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83화
2021. 5. 26. 06:40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83화
☞ 한신의 탈출
영포와 오예는 의제를 죽인 뒤 그 사실을 범증에게 알려주기 위해 팽성으로 달려왔다.
범증은 의제가 시해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까무러칠 듯이 놀라며 탄식했다.
“의제는 그 옛날 무신군(武信君, 항우의 숙부인 항량)이 임금님으로 받들어 모셨던 신망이 두터운 어른이었다. 그런 분을 시해했다니 그것은 신도(臣道)에 어긋나는 일이다.
“만약 항왕이 함양을 버리고 팽성으로 천도해 오면, 여러 날이 못되어 유방이 함양으로 진출할 것인데,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다는 말인가? 안되겠다, 내가 어서 침주로 돌아가 함양으로 천도하도록 다시 간언을 올려야만 하겠다.”
그러자 계포가 말한다.
“지난번에 한생(韓生)이 항왕께 함양으로 천도하라는 간언을 올렸다가 팽살(烹殺)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승상께서는 어쩌려고 그런 간언을 올리겠다는 말씀입니까?”
“만약 함양을 버리고 팽성으로 천도했다가는 우리 모두가 유방의 손에 포로가 되는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될 것이오. 그러하니 모두가 힘을 합하여 함양으로 천도하도록 말씀을 드려야 하오. 이것은 우리들 전체의 생사가 걸린 문제요.”
범증은 계포에게 팽성을 지키게 하고, 영포, 오예 등과 함께 침주로 급히 돌아와 보니 항우는 팽성으로 천도하려고 짐을 꾸리고 있었다.
항우는 의제를 죽여 버렸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기뻐하며 말한다.
“아아, 나는 이제야 심복지환(心腹之患)을 제거해 버렸구나!”
그러나 범증은 심각한 얼굴로 말한다.
“대왕 전하! 전하의 심복지환은 의제가 아니옵고 패공 유방이옵니다. 만약 우리가 함양을 비워 둔 채로 팽성으로 천도를 하고 나면, 유방은 몇 달 안에 대군을 거느리고 함양으로 쳐 나오게 될 것입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소리를 내어 크게 웃는다.
“아부는 웬 걱정이 그리도 많으시오. 유방이 그렇게도 무서우시오? 그자는 파촉으로 들어갈 때 잔도(棧道)를 자기 손으로 모조리 불태워 버렸소. 그것은 다시는 함양으로 나오지 않겠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소? 게다가 파촉에서 나오는 길목은 우리의 삼진왕(三秦王)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유방이 날짐승이 아닌 바에야 어찌 함양으로 나올 수가 있단 말이오?”
장량이 일찍이 파촉으로 통하는 잔도를 모조리 불태워 버린 것은 항우의 경계심을 없애려는 술책이었는데, 항우는 그 술책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것이었다.
그러나 범증은 고개를 가로 흔들면서 말한다.
“대왕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크게 잘못된 판단이시옵니다. 대왕께서 팽성으로 옮겨가시면 삼진왕들의 경계도 절로 소홀해질 터이니, 어떻게 그들만을 믿고 안심할 수 있을 것이옵니까?”
항우는 범증의 말을 비웃으면서 다시 말한다.
“유방이 함양으로 다시 나올 야심이 있다면, 어째서 길을 제 손으로 끊어 버렸겠냐는 말이오? 그 한 가지 사실만 보아도 유방은 모든 야심을 포기해 버렸음을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유방은 결코 야심을 포기해 버릴 사람이 아니옵니다. 더구나 그의 휘하에는 장량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옵니다.”
“하하하, 이제 와서는 장량이 아니라 장량의 할애비가 와도 나를 어쩔 수가 없을 것이오. 나는 이미 팽성으로 옮겨 갈 것을 만천하에 공포했으니 빨리 이삿짐이나 쌉시다.”
항우의 결심은 요지부동이었다.
영포가 옆에서 듣다못해
“대왕 전하! 승상께서 이처럼 말씀하시니, 만전을 기하기 위해 팽성보다는 함양으로 천도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한마디 거들고 나왔으나 항우는 즉석에서
“그대가 무얼 안다고 잔소리를 해대나?”
하고 윽박질러 버렸다.
그러자 범증은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한숨을 쉬며, 그 자리를 물러 나오고 말았다.
한편, 한신은 장량과 작별하고 유방을 찾아 떠나려다가 우선 도위(都衛, 수도경비사령관) 진평(陳平)의 집에 들러 보았다.
진평은 평소부터 유방에게 호의를 품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신은 진평의 마음을 떠보려고 우선 이렇게 물어보았다.
“항왕이 함양을 비워 두고 팽성으로 천도하고 나면, 한왕 유방이 반드시 함양으로 쳐 나올 것 같은데, 장군은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진평은 오랫동안 심사숙고를 하더니, 한숨을 쉬면서 대답한다.
“항왕은 팽성으로 천도하고 싶어서 의제를 죽이기까지 하였소. 게다가 간의대부(諫議大夫) 한생이 천도를 반대한다고 그를 팽살해 버렸소. 그래서 민심을 어떻게 이끌어 나가려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길이 없구려. 그에 비하면 한왕 유방은 덕이 많은데다가 포부도 웅대한 사람이어서 후일 대성할 사람은 반드시 유방일 것이오. 그러니 한 공은 여기서 썩지 말고, 한왕 유방을 찾아가 포부를 마음껏 펴보도록 하시오.”
한신은 그 말을 듣고 용기가 솟아올라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밝혔다.
“실상인즉, 저는 지금 파촉으로 한왕을 찾아가려고 떠나는 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파촉으로 가려면 수많은 관문을 거쳐야 하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관문들을 무사히 통과할 수가 있겠는지 그 일이 걱정스러워 장군을 찾아왔습니다.”
“그 문제라면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모든 관문을 총관(總管)하고 있는 책임자가 바로 내가 아니오. ‘통과패(通過牌)’를 내줄 테니 얼마든지 가지고 가시오.”
그러면서 진평은 즉석에서 ‘관문 통과패’를 내주었다.
관문 통과패는 지나가는 지역의 위수(衛戍) 사령부에서 물과 식량, 그리고 타고 온 말(馬)조차 바꿔 탈 수 있는 효력을 가진 것이었다.
그러한 ‘관문 통과패’를 손에 넣은 한신은 뛸 듯이 기뻤다.
그러기에 진평에게 두 손 모아 감사하며 말했다.
“이것으로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후일에 제가 대성하게 되면 오늘에 장군의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진평도 한신의 손을 뜻있게 움켜잡으며 말한다.
“한왕을 뵙거든 부디 충성을 다해 성공하도록 하시오. 나도 언젠가는 한왕을 찾아가게 될지 모르오.”
한신은 진평과 작별하고, 그 길로 파촉을 향하여 말을 달렸다.
그런데 범증은 평소에도 유방을 경계하느라고 관문을 철저하게 지키라는 엄명을 내려 두었기 때문에 비록 통과패가 있어도 관문을 한가롭게 통과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신이 처음으로 당도한 관문은 안평관(安平關)이었다.
안평관 수문장은 한신과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신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며 묻는다.
“한 장군께서는 무슨 일로 어디를 가시기에 혼자 오셨사옵니까?”
“나는 왕명을 받들고 삼진왕(三秦王)을 만나러 가는 길이오.”
“그러시다면 언제쯤 돌아오실 예정입니까?”
“아무리 늦어도 모레까지는 돌아오게 될 것이오.”
수문장은 그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어서 한신을 그대로 통과시켜 주었다.
그러나 한신은 사흘이 지나 나흘이 되어도 다시 돌아오지 않자, 수문장은 크게 걱정스러워 마침내 범증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긴급 보고를 올렸다.
범증은 그 보고를 받아 보고 대경실색하며 말한다.
“나는 한신이라는 자가 마음에 걸려서 그자를 대장으로 발탁하든가 아니면 죽여 없애자고 했는데, 항왕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있다가 기어코 이런 일이 벌어졌구나. 한신은 유방을 찾아갔음이 분명하니,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자를 도중에 체포해야 한다.”
범증은 모든 관문에 ‘한신 체포령’을 내렸다.
항우는 한신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노한다.
“한신이라는 겁쟁이가 나를 배반하다니, 이럴 수가 있는가!”
범증은 겁쟁이라는 말을 듣고, 항우를 나무라듯 말한다.
“한신은 겁쟁이가 아니옵고, 희대(稀代)의 용장(勇將)이옵니다. 한신이 유방을 돕게 되면 우리에게는 다시없는 우환이 될 것이니, 어떤 일이 있어도 그자가 파촉에 가지 못하도록 도중에서 체포해 버려야 합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대장 종이매를 불러 군령을 내린다.
“그대에게 2백 기(驥)를 줄 테니, 한신을 추격하여 그자를 체포하는 동시에 즉석에서 베어 버려라.”
종이매는 2백 기 군사를 거느리고 안평관으로 급히 달려와 수문장에게 자세한 사정을 들어 보았다.
수문장은 사실대로 알리고 나서
“이곳을 통과한 지 이미 닷새가 지났으므로 지금쯤은 국경 가까이 갔을 것이옵니다. 장군께서 직접 추격하시기에는 너무도 늦었으니, 차라리 삼진왕들에게 비각(飛脚)을 보내 그들로 하여금 쫓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도 그럴 성싶어 종이매는 삼진왕들에게 한신을 쫓게 하고, 자기 자신은 침주로 돌아와 항우에게 사실대로 고했다.
항우는 보고를 받고 고개를 끄덕이며 한신을 비웃었다.
“멀리 가버렸다면 그냥 내버려 두오. 남의 사타구니 아래를 기어 나온 겁쟁이가 어디를 간들 무슨 큰일을 해낼 수 있겠소? 파촉으로 가는 길이 모두 끊겨 버렸다니까, 한신은 유방을 찾아가고 싶어도 길이 없어 못 갈 것이오. 그러나 만일을 위해서 여신(呂臣)과 종공(從公) 두 장수로 하여금 함양을 지키게 하고, 우리는 예정대로 팽성으로 옮겨가기로 합시다.”
이렇게 항우는 모든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기어코 도읍을 팽성으로 옮기고야 말았다.
한편, 한신은 안평관을 무사히 통과하고 나서 다음 관문인 대산관(大散關)도 무사히 통과하였다.
그러나 그때부터는 길이 너무도 험악하였다.
그리하여 장량에게서 받은 지도를 펴놓고 간도(間道)를 찾아보고 있었는데, 별안간 저 멀리서부터 십여 명의 군사들이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한신은 아무것도 못 본 척하고 말을 천천히 몰아갔다.
군사들이 가까이 다가오며 소리를 질러 물었다.
“그대는 성명이 무엇인가?”
한신은 말을 멈추며 대답했다.
“나는 이진(李珍)이란 사람이오.”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인가?”
“포중에 친척이 있어서 친척을 만나러 가는 중이오.”
“관문 통과패가 없을 터인데, 무슨 재주로 관문을 통과했는가?”
“통과패가 없다면 관문을 어떻게 통과했겠소. 통과패가 여기 있으니 잘 보시오.”
군사들이 통과패를 돌려 보느라고 방심하는 순간, 한신은 허리에 차고 있던 ‘보검(寶劒)’을 뽑았다.
한신은 보검을 뽑기가 무섭게 십여 명의 병사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모조리 베어 버렸다.
그리고 난 뒤 말을 달려 나가려 하자, 반대편에서 다섯 명의 군사들이 또다시 달려오고 있었다.
한신은 불문곡직하고 그들도 한칼에 베어 버린 뒤에 산속으로 말을 달려 들어갔다.
얼마를 달려가다 보니 길은 끊기고, 눈앞에는 천 길 낭떠러지 절벽이 나타났다.
‘길이 끊겨 버렸으니,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눈앞이 막막하여 망연자실하게 서 있노라니 문득 장량이 일러주던 말이 떠올랐다.
“포중으로 가려면 진창(陳倉)이란 곳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오.”
한신은 장량의 말을 기억하고 진창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어느 방향으로 가야 진창으로 가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잠시 머뭇거리고 있노라니 때마침 나무꾼 하나가 짐을 지고 걸어오고 있었다.
“여보시오. 길 좀 물어봅시다. 진창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오?”
나무꾼은 짐을 내려놓더니 먼 산을 가리키며 대답한다.
“저기 보이는 산을 넘어가면 잔솔밭이 나오고 거기를 지나면 난석탄(亂石灘)이라는 여울이 나오오. 그 여울에 놓여 있는 돌다리를 건너가면 아미령(娥眉嶺)이라는 고개가 보이는데, 그 고개는 길이 워낙 험하여 말을 타지 못하고 걸어서 넘어야 할 것이오.”
“그 고개를 넘어서 얼마나 더 가면 진창이라는 곳이 있소?”
“진창까지는 태백령(太白嶺)이라는 고개를 또 하나 넘어야 하는데, 오늘 중으로 거기까지는 도저히 못 가오. 그러니 도중에서 하룻밤 자고 갈 요량으로 떠나야 하오.”
“도중에 자고 갈 만한 인가(人家)는 있는가요?”
“아미령 고개 밑에 술집이 하나 있소. 그 집에서 자고 가도록 하시오.”
한신이 장량에게서 받은 지도를 살펴보니, 나무꾼의 말에는 조금도 거짓이 없었다.
“길을 잘 알려 주어 고맙소이다.”
한신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막 떠나려 하자, 나무꾼이 묻는다.
“도대체 당신은 어디를 가려고 호랑이가 우글거리는 이 산속을 혼자 가려하오?”
한신은 얼떨결에
“나는 포중으로 한왕을 찾아가는 길이오.”
하고 대답을 해버렸다.
그러고 나서 말을 몰아 나가다가 별안간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는 얼마 전에 군사 열다섯을 죽이고 도망쳐 오던 길이 아니던가!
- 제 84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