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84화
2021. 5. 27. 07:12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84화
☞ 한신, 신궁(神弓) 신기(辛奇)를 만나다.
‘그렇다면 관문 병사들이 추격해 올 것이 분명한데, 만약 나무꾼이 그들에게 나의 행방을 알려주면 내 신세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한신은 그러한 생각이 들자 얼른 뒤로 돌아가 나무꾼을 한칼에 베어 죽여 버렸다. 마음은 괴로웠지만 그것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신은 괴로운 마음으로 나무꾼을 고이 묻어 주었다.
그리고 그의 명복을 빌며 안타까운 말을 하였다.
“오늘은 기구한 만남으로 내가 죄를 지었으니 부디 헤아려 주소서. 후일 그대를 후히 장사지내 드리리다. 저승에서는 안락하게 지내소서...”
이렇게 하고 아미령 고개를 넘어오니 과연 나무꾼의 말대로 산 밑에는 술집이 한 채 있었다.
한신은 그 집에 여장을 풀고,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자 인상이 우악스럽게 생긴 장사 하나가 허락도 없이 한신 앞에 덥석 마주 앉더니,
“나는 이 집 주인이오. 당신은 항우를 배반하고 유방을 찾아가는 길에 나무꾼은 왜 죽였소?”
하고 시비를 걸고 나오는 것이었다.
한신은 가슴이 철렁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아무 죄도 없는 나무꾼을 죽인 것이 양심에 무척 괴롭던 형편이었다. 그러기에 지금이나마 속죄하는 뜻에서 모든 것을 사실대로 고백할 요량으로
“내가 나무꾼을 죽인 것은 커다란 죄를 범한 셈이오. 주인장은 그 사실을 어떻게 아셨소?”
주인은 술을 한잔 들이켜고 나더니 웃으면서 대답한다.
“당신이 죽인 나무꾼은 바로 나와 호형호제하는 이웃의 동생이오. 내가 만약 당신을 붙잡아 항우에게 넘겨주면, 나는 항우에게서 큰 상(賞)을 받을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나는 돈이 탐나서 고자질이나 하는 어리석은 인간은 아니니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시오.”
한신은 주인의 말에 안도의 숨을 쉬었다.
“생면부지의 나를 이처럼 관대하게 대해주시니 고맙소이다. 그런데 보아하니 주인장은 이런 산중에서 술장사나 하실 분은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연유로 이런 산중에 사시오?”
주인은 허허허 너털웃음을 웃고 나더니,
“형공이 그렇게 물어보시니 우리 가문의 내력을 말씀하지요. 나는 주(周)나라 때의 충신이셨던 신뢰(辛雷) 장군의 후예(後裔)요. 내 이름은 신기(辛奇)라고 하는데, 선친인 신금(辛金) 어른께서 진시황 때 그의 학정을 싫어하여 이 산중으로 피신을 오셨던 관계로 나도 오늘날 여기서 이렇게 술이나 팔아먹고 산다오.”
한신은 신기가 명문가의 후예임을 알고 나자, 새삼스레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처럼 유서 깊은 가문의 후예라면, 어찌하여 이런 산중에서 술이나 팔고 계시느냐 말이오?”
그러자 신기는 정색을 하고 대답한다.
“형공이 그렇게 물어보시니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소. 나는 호구지책으로 술을 팔고 있기도 하지만, 지금도 밤낮으로 무예를 연마하면서 명주(明主)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오. 그런데 어젯밤에 희한한 꿈을 꾸고 나서 오늘은 형공을 만나게 되었으니 내 마음이 매우 기쁘오.”
“어젯밤에 어떤 꿈을 꾸셨기에 그러시오?”
“어젯밤 꿈에 아미령 고개 너머로부터 난데없는 호랑이 한 마리가 마치 날아오는 듯이 달려 넘어오더란 말이오. 그래서 오늘은 대단한 손님이 오시려는가 싶어 나는 아침부터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대단한 손님이 나타나기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나같이 변변치 못한 인물이 나타나서 미안합니다.”
그러자 신기는 손을 절레절레 내저으며,
“형공이 누구신지는 모르나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되실 것만은 틀림이 없소.”
하고 장담하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사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다.’더니 한신은 신기의 말에 감격을 금할 길이 없었다.
피차간에 대화가 솔직하다 보니 한신은 자신의 정체를 솔직하게 말해 주고 나서,
“항우는 사람을 몰라보는 우장(愚將)이었소. 그러나 한왕 유방은 지인지감(知人之鑑)하고, 성품 또한 관인대도(寬仁大度)한 명주(明主)라고 하오. 그러니까 형공도 나와 함께 한왕을 찾아가 공명(功名)을 천하에 떨쳐봅시다. 형공 같은 분이 어찌 이런 산속에서 썩어 날 것이오?.”
하고 설득하였다.
“............”
신기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지금은 이곳을 떠날 형편이 안 되오이다. 그런데 내가 살펴보니 장군은 한왕을 찾아가면, 중용(重用)하실 것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만약 후일에 장군이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치게 되시거든 반드시 이 길로 오시도록 하시오. 초나라를 치는 데는 이 길이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이 길은 아무에게도 알려져 있지 않은 지름길이기도 하지요.”
한신은 그 말을 듣고, 신기의 손을 힘차게 움켜잡았다.
“좋은 것을 알려 주어 고맙소이다. 내가 만약 후일에 초나라를 치게 되면, 이 길로 올 테니 그때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주시오. 형공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소.”
이날 밤 한신은 신기와 함께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또한, 신기의 대접이 너무도 융숭한데 감격하여 마침내 두 사람은 결의형제(結義兄弟)까지 맺게 되었다.
다음 날 아침 한신이 길을 떠나려 하자, 신기는 등에 활과 화살을 메고 따라 나서면서 말한다.
“저기 보이는 저 산을 양각산(兩脚山)이라고 합니다. 길이 험할 뿐만 아니라 숲속에는 호랑이가 득실거려서 장군께서 혼자 가시다가는 반드시 호환(虎患)을 당하시게 됩니다. 고개 너머까지는 제가 모시고 가겠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고개를 넘어가고 있노라니 호랑이들이 여기저기 득실거렸으나 호랑이들은 웬일인지 신기를 보기만 하면 슬금슬금 도망을 가는 것이 아닌가!
“호랑이들이 형공을 보기만 하면 꽁무니를 빼고 도망을 치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오?”
신기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제가 워낙 이놈들을 많이 쏘아 잡았기 때문에 호랑이는 역시 영물(靈物)인지라, 저만 보면 도망을 쳐 버린답니다.”
바로 그때 우거진 숲속에서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 두 사람을 향하여 벼락같이 달려드는 것이었다.
호랑이가 이렇듯 질풍같이 덤벼 오는 순간 한신은 본능적으로 말에서 뛰어내려 눈을 질끈 감은 채 풀밭에 납작 엎드려 버렸다.
평소에는 용장(勇將)으로 자부해 오던 한신도 질풍처럼 습격해 오는 호랑이만은 당해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기는 이처럼 위급한 순간에도 무슨 재주를 어떻게 부리는지 별안간 허공중에,
“쌔액! 쌔액!”
하는 날카로운 화살소리가 연거푸 들려오더니 커다란 호랑이가 ‘크어엉!’하고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나가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한신이 그제야 눈을 떠 보니 호랑이는 땅바닥에 나가떨어져 네 다리를 버둥거리며 죽어가는 것이 아닌가!
한신은 너무도 놀라워 벌떡 일어나 호랑이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아니, 어느 순간에 무슨 재주로 호랑이를 이렇게...”
한신이 죽어가는 호랑이를 살펴보니 호랑이 이마빼기에는 두 대의 화살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얼마나 힘차게 활을 쏘아 갈겼던지 화살이 너무도 깊이 박혀 있어서 화살의 꼬리만이 겨우 보일 정도였다.
그조차도 얼마나 정확히 쏘았는지 두 대의 화살이 마치 하나로 보일 지경이었다.
“화살을 이렇게도 정확하게...”
한신은 감탄해 마지않다가
“형공은 이광(李廣) 장군보다 더 훌륭한 명궁수(名弓手)이구려!”
하고 말했다.
“이광 장군이오? 이광 장군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이광 장군이라고 얼마 전까지 우북평 태수(右北平 太守)로 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은 궁술로는 천하의 명인이었소. 화살의 힘이 얼마나 셌던지 호랑이를 쏜다는 것이 그만 바위를 쏘아 화살이 바위 속에 깊이 박혔다는 일화도 있다오.”
“하하하, 화살이 바위에 박혔다고요?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이구말구요. 내가 왜 형공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겠소?”
“그거 참 흥미로운 얘기로군요. 기왕이면 그 얘기를 좀 더 자세히 들려주시죠.”
“형공이 원하시니 들려 드리죠.”
그리고 한신은 이광 장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광은 대대로 내려오는 궁술(弓術)로 유명한 가문의 태생이었다. 이광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숲속에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보고 화살을 쏘아 맞혔다.
그런데 정작 가까이 가보니 호랑이라고 보았던 것은 호랑이가 아니고 바위였는데, 화살은 그 바위에 깊숙이 박혀 있었던 것이다.
이광 자신도 놀라워 바위를 향해 화살을 다시 쏘아 보았지만, 그때에는 아무리 쏘아도 화살이 바위에 박히지는 않았다.
신기는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화살을 쏘게 되면, 바위도 뚫을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실상은 이 호랑이가 나에게 원수를 갚으려고 덤벼왔기 때문에 저 역시 생사를 걸고 쏘아 명중시킬 수가 있었습니다.”
한신은 ‘호랑이가 원수를 갚으려고 덤벼 왔다.’는 소리를 듣고 놀라며 물었다.
“호랑이가 원수를 갚으러 오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장군께서 이미 보셨지만, 이 산중에 있는 호랑이들은 저만 보면 슬슬 꽁무니를 빼기가 보통입니다. 그러나 오늘 덤벼온 이 호랑이만은 죽음을 각오하고, 저에게 원수를 갚으러 온 것입니다.”
“원수를 갚으러 오다니, 형공에게 무슨 원수를 갚으러 왔다는 말씀이오?”
“실상인즉, 수일 전에 제가 암호랑이 한 마리를 쏘아 잡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잡고 보니 그놈의 뱃속에는 새끼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저런!”
“새끼 밴 놈을 쏘아 잡아서 안 됐다 싶었지만, 이미 쏘아 죽인 것을 어떡합니까! 죄책감을 느끼기는 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지요.”
“아, 알겠소이다. 그러니까 마누라와 새끼의 원수를 갚으러 온 수놈 호랑이가 바로 이 호랑이였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습니다. 마누라와 새끼의 원수를 갚으려고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온 모양이지만, 제까짓 게 그래 보았자 저를 당할 수가 있나요? 허허허.”
한신은 신기의 초인적인 담력과 궁술에 거듭 감탄하면서,
“형공과 동행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미 저승에 갔을 것이오.”
“장군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늘이 아시는 어른을 호랑이가 감히 해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다시 말을 달려 한계령(寒溪嶺)에 이르자, 신기는 말을 멈추고 한신에게 말한다.
“저기 보이는 곳이 남정관(南鄭關)입니다. 거기서부터는 한나라 땅이니까, 안심하고 가십시오. 저는 여기서 작별을 고하겠습니다.”
한신은 작별이 아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이왕 여기까지 오셨으니 형공도 나와 같이 한왕을 찾아가기로 합시다.”
그러자 신기는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저도 장군과 함께 한왕을 찾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합니다. 그러나 제게는 80 넘은 노모(老母)가 계셔서 집을 떠날 수가 없는 실정입니다.”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못 가겠다는 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사정이 그렇다면 약속이라도 해둡시다. 후일에 내가 초나라로 쳐들어가게 되면, 형공은 나를 찾아와 도와주시오.”
“그런 일이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장군께서 초나라로 쳐들어가신다는 소식만 들려오면, 저는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겠습니다.”
“고맙소. 그러면 그때 다시 만납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굳게 다잡고 다짐을 해두었다.
이렇게 한신은 많은 난관을 지나 드디어 한나라 땅에 들어서게 되었다.
- 제 85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