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62화

2021. 5. 4. 13:29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62화

☞ 뇌물작전(賂物作戰)

유방은 무관을 점령하고자 총공격을 여러 차례 시도했다.
그러나 성문을 걸어 잠그고 수성에만 집중하는 진군의 수비가 워낙 철통같아서 총공격을 해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영(韓榮)과 경패(耿沛)가 함양에서 10만의 지원군까지 이끌고 오자, 오히려 이쪽이 열세에 몰리게 되는 형국이 되었다.
유방은 장량을 불러 탄식한다.

“무관을 함락하지 못하면 함양으로 갈 수가 없는데, 지금 상태로는 무관을 점령할 수 없어 보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장량은 한참 동안 숙고한 끝에 대답한다.

“적의 세가 워낙 강하여 무력만으로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듯하옵니다.”
“무력으로 안 된다면 어떤 다른 방도가 있겠습니까?”
장량이 조용히 입을 열어 대답한다.

“병법에 ‘지장은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켜 성을 취한다.’는 말이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공격 일변도로 성을 빼앗으려 할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계략으로 성을 점령할 방도를 찾아야 할 것이옵니다.”
유방은 장량의 말을 듣자, 갑자기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는 것만 같았다.

“싸우지 않고 성을 취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소이까? 선생께서는 그 방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소서.”
장량이 대답한다.

“자고로 ‘전쟁은 상대방을 속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적을 속여 승리할 방법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우리의 병력이 막강한 것처럼 속여서 적에게 겁을 주고, 둘째, 적장들을 재물로 회유하여 적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아야 합니다.”
“참으로 신통한 작전입니다. 저들에게 우리 병력이 막강한 것처럼 속이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하겠습니까?”
“우리 병력이 막강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는 산과 들, 동서남북 사방에 수많은 깃발을 꽂아 병력이 수십만에 달하는 것처럼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 놓으면 저들은 겁에 질려 마음이 동요될 것이 분명하니 그때 가서 육가(陸賈)와 역이기 같은 능변가(能辯家)를 보내 설득하면서 많은 금은보화로 저들을 매수공작을 전개하면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유방은 그 말을 그대로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금은보화로 저들이 쉽게 매수되겠습니까?”
장량이 웃으면서 대답한다.

“물론 금은보화를 주면서 설득한다고 저들이 쉽게 매수되리라고는 저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들에게는 기본적인 약점이 있어서 우리가 매수공작을 펼치면 마음이 흔들려서 수비가 소홀하게 될 것만은 틀림이 없사옵니다. 그러면 그때 총공격을 가한다면 승리할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유방은 장량의 말을 자르며 묻는다.

“선생께서는 지금 그들에게 ‘기본적인 약점’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들의 기본적인 약점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장량이 웃으며 대답한다.

“적의 지휘관은 한영, 경패, 주괴 등 세 사람뿐이옵니다. 그런데 제가 그동안 이들 세 사람의 출신 성분을 면밀하게 조사해 보았더니, 이들은 모두가 장사꾼의 아들이었습니다. 장사꾼의 아들들이란 이를 탐하는 근성이 어릴 적부터 몸에 배어 많은 재물을 보면 마음이 반드시 흔들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들의 본성에 접근하여 정신적으로 혼란을 일으켜 놓으면, 승리할 수 있는 기회가 절로 생기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유방은 장량의 말을 듣고 탄복했다.

“선생은 어느 틈에 적장들의 출신 성분까지 이처럼 소상히 조사해 놓으셨습니까?”
“싸움에는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백전불패한다고 하였습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는 백전불패(百戰不敗)라 적장들에 관한 신상을 모르고 어떻게 승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세 사람의 적장들이 한결같이 장사꾼의 아들이라는 점이 우리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옵니다.”
“선생이 아니면 누가 그런 점에 착안할 수가 있었겠소이까? 아무튼 선생의 계략을 곧 실천에 옮겨 나가기로 하십시다.”
유방은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병력이 대단히 많은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적들이 쉽게 볼 수 있는 곳에 수많은 군기를 세워 놓았다.

그런 다음 육가와 역이기에게 많은 재화를 주면서 진장들을 만나러 가게 하였다.
육가와 역이기는 ‘강화특사’라는 명목으로 진장 주괴와 한영을 찾아가 당당한 변론을 펴나갔다.

“당신네들도 잘 알고 있다시피, 진황은 워낙 포악하여 만천하의 백성들이 한결같이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는 중이오. 이에 패공은 백성들을 구하려고 대군을 일으켜 진나라를 정벌하려고 왔소이다.
우리는 50만 대군을 거느리고 왔기 때문에, 오늘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무관을 함락시켜 버릴 수가 있소.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애꿎은 백성들 상당수가 희생되겠기에 여러분들과 협상을 하고자 온 것이오.
만약 여러분들이 무관을 곱게 내준다면 패공은 당신들에게 만금의 상을 내림과 동시에 만호후(萬戶侯)에 봉하도록 할 것이니, 당신네들은 이점을 깊이 고려해 주기 바라오.”
한영과 주괴는 ‘무관성을 곱게 내주기만 하면 만호후에 봉해 주겠다.’는 말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장량의 예측대로 그들은 장사꾼의 아들이어서 이해타산에는 누구보다도 밝았던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지키던 성을 곱게 내준다는 것은 너무도 중대한 일이므로 한영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그것은 안 될 말이오. 우리는 오늘날까지 진나라의 녹을 먹고 살아왔는데, 내가 지켜 오던 성을 싸워보지도 아니하고 어찌 귀국에게 내줄 수가 있단 말이오?”
하며 강경하게 거부하자, 역이기 노인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당신네들은 생각하는 바가 왜 이다지도 어리석소? 패공이 천하를 바로잡기 위해 일단 군사를 일으킨 이상 진나라는 조만간에 망해버릴 나라요. 만호후의 영화를 마다하고, 어차피 망해 버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다가 전장의 고혼이 되겠다니 세상에 이런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단 말이오.”
한영과 주괴는 일면 수긍되는 점이 있는지 고개만 갸웃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대답을 안 한다는 것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역이기는 그런 눈치를 간파하고 짐짓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폭탄선언을 한다.

“나는 그대들의 영화를 도와주기 위하여 일부러 교섭을 하러 왔는데, 여러분들이 끝까지 싸울 각오라면 이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소. 이제는 전장에서나 다시 보기로 합시다.”
그러자 한영과 주괴가 크게 당황하면서 역이기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하며 황급한 어조로 말한다.

“선생이 제안한 문제에 대해 우리가 오늘 밤 상의를 해보겠으니, 선생은 여기서 하룻밤을 묵고 내일 떠나도록 하시오.”
“당신네들의 소원이 그렇다면 하룻밤 묵어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오. 그러면 오늘 밤 여러분이 충분히 상의해 보시오.”
그날 밤 한영과 주괴, 경패는 부장들과 한자리에 모여 앉아 그 문제를 토의했다.

사실 한영, 주괴, 경패 등 세 장수는 무관을 내주고 만호후가 되어 평생 영화를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속마음을 정의감에 불타는 젊은 장수들 앞에서 감히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목전의 공격을 당할 시점이라 고심 끝에 ‘적과 타협 하는 것이 어떠하겠나?’는 말을 조심스레 꺼내 보았다.
그러자 젊은 부장들은 펄쩍 놀라며,

“우리가 지켜 오던 무관을 적에게 그냥 내주다니, 그게 어디 말이 되는 소립니까?
유방이란 자가 뭐가 두려워 싸워보지도 않고 성을 고스란히 내준다는 말입니까? 장군들이 싸우지 않으신다면 저희들이 대신 끝까지 싸워 이겨 보겠습니다.”
하고 핏대를 올리며 반대를 하고 나오는 것이었다.

이렇게 젊은 장수들이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나오니 노장들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한영은 역이기의 숙소로 찾아와 말한다.

“어젯밤 장수들을 한자리에 모아서 의논해 보았으나. 무관성을 그냥 내주는 데는 모두가 반대를 하였소이다.”
이에 역이기는 태연하게 웃으며 말한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나는 그만 돌아가겠소이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문득 생각이 난 듯이,

“아, 참! 내가 잊어버린 것이 있군.”
하고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허리에 차고 있는 전대(纏帶) 속에서 값진 패물(佩物)을 꺼내 한영에게 주며 말했다.

“이것은 패공께서 장군에게 특별히 드리는 선물이니 받아주시오.”
한영은 패물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한다.

“패공과 나는 적대지간인데, 어째서 나에게 이런 선물은 보내 주신다는 말이오?”
“장군은 패공이라는 인물을 너무도 모르시는구려. 패공은 비록 적장일지라도 뛰어난 인물에 대해서는 마음으로부터 존경하는 성품이시오. 이 선물은 그런 뜻에서 장군에게 특별히 보내드리는 것이니 아무 말씀 마시고 받아 주시오.”
그러나 한영은 적으로부터 선물을 받기가 매우 난처하였다.

“이 선물만은 못 받겠으니, 패공에게 돌려드리도록 하시오.”
이에 역이기는 숙연한 얼굴로 노기에 넘친 어조로 한영을 꾸짖듯이 나무란다.

“패공께서 정으로 보내주신 선물을 거절한다는 것은 절교를 선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오. 지금 절교를 선언해 놓았다가 후일 패공이 천하를 장악하게 되면, 장군은 무슨 면목으로 패공을 대할 것이오? 그때 이르러 오늘의 절교를 패공이 기억하게 되면, 장군이 무사할 것 같소?”
한영은 그 말을 듣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하여 안색이 변하며 반복해서 말한다.

“선물을 받지 않은 것을 절교로 오해하신다면, 이 선물은 일단 받아두겠소이다. 패공께서 나에게 이처럼 호의를 베풀어주시니, 나도 패공에게 응분의 보답을 해 드리기로 하지요.”
“무슨 보답을...?”
“동료들과 다시 상의하여 가능하면 전쟁을 피하고 타협하는 길을 모색해 보기로 하지요.”
“고맙소이다. 장군이 그렇게 노력해 주시면 패공께서도 장군의 은공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오.”
이렇게 역이기는 한영에게 뇌물을 주는데 기어코 성공을 하였다.

이러한 뇌물 작전의 성공은 역이기만이 아니었다.
역이기 노인과 함께 무관성에 동행한 육가(陸賈)도 주괴와 경패(耿沛), 두 장수를 개별적으로 만나 역 노인과 똑같은 방식으로 뇌물을 안겨주는 데 성공하였던 것이다.

장량의 예측대로 장사꾼의 아들들은 재물을 보면 사족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뇌물의 속성은 조직의 내부에서부터 썩도록 되어 있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부터 소위 ‘김영란 법’이라는 청탁금지법이 시행되고 있다.

부패를 청산하고자 법을 제정한 것까지는 좋으나 이 또한 정성스런 작은 선물까지도 막고 있기 때문에 인심이 야박해지고 경제가 어려워지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

몇 차례 개선하기는 하였으나 근본적으로 문제를 막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공무원들의 복지부동이 만연하고 의욕까지 죽인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법을 만들고 또 만들고, 모든 것을 법으로만 백성을 옭아매려 한 진시황의 전례를 볼진대 이에 반해 한고조 유방의 ‘약법삼장’은 민초들의 커다란 환영을 받았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 제 6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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