만 주민들이 꾸역꾸역 흙포대를 나르고 있었다. 뚝이 약하거나 넘칠 것 같은 곳을 공무원들이
계속 흙포대로 막았다. 그 중랑천 뚝방이 아마 몇 십리는 될텐데 모든 주민이 총 동원되어 그렇게 위기를 극복하고 있었다..=>
                          
 
 
   
3.다행히 그 시간 이후로 더 이상 비가 오지않아 가까스로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흔히 불보다 물이 더 무섭다 한다. 불은 타도
흔적이 남지만 물은 흔적 없이 터까지 다 쓸어가니 더 무섭다는 것이다. 그 날 물이 무섭다는 말을 실감했다. 하늘엔 시커먼 먹구름이
휙휙 몰려가고 중랑천 그 넓은 하천은 흙탕물이 뚝방을 넘실대며 벼라별 크고 작은 물체들이 무서운 속도로 떠내려 갔다. 간혹 돼지나
닭도 보였고 작은 집채도 보였으며 형체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이 수없이 떠내려 가니 이런 생지옥이 없다. 주민들의 합심으로 중랑천
범람의 위기를 넘겼다. TV도 없던 시절이라 밤새워 라디오에 귀 기울이며 거의 하룻밤을 꼬박 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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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이제 오래 되어 역사가 돼버린 지난 이야기다. 당시 홍수로 인한 피해가 북한도 남한 못지 않았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북한이 체제
우위와 자기네들이 남한보다 잘 산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기면 먼저 지원해 주겠다 했다. 그러나 쌍방이 그런
제의를 받아들이면 지거나 굴복한다 생각하고 피차 정치적인 공세라며 받아 들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해는 5공화국 시절로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을 앞둔 싯점이라 남북 화해와 평화가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다. 그래서 정부 당국이 바로 대책회의를 열었다. 결국 북한
제의를 받아들이자 결론짓고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수재민 지원을 발표한 북한의 허를 찔렀다..=>
                          
 
 
                      
5.남한에서 으례 안 받을거라 보고 정치적 공세와 체제 과시용으로 발표했던 것이다. 북한이 쌀 5만톤과 옷감 50만미터, 시멘트10만톤,
기타 의약품을 지원하겠다며 구체적인 품목과 수량까지 알렸던 것이다. 사실 그 당시 한국이 입은 수해는 엄청났으며 1904년 기상청이
생긴 이래 하루 최대 강우량이었다. 전국적으로 사망 실종이 189명, 이재민이 35만 1,000명, 부상 153명에 피해액은 1,333억 원에 달하여
그야말로 강력하고 혹독한 홍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국력은 이미 남한이 앞섰고 북한의 도움까지 받지 않아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다만 정치적인 고려로 북한 제의를 받아 들였다. 그런데 문제는 북한에서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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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당시 북한 사정으로는 준비 없이 덜컥 발표한 지원안이 감당하기 어려운 대규모였던 것이다. 국가적 체면상 뒤집기도 어려워 한 때
북한은 혼란에 빠졌다. 아무튼 예기치 못한 제의로 남북한이 온갖 대화가 이뤄졌고 북한은 중국의 도움으로 약속한 수해 지원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 때 우리집도 수재민으로 신고 되어 북한 쌀 한 포대와 모포 하나를 받았다. 최근에 잘 풀려 갈 것 같던 남북관계가 다시
꼬여 안타깝다. 다시 잘 진전돼 중국인도 평생 소원이라는 금강산 관광이라도 텄으면 좋겠다. 중랑천이 잘 개발돼 시민 공원이 되었고
해마다 장미 축제도 열린다. 수많은 철새가 찾아오고 붕어와 잉어떼들이 헤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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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이전 산업개발시대에 청계천이나 중량천 변은 오염과 공해의 대명사였다. 여름엔 홍수로 개천이 자주 범람하였고 건기엔 쓰레기로 넘치며
악취가 진동하였다. 시골서 올라와 집없는 분들이 너도 나도 집 짓고 살던 곳이 청계천 판자촌이었다. 청계천이나 중랑천이 지금은 자연을
회복하여 많은 시민들이 즐겨찾는 공원이요 휴식처가 되었다. 이전엔 살고싶은 곳이 교통 좋은 역세권이었다. 지금은 건강이 우선인 시대라
강변이나 숲이 울창한 공원을 더 선호해 숲세권이나 수세권이 각광받는다. 중랑천 끝 자락인 응봉동 산동네가 봄이면 개나리 동산이 된다.
옛날에 판자촌인 친구 누님집을 찾아 헤맸던 아련한 추억에 젖는다..^*^

푸른돌 님의글 옴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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