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56화

2021. 4. 29. 07:18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56화

노공(魯公, 항우)과 패공(沛公, 유방)의 ‘관중왕(關中王)’ 싸움

장한이 10만 군사와 함께 항우에게 투항했다는 소식이 함양에 알려지자, 승상 조고는 기절초풍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불알도 없는 조고는 불알에서 종소리 나게 대궐로 달려와 2세 황제에게 원망하듯 품한다.

“폐하! 함곡관을 수비하고 있던 장한이 폐하를 배반하고 항우에게 투항했다고 하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은 진작부터 그놈의 모반이 의심스러워 일찌감치 없애버리도록 고하였사온데, 폐하께서 결단을 미루시는 바람에 기어코 큰일을 초래하고야 말았습니다.”
장한이 항우에게 투항한 원인은 오로지 조고 자신의 모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간악하기 짝이 없는 조고란 인간은 모든 책임을 황제에게 뒤집어 씌웠다.
어리석게도 2세 황제는 모든 책임이 자신한테 있는 줄 알고 당황하여 말한다.

“그렇다면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짐은 승상만을 믿으니 모든 일은 승상의 뜻대로 하시오.”
조고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신은 이런 일이 있을까 염려되어 장한의 가족들을 미리 연금해놓고 있었습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의 가족들을 거리로 끌어내 대중 앞에서 목을 잘라 만백성의 경계로 삼도록 하겠사옵니다.”
“그것 참, Good Idea요. 장한의 가족들을 미리 잡아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현명한 판단이었소.”
술과 계집밖에 모르는 2세 황제는 조고의 말이라면 무조건 OK였다.

이리하여 조고는 장한의 가족을 거리로 끌어내 모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무참하게 목을 잘라 죽였다.
그리고 전군에 비상명령을 내린다.

“장한이 초군과 결탁하여 함양으로 쳐들어올지도 모르니 50만 전군은 즉각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하라.”
진나라가 비록 부패했으나 50만 대군은 아직도 건재하였다.

한편, 항우에게 투항한 장한은 가족들이 조고의 손에 몰살되었다는 비보를 전해 듣고 통곡하며 항우에게 호소한다.

“지금 함곡관을 지키는 진군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이런 기회에 함곡관을 거쳐 지금 당장 함양으로 쳐들어가십시다. 저는 제 손으로 진나라를 멸망시켜, 조고에 진 빚도 갚아야 하겠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오. 그러면 오늘 당장 장군의 원수도 갚을 겸 함양으로 쳐들어가십시다.”
성미가 급한 항우는 오로지 승리감에 도취되어 적정을 살피지 아니하고 무조건 진군하려고만 하자, 군사 범증이 즉각 제동을 걸고 나선다.

“장군!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항우는 범증의 반대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함양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어째서 불가하다는 말씀이오?”
범증이 침착하게 대답한다.

“우리 군사는 오랫동안 외지에 나와 있던 관계로 몹시 피로해진 상태에다 재정적으로 어려운 형편입니다. 게다가 장한 장군이 우리에게 투항한 관계로 진나라 50만 대군이 비상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진나라는 정치적으로는 지리멸렬한 상태이지만, 50만 대군은 아직 건재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함양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손실이 클 것으로 판단되옵니다.”
“으음... 군사의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럴 것도 같구려. 그러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는 말씀이오?”
“회왕께서 그동안 수도를 팽성으로 옮기셨지만, 아직 모든 체제가 안정되지 못했을 것이옵니다. 그러하오니 일단 팽성으로 돌아가 우리 군사들이 가족과 함께 재회할 시간과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하면서 국기를 튼튼히 다져 놓은 후, 진나라에 대한 공략을 추진하는 것이 순서일 줄로 아뢰옵니다.”
“지금 꼭 팽성으로 회군해야 합니까?”
“꼭 그래야만 할 것이옵니다.”
“그 이유는?”
“진군은 지금 복수심에 타올라 있으므로 팽성 수비가 허술한 것을 알면 일제히 팽성으로 쳐들어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왕을 안전하게 수호하기 위해서라도 신속히 팽성으로 회군해야 합니다.”
범증의 말은 앞뒤 논리가 정연하였고, 항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참으로 좋은 가르침을 주셨소이다. 그러면 함양 공략은 일단 뒤로 미루고, 우선 팽성으로 회군하도록 하십시다.”
항우가 장한을 포함하여 그의 군사들까지 모두 거느리고 팽성으로 돌아오자, 회왕은 맨발로 달려 나와 항우의 두 손을 잡고 반갑게 영접하였다.
※ 맨발이라는 것은 과장된 것임.

그 무렵 남양을 정벌하던 유방도 회왕을 수호하기 위하여 군사들을 거느리고 팽성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회왕은 항우와 유방의 환도를 크게 기뻐하면서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었다.

그 자리에는 2백여 명의 장수들이 참석했는데, 그들을 계열별로 분류해 보면, 유방계는 소하, 번쾌, 조참, 주발, 왕릉, 하후영, 시무, 노관, 정복, 부관 등등이었고, 항우계는 범증, 영포, 우영, 종리매, 환초, 정공, 옹치, 장한, 사마흔, 동예, 위표, 장이, 공오 등이었다.

항우와 유방, 유방과 항우의 지도력에 따라 군 계열의 색깔이 뚜렷하게 다른 두 파의 장수들이 하나로 화합해 나가는데 있어서 초군의 기본적인 문제점이 내재하고 있었다.
초회왕은 항우와 유방에게 똑같은 축배를 내리며 두 사람의 전공을 치하한다.

“장남 전선에서 연전연승한 항우 장군의 전공과 남양 전선에서 승리를 거듭한 유방 장군의 전공은 우리 초국의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오. 그러기에 과인은 두 분에게 똑같은 작위를 수여하도록 하겠소. 항우 장군은 장안후(長安侯)로 봉하여 노공(魯公)이라 부르고, 유방 장군은 무안후(武安侯)로 봉하여 패공(沛公)이라고 부르게 할 것이니, 이 자리에 참석한 만조백관들은 오늘부터 두 장군을 그렇게 불러 주시도록 하오.”
항우와 유방으로서는 영광스럽기 짝이 없는 은총이었다.

이것은 회왕이 두 사람에게 똑같은 은총을 베풀어 서로 간에 경쟁심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나라를 신속히 발전시켜 나갈 계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우와 유방은 다 같은 무장이면서도 성품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항우는 용맹하면서도 고집스러워 모든 일을 우격다짐으로 밀고 나가는 경향이 있었고, 유방은 우유부단한 듯 하면서도 백성을 아끼는 마음이 강하고 매사를 순리대로 풀어가는 성품이었다.

그러기에 초회왕은 두 사람을 모두 신임하면서도 항우를 대할 때는 일종의 부담감 같은 것을 느껴 왔고, 유방을 대할 때에는 마치 다정한 친구를 대하는 듯 한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자기 혼자만 간직하고 있는 느낌이었을 뿐 그런 기색을 표면에 나타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항우와 유방이 팽성으로 돌아와 몇 달을 지내는 동안 초나라의 기틀은 몰라보게 달라졌다.
마침 그 무렵, 함양에 밀파되었던 첩자들이 돌아와 진나라의 정세를 보고하는데,

“2세 황제는 여전히 주색에 빠져 있고, 조고라는 자는 자신의 권력 구축에만 혈안이 되어 제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 없이 처단해버리는 고로 국정은 난마처럼 어지럽습니다.”
항우는 그 보고를 듣고 회왕에게 품한다.

“신은 오래 전부터 도탄에 빠져있는 진나라 백성들을 구할 생각이었습니다. 지금 진나라의 국정이 몹시 혼탁하다고 하오니, 지금이야말로 진나라를 정벌할 때가 아닐까 하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소장에게 진나라를 정벌하라는 군령을 내려주시옵소서.”
초회왕은 웃으면서 항우에게 대답했다.

“함양을 공격하겠다는 경의 의견에는 과인도 찬성이오. 그러나 적이 병력 수도 많고, 전통적으로 강군이기 때문에 경이 단독으로 공략하는 것보다 패공과 협동작전으로 양군이 동시에 진군하여 공략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 같구려.”
그러나 항우는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패공과 협동작전을 펴면 유리한 것은 사실이옵니다. 그러나 소장 혼자서도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옵니다.”
함양 공략의 전공을 혼자서 차지하려는 항우의 속셈을 회왕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 연유로 국가의 대사를 항우 한 사람에게만 맡기지 않고 양두마차 체제로 국정을 운영해 오고 있는 회왕으로서는 유방에게도 똑같은 기회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전쟁은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는 전쟁이니만큼 싸우려면 총력을 다 해 싸워야 할 것이오. 패공을 불러 패공의 의견도 들어 보도록 합시다.”
유방이 부름을 받고 어전으로 나와 상세한 설명을 듣고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항우 장군과 소장이 협동작전을 펼친다면 함양을 함락시키기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옵니다.”
유방의 의견은 어디까지나 타협적이었다.
초회왕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항우와 유방에게 명한다.

“그러면 두 장군은 두 갈래로 나누어 동시에 함양으로 쳐들어 가주시오. 함양으로 가려면 동쪽으로 가는 길이 있고, 서쪽으로 가는 길이 있소. 어느 편이 멀고 어느 편이 가까운지 모르겠구려.”
그러자 늙은 대부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동쪽으로 가는 길은 지세가 험한 반면에 거리가 약간 가깝사옵고, 서쪽으로 가는 길은 지세가 평이한 반면에 거리가 조금 멀어서 결국은 어디로 가나 거의 비등한 거리일 것이옵니다.”
회왕은 그 말을 듣고 더욱 기뻐하며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어느 길로 가느냐 하는 것은 공평하게 제비를 뽑아 결정하기로 합시다.”
그리고 회왕 자신이 ‘동’과 ‘서’의 두 글자를 써서 제비를 만든 다음,

“패공보다는 노공의 나이가 한 살 더 많으니, 제비는 노공이 먼저 뽑도록 하시오.”
하고 말했다

초회왕은 두 사람에게 공평을 기하기 위해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던 것이다.
이윽고 제비를 뽑고 보니, 항우는 동쪽으로, 유방은 서쪽으로 방향이 결정되었다.

초회왕은 양군이 출정을 앞두게 되자, 성대한 환송연을 베풀었다.
환송연이 거의 끝나갈 즈음, 회왕은 항우와 유방의 손을 좌우에 붙잡고 엄숙하게 말했다.

“이제 두 장군이 대장정의 길에 오르게 되었으니, 과인은 두 분 장군께서 기필코 승리하고 돌아오시기를 천지신명께 축원하겠소. 진제(秦帝)의 무도한 학정에 오랫동안 시달려 오고 있는 백성들을 구해낼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성스러운 일이겠소? 그런데 과인은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중대한 문제 하나를 이 자리에서 두 분에게 밝히고 싶소이다.”
예기치 못했던 회왕의 발언에 항우와 유방은 똑같이 긴장하였다. 회왕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한동안 침묵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과인이 초나라의 왕족인 것은 분명하지만, 어려서부터 미천하게 자라온 몸이오. 두 장군은 그러한 나를 왕으로 옹립하여 지극정성으로 대해 주시는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그러나 나는 왕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한데다 경륜 또한 부족하여 왕의 구실을 제대로 해오지 못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오.”
그러자 항우와 유방은 똑같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대왕의 말씀은 너무도 겸손하신 말씀이옵니다. 오늘날 초국의 기틀이 튼튼하게 된 것은 오로지 성은의 덕분임을 거듭 아뢰옵니다.”
“두 분의 충성심을 내 모르는 바는 아니오. 그러나 패망했던 초나라를 다시 일으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오로지 두 분의 공로요. 그래서 두 분이 장도에 오르는 이 기회에 즈음하여 나는 두 분에게 중대한 약정을 하나 제안하고 싶소이다.”
“대왕께서 소신들께 무슨 약정이시옵니까?”
항우와 유방은 똑같이 반문하였다.

“만약 두 분께서 나와의 약정을 꼭 지키시겠다면 모르겠거니와 그렇지 않다면 아예 말을 아니 하겠소이다.”
항우와 유방은 똑같이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뢴다.

“대왕의 분부를 소신들이 어찌 거역할 수 있사옵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약정만은 기필코 지키겠사옵니다.”
“그러면 안심하고 말하겠소. 두 장군은 지금 동과 서로 나뉘어 함양으로 쳐들어가게 되었는데, 누가 함양을 먼저 점령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오. 그러므로 함양에 먼저 입성하는 분을 관중왕(關中王)으로 삼고, 늦게 입성한 사람은 그냥 신하로 삼도록 하겠소이다. 두 분과 약정하고 싶던 것이 바로 이것이니, 두 분은 그 약정은 꼭 지켜주기 바라오.”
약정이라 하기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선언이인 바, 항우와 유방의 심장이 갑자기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저희들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이 왕이 된다면 대왕께오서는?”
항우가 그렇게 반문하기를 흐리자, 초회왕이 대답한다.

“두 분 중에서 어느 한 분이 왕이 되시면, 나는 왕위에서 물러나 여생을 한가롭게 살아갈 생각이오.”
그러자 유방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뢴다.

“저희들이 진나라를 평정하고 나면 대왕을 황제로 받들어 모실 계획이오니, 초야로 돌아가시겠다는 말씀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허허허! 내 문제는 차차 얘기하기로 하고, 두 분은 나와의 약정을 준수하겠다는 뜻에서 내 앞에서 형제의 결의를 맺어 주면 고맙겠소이다.”
이리하여 항우와 유방은 초회왕 앞에서 의형제를 맺고 장도에 오르게 되는데, 누가 왕이 되고 누가 신하가 되느냐 하는 일생일대의 정치 도박이 바야흐로 시작되고 있었다.

‘초나라의 국권을 회복하고 진나라를 멸하기 위해 일대 도박을 벌이는 항우와 유방, 초나라 회왕의 신하로 의형제까지 맺으며 동지로 출발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철 천지 원수가 되는지?’

- 제 5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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