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57화
2021. 4. 30. 07:17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57화
☞ 약법삼장(約法三章)과 역이기(酈食其) 노인
2세 황제 3년 이른 봄, 함양을 치려고 10만 군사를 이끌고 팽성을 출발한 유방은 창성이라는 소읍에 당도한다. 그러나 창성 성주는 성문을 굳게 닫은 채 응전할 태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성주가 거느린 병력이 4 ~5천 명 정도라 10만의 대군과 감히 대적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성을 사수하겠다는 의지는 분명해 보였다.
이런 사태를 지켜보던 번쾌가 유방에게 큰소리로 진언한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모양이니, 창성을 송두리째 때려 부숴 버리시지요.”
그러나 유방은 머리를 가로저으며 답한다.
“우리의 막강한 병력으로 창성을 때려 부수기는 쉬운 일이오. 그러나 성을 공격하다 보면 성안에 있는 백성들도 상당한 희생을 당하게 되지 않겠소? 백성을 구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우리가 백성들을 희생시킨다면 누가 우리를 ‘정의의 군’이라 하겠소? 그러니 무력으로 성을 정복할 생각을 말고, 먼저 선무공작으로 민심을 회유해 봅시다.”
“어떤 방법으로 민심을 회유하시겠다는 말씀이신지요?”
“성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격문을 날려 보내면 백성들은 그 격문을 보고 우리에게 마음을 돌리게 될 것이오. 격문은 내가 직접 써서 보낼 것이니 두고 보면 알게 될 것이오.”
유방은 즉석에서 붓을 들어 ‘성안의 백성들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썼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성안의 백성들에게 고하노니, 나 초군 총사령관 유방은 진나라의 학정에 시달리고 있는 백성들을 구하러 왔노라.
선량한 백성들이여!
그동안 진제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학정에 얼마나 시달려 왔는가?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성을 공격하여 그대들을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러나 무력으로 창성을 함락시키다 보면 선량한 백성들까지도 전화의 희생을 면키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그대들을 위해 무력행사를 자제하고 있노라.
성안의 백성들은 나의 이러한 고충을 십분 헤아려 어떤 수단을 통해서라도 나의 진영으로 귀순해 오도록 하라. 누구를 막론하고 귀순해 오는 자는 신분을 보호하고, 금후 생계에 대해서도 전적인 책임을 지겠다. 거듭 당부하노니 사지에서 새로운 삶을 찾고자 하는 백성들은 서슴지 말고 귀순해 오라. 나는 그대들을 끝까지 애호해 줄 것을 거듭 다짐하노라.
초국 서군 총사령관 유방”
유방은 격문을 화살에 매어 성안으로 날려 보냈다.
성안의 백성들은 날아온 격문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또한 격문을 읽어 본 백성들 모두가 감격하면서,
“이제야 우리가 구세주를 만나게 되는 모양일세!”
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백성들은 격문을 돌려가며 읽어 보았는데, 글을 모르는 백성은 격문의 내용에 살을 덧붙여,
“초군 총사령관 유방 장군이 우리를 구해 주기 위해 오셨다고 하니, 어찌 주저할 것인가! 오늘 밤으로 유방 장군에게 귀순해 가기로 하세!”
하고 외치자, 어떤 노인 한 사람이 나타나 꾸짖는데,
“이 철없는 사람들아! 만약 이 격문과 귀순하겠다는 사실을 관에서 알면 우리 모두를 죽일 판인데 어쩌자고 귀순을 선동하는가? 이런 일은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실행하여야 하는 것이야. 만약 관에서 알게 되면 한 사람도 성을 빠져 나가기가 어렵게 될 것이네.”
그리하여 그날부터 성안의 젊은이부터 밤이 되면 관헌의 눈을 피해 열 명, 스무 명씩 성벽을 기어 넘어 초군 진영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유방은 귀순해 온 젊은이들을 가족처럼 따듯하게 맞이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기에 귀순한 청년들 간에는
“유방 장군이야말로 우리들을 구해 주기 위하여 하늘이 보내주신 聖將(성장)이시다.”
라는 소문까지 떠돌게 되었다.
진나라 관헌들은 처음에는 그러한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부터 창성 안에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고 집집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늙은이들뿐이었다.
이에 크게 당황한 성주는 직속 부하들을 이끌고 뒷문으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창성의 성주가 도망쳐 버리자, 성안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성문을 활짝 열어 유방을 맞아들였다.
그리하여 유방은 선무공작 하나로 창성을 무혈 접수하게 되었다.
유방은 창성에 입성하자, 모든 백성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위로연을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유방은
“여러분! 그동안 진나라의 학정으로 고초가 얼마나 많으셨소이까? 그러나 오늘부터는 여러분을 괴롭힐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십시오. 진나라는 그동안 수많은 법령으로 여러분들을 괴롭혀 왔으나 오늘부터는 그러한 법령들은 모두 폐기하겠소. 그러나 사회의 안녕질서를 위하여 법이 전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니,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약법삼장(約法三章)’이라는 간략한 법규를 새로 선포하겠소.”
“약법삼장이란 어떤 것이옵니까?”
“내가 이제 약법삼장을 설명해 드릴 것이니, 이것만은 모든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 주시오.”
유방이 선포한 약법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둘째, 남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엄벌에 처한다.
셋째, 지금까지 백성들을 괴롭혀 온 진나라의 모든 법령은 오늘부로 완전히 폐기한다.
‘약법삼장’이 선포되자, 수많은 백성들이 원근 각지에서 앞 다투어 유방 아래로 모여들었다. 창성 바로 이웃 고을은 고양성이었다. 고양성주 왕덕(王德)은 유방이 약법삼장으로 백성들을 평화롭게 다스려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감동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유방을 찾아왔다.
“장군께서 약법삼장으로 백성들을 평화롭게 다스려 나가신다는 말씀을 듣고 왔사오니 바라옵건대, 저희 고을도 함께 다스려 주시옵소서.”
유방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했다.
“귀공은 싸우지도 않고 고양성을 나에게 맡기겠다는 말씀이오?”
“성주의 사명은 백성들을 평화롭게 살 수 있게 해주는데 있다고 생각하옵니다. 장군께서 제가 거느리고 있는 백성들을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시려는데, 제가 무엇 때문에 장군과 싸우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저희 고을에도 친히 입성하셔서 백성들에게 자애로운 정치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이리하여 유방은 고양성도 무혈 접수하게 되었다.
고양성주 왕덕은 당시에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현인이었다.
유방은 고양성주 왕덕과 의기투합하는 바가 있어서 마음을 터놓고 대화하는 중에 이런 당부를 한다.
“나는 썩어빠진 진나라를 쳐서 백성들이 고루 잘 살아갈 수 있는 새 나라를 세워 볼 생각이오. 그러니 이제부터는 귀공이 나에게 힘을 보태 주시면 고맙겠소이다.”
왕덕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저같이 무능한 사람을 그처럼 생각해주시니 영광스럽기 그지없사옵니다. 그러나 저는 고양 백성들과 정이 들어서 이곳을 떠날 생각이 없사옵니다. 장군께서 인재를 구하신다면, 저희 고을에 사는 현인 한 분을 소개해 드리고 싶사옵니다.”
유방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물었다.
“그분은 무엇 하는 사람이오?”
“그분은 ‘역이기(酈食其)’라고 하는 68세의 노인이옵니다. 날마다 술에 취해 고성방가를 하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미친 늙은이라고 부르옵니다. 외모는 볼품이 없사오나 천문에 능통하여 흥망성쇠를 알고 난세의 상황에 통달한 현인이옵니다.”
“그처럼 천운에 통달한 사람이 어찌 날마다 술이나 마시고, 고성방가만 하고 돌아다닌단 말이오?”
“젊었을 때는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지냈으나 시황제의 분서갱유 사건 이후부터는 갑자기 술에 찌들어 고주망태가 되어 버린 것이옵니다. 그러나 장군께서 거두어 주시면 크게 도움이 되실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역이기’라는 노인이 무척 궁금해졌다.
“그러면 역 노인을 한번 만나보고 싶으니 귀공이 그 노인을 나한테 좀 데리고 오시오.”
“분부대로 거행하겠습니다.”
왕덕이 유방의 부탁을 받고 역이기를 집으로 찾아가니, 역이기 노인은 이날도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왕덕은 역 노인에게 간곡하게 말한다.
“선생은 지금까지 명군을 만나지 못해 오랫동안 취생몽사로 세월을 보내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관인후덕한 유방 장군이 나타나 왕업을 새로이 닦고 있으니, 선생은 심기일전하셔서 이제부터는 그분을 도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소서. 저는 그분의 부탁을 받고 선생을 모시러 왔습니다.”
그러나 역 노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한다.
“유방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나도 들어 알고 있소. 그러나 그는 사람에 대한 예우를 모르는 사람이오. 그가 나를 예로써 맞아 가지 않는데, 내가 귀공을 호락호락 따라가면 더욱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 게 아니오. 나는 가고 싶어도 못 가겠소이다.”
왕덕은 역 노인이 거절하는 심정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선생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본래 임기응변에 능하시니까, 그런 일은 그분을 직접 만나 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니옵니까?”
“하긴 그렇기도 하구려. 그렇다면 한번 만나봅시다.”
역이기 노인은 즉석에서 왕덕을 따라 유방을 만나러 나섰다.
때마침 유방은 의자 위에 걸터앉아 있었고, 두 명의 여인이 발을 씻겨 주고 있어서 역 노인이 방안에 들어와도 일어설 수 없었다.
역 노인은 방안에 들어와서도 두 손을 모아 잡고 서 있기만 할 뿐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려고 하지도 않고 유방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자 역 노인은 유방의 불손한 태도가 비위에 거슬렸던지 유방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대뜸 퍼붓듯이 묻는다.
“귀공은 진나라를 위해서 제후들을 치려는 것인가, 아니면 제후들의 도움을 얻어 진나라를 치려는 것인가. 도대체 그 두 가지 중에 어느 편인가?”
초면의 유방에게 모욕도 이만저만이 아닌 질문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제아무리 관인후덕하다는 유방도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유방은 발을 씻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이 썩어빠진 늙은이야! 온 천하가 진나라의 가혹한 법령에 시달리고 있어 나는 회왕의 명을 받고 서로(西路)로 진나라를 치러 온 정의의 지사다. 그러한 나를 보고 진나라를 도우러 왔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소리냐?”
그러자 역 노인은 즉석에서 태연스럽게 꾸짖듯이 말한다.
“귀공이 진을 치러 온 의장(義將)이라면, 만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 심복할 수 있는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 아닌가? 또 귀공은 어른이 왔는데도 발을 씻으며 예조차 갖출 줄을 모르니 이런 무례한 행동이 어디 있단 말인가? 현인을 이런 식으로 대한다면, 어느 누가 귀공과 더불어 천하를 도모할 생각을 갖겠는가? 그대가 큰 뜻을 품고 있다면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로다.”
유방은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라고, 역 노인을 부랴부랴 상좌로 모신 다음 새삼스러이 용서를 빌며 말했다.
“실상인즉, 선생께서 이처럼 속히 오실 줄을 모르고 결례를 범했사오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제야 역 노인은 파안대소하며 말한다.
“하하하, 패공이 관인후덕하다더니 틀림없소이다. 내 비록 늙은 몸이오나 오늘부터는 패공을 위하여 신명을 다하겠소이다.”
그러고 나서 마주 앉아 천하 대사에 대한 경륜을 펼치는데, 그의 논리는 장강유수와 같이 도도하여 유방은 역 노인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에서 이렇게 물어보았다.
“저는 지금부터 10만 군사를 이끌고 함양으로 쳐들어가고자 하옵는데, 선생께서는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옵니까?”
역 노인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답한다.
“패공께서 지금 여기저기서 모은 10만 군사를 이끌고 함양으로 쳐들어가시고자 하오나, 그것은 양떼를 이끌고 호랑이 굴로 덤벼 들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이옵니다. 여기서 얼마를 더 가면 진류성이 있사온데, 그곳은 지리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반드시 점령해야 하는 요충지입니다. 게다가 성안에는 군수물자도 풍부하게 비축되어 있사옵니다. 다행히 진류성주 진동(陳同)은 저와는 막역한 친구 사이로 제가 그 친구를 만나서 패공의 휘하로 들어오도록 설득해 보겠습니다.”
“선생께서 이처럼 애써주시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선생께서 설득하시면 성주가 들어줄까요?”
“제가 이해득실을 따져 설득하면 반드시 들어줄 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면 진류성을 근거지로 사방에서 군마를 확충한 후 기회를 보아 함양으로 쳐들어가면 십중팔구 성공할 것이옵니다.”
유방은 크게 기뻐하며 역 노인을 밀사 자격으로 진류성으로 보낸다.
역 노인과 진류성주 진동은 막역한 친구라 진동은 역 노인을 반갑게 맞이하여 후당에서 단둘이 술잔을 나눈다.
역 노인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오자, 진동을 설득하기 시작한다.
“예로부터 양금상목이서(良禽相木而栖, 좋은 새는 나무를 가려 살고) 하고, 현신택주이좌(賢臣擇主而佐, 어진 선비는 주인을 선택하여 돕는다)라고 하였네.
진시황 시절부터 진나라는 무도하기 그지없어 지금은 각 제후들이 저마다 배반하고 일어서고 있는 중이네. 내가 진시황 시절 분서갱유 사건 이후로 미치광이 노릇을 한 것도 현군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네.
그러다가 어제 유방이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관상부터가 제왕지상인데, 성품 또한 관인 후덕하여 그분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친부처럼 따르는 것을 이 눈으로 직접 보았네. 이제 그분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함양으로 쳐들어간다고 하는데, 그러자면 반드시 진류성을 먼저 거쳐 가게 될 것이네. 내가 보기에 유방이 이곳으로 쳐들어오게 되면 귀공은 그를 당해 낼 수가 없을 것이야. 그때 가서 자네의 군사와 백성이 당할 일을 상상해 보시게. 나라면 생각을 바꿔 패공에게 진류성을 내주고 백성도 지키면서 후일 자네의 영광을 도모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진동은 너무도 뜻밖의 제안에 한참 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조용히 입을 열어 대답한다.
“자네의 말이 옳은 것 같네. 자네 말대로 진류성을 패공에게 내어드리고, 그분의 휘하로 들어가기로 하겠네.”
“참으로 잘 생각해주셨네. 그러면 내가 곧 돌아가 패공에게 그 말씀을 전할 테니, 자네는 패공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를 서둘러주시게.”
그로부터 며칠 후 유방은 성주 진동의 영접을 받으며, 소하(簫何), 조참(曹參) 등 휘하 참모를 대동하고 진류성에 무혈 입성한다.
이로써 유방은 싸우지 않고 창성, 고양, 진류의 세 성을 접수하게 된다. 그리고 진류성에 와 보니, 역 노인의 말대로 진류성에는 무기와 군량이 놀랄 만큼 많이 비축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유방은 이곳에서도 ‘약법삼장’을 선포하여 백성들을 해방시켜 위무하니, 감동한 백성들과 그들 중 수많은 젊은이들이 유방의 군사가 되겠다고 자원한 수가 무려 5만여 명에 이르자, 유방은 크게 기뻐하며 역이기 노인에게 말했다.
“오늘날 뜻있는 청년들이 이처럼 많이 모여 오게 된 것은 오로지 선생의 덕택입니다. 이에 선생을 ‘광야군(廣野君)’으로 받들어 모시고자 하오니, 선생께서는 이후에도 계속 저를 도와주소서.”
역 노인은 직위를 사양하며 말한다.
“늙은 몸이 그동안 현주를 만나지 못해 오랫동안 낙백(落魄) 생활을 해오다가 천만다행으로 패공을 만나 뵙게 되어 작은 조언을 드렸을 뿐이온데, 어찌 이 같은 과분한 직위를 주시옵니까? 이는 본인이 바라는 바가 아니오니 거두어 주시옵소서.”
“선생의 고매하신 뜻은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조그만 정성만은 거절하지 마시고 받아 주소서.”
역 노인은 마지못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러시면 주신 직위를 감사히 받자와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 註) 酈食其(역이기)
이름은 이기(食其)이며, 역생(酈生)이라고도 불린다. 진류(陳留) 고양(高陽, 지금의 하남성河南省 기현杞縣) 출신이다. 참모(參謀)이자 세객(說客)으로서 한(漢) 고조(高祖) 유방(劉邦, BC 247?~BC 195)을 도왔으며, 특히 제후(諸侯)들을 설득하여 끌어들이는 외교(外交) 활동에서 큰 공(功)을 세웠다. 앞으로 역이기의 활약과 그의 죽음까지 기대해보자.
- 제 58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