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47화

2021. 4. 20. 07:16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47화

☞ 군사(軍師) 범증(范增)의 잘못된 만남

회계성에 도착한 항우는 우영, 환초, 우자기, 영포 등 네 장수를 항량에게 인사를 올리게 하였다. 항량은 네 장수에게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어주며 말했다
“천군(千軍)을 얻기는 쉬워도 쓸 만한 장수 한 사람을 구하기는 더 어렵다고 하는데, 그대들 네 장수를 한꺼번에 얻게 되었으니 이런 기쁨이 어디 있겠소. 이제 우리 군사가 20만에 가까웠으니 진나라를 쳐부수기에 충분할 것 같소이다. 가까운 시일에 군사를 일으켜 함양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어떠하겠소?”
항우가 즉석에서 대답한다.

“좋습니다. 명령만 내리시면 저희들은 언제든지 함양으로 쳐들어가겠습니다. 우리 군사가 물경 20만에 이르렀으니 썩어빠진 진나라 군사가 백 만이기로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로부터 얼마 후 항량이 진나라를 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회계 땅을 떠나려고 하자, 백성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사정하듯 말한다.

“저희들은 오랫동안 진나라의 학정에 시달려 오다가 성주님의 덕택으로 이제야 겨우 마음 놓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주님께서 떠나가시면 저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성주님께서 이곳을 떠나시려거든 차라리 저희들을 죽이고 가시옵소서.”
항량은 백성들의 호소에 크게 감동하였다.

“내가 이곳을 떠나기로 어찌 그대들을 버리겠소. 나는 진나라를 쳐서 만천하의 백성들을 구하고자 장도에 오르는 것이니 앞으로의 일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천하를 평정하고 나면 회계 고을에는 특별히 덕망 있는 태수를 보낼 것이고, 이 고을 백성들에게는 10년 동안 모든 조세를 면제해 줄 것이오. 그러니 이만 돌아가기 바라오.”
이렇게 항량은 백성들을 가까스로 달래주고 정도(征途)에 오르는데, 그 위용이 장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제부터는 대군을 거느리고 강동을 거쳐 진나라 수도인 함양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일행이 회양(淮陽) 땅에 이르자, 대장 계포가 항량에게 아뢴다.

“우리 군에는 항우 장군을 비롯하여 실전에 능한 맹장들이 여러분 계시오나, 정작 군사의 역할을 맡아주실 어른은 한 분도 계시지 않습니다. 다행히 여기서 멀지 않은 산중에 범증(范增)이라는 지사 한 분이 계시온데, 그분을 우리들의 군사로 모셔오면 어떻겠습니까?”
항량이 대답했다.

“그런 분이 계시다면 꼭 군사로 모시고 싶소이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범증은 고희를 넘은 노인이기는 하오나, 그의 지모는 옛날의 손자나 오자를 능가하는 분이옵니다. 그분을 군사로 모셔올 수만 있으면 우리는 천하를 쉽게 평정할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항량이 더욱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도 회양 땅에 ‘범증’이라는 고사(高士)가 칩거하고 있다는 소문은 듣고 있었소. 지금이 좋은 기회이니, 계포 장군은 폐백(幣帛)을 갖춰 찾아 뵙고, 그분을 모셔 오도록 하시오.”
계포는 즉시 폐백을 준비하여 범증이 칩거한다는 기고산(旗鼓山)으로 찾아 나섰다.

그러나 워낙 험한 산이어서 범증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나무꾼을 만나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한다.

“그 어른은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여 여기서도 30리쯤 떨어진 토굴 속에 살고 계십니다. 설혹 찾아가시더라도 만나주지도 않으실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계포가 다시 30리쯤 산속으로 찾아 들어가니 어느 토굴 속에서 거문고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옳지! 범증 선생이 저 토굴 속에 계시는 게 분명하구나!’
이윽고 계포가 가까이 다가가 보니 토굴 안에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혼자서 거문고를 타고 있었는데, 첫눈에 보아도 고결한 기품이 범증 선생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리하여 계포가 인기척을 해 보이니, 백발노인은 거문고를 뜯던 손을 멈추고, 계포를 쳐다보며 조용히 묻는다.

“그대는 무슨 일로 왔는고?”
계포는 우선 범증에게 큰절을 올린 다음 폐백을 조심스럽게 내놓으며 말했다.

“소생은 초국 대장 항량 장군의 휘하에 있는 계포라 하옵니다. 지금 진나라의 학정이 잔학무도하여 항량 장군께서는 진나라를 평정하여 백성들을 구하고자 군사를 일으켰사온데, 선생을 군사로 모시고자 하여 소생이 명을 받고 찾아왔사옵니다.”
“나 같은 쓸모없는 늙은이를 군사로 쓰시겠다고? 하하하.”
범증은 고개를 들어 크게 웃고 나서,

“항량이란 사람은 어떤 분인가?”
하고 묻는다.

“항량 장군은 일찍이 초나라의 명장이셨던 항연 장군의 아드님이시옵니다.”
“으음... 초나라의 항연 장군에게 그런 아들이 있었던가? 어쨌거나 나 같은 늙은이를 데려가 보았자 쓸모가 없을 것이니 이 폐백들은 가지고 그냥 돌아가시게!”
하며 일언지하에 거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계포는 다시 머리를 조아리며 간곡히 설득한다.

“지금 천하가 너무나도 어지러워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힘을 합쳐 진나라를 쳐 없애야 할 때이옵니다. 하물며 선생께서는 손자와 오자를 능가하는 지략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춘추도 이미 고희를 넘기셨사오니 경세제민을 위하여 마지막 봉공을 하셔야 할 때라 사료되옵니다. 그 옛날 강태공이 주의 문왕을 만나 세상을 도모한 고사도 있지 않사옵니까? 선생께서는 사양치 마시옵고 부디 항량장군을 도와주시옵소서.”
범증은 계포의 간곡한 설득에 감명 받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나 역시 진시황의 잔혹한 학정에 분노하여 ‘세상을 바로잡아 줄 인물이 없을까?’하고 일찍부터 생각하고 있었네. 자네가 항량 장군의 명을 받고 나를 데리러 왔다니 나도 자네를 따라나설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네. 그러나 세상만사에는 천수라는 것이 있네. 내가 자네를 따라 내려갈 것인지의 여부는 오늘 밤 천수를 점쳐보아 내일 아침에 결정할 테니 이 폐백은 내일 아침까지 보류해 두시게.”
그러나 계포는 폐백을 범증에게 억지로 안겨주며 간곡히 사정한다.

“선생님께서 오늘 밤에 천수를 점쳐보시고, 내일 아침에 마음이 달라지실지도 모르오니 저희들의 성의는 지금 받아 주시지요.”
범증은 마지못해 폐백을 받으며 말했다.

“그대가 의를 위해 이처럼 정성을 다하여 권하니 나도 더 이상 거절할 수가 없네그려. 그러면 내일 아침에 자네와 산을 내려가기로 하세.”
이날 밤 범증은 밤이 깊기를 기다려 하늘을 우러러 천수를 점쳐보았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뿔싸! 항량은 천하의 주인이 될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그를 따라가기로 약속한 것은 커다란 실책이었구나. 그러나 남아일언 중천금이니 폐백까지 받은 이상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항량을 도울 수밖에 없구나! 끌끌~’

다음날 범증은 계포의 인도로 항량을 찾아오니 항량은 진문 밖까지 영접을 나와 범증을 상좌에 모시며,

“선생께서 우리들을 위해 이처럼 하산해주시니 고맙기 그지없사옵니다. 바라 건데, 오늘부터는 군사로서 많은 지침을 주소서.”
범증이 두 번 절하며 말한다.

“장군께서 천하를 의로써 구하시겠다고 하시니 노구(老軀)는 왕업을 이루어 가시는데 견마지로를 다하겠사옵니다.”
항량은 범증을 군사로 모신다는 명을 각 장수에게 하달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상의한다.

“우리는 곧 강동을 거쳐 함양으로 쳐들어갈 계획인데, 선생은 이 계획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범증은 한참동안 숙고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한다.

“전체의 판세를 헤아리지 않고 무조건 함양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무모한 일입니다. 제가 듣기로는 최근에 패현(沛縣)에서 유방이라는 인물도 봉기했다고 합니다. 또 오래 전부터 반기를 들고 일어난 진승, 오광 등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그들에 대한 정보도 시급히 알아볼 필요가 있사옵니다.”
“우리는 우리대로 함양으로 쳐들어가면 될 게 아닙니까? 진승과 오광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범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천하는 나 혼자만의 천하가 아니옵니다. 그들의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면, 그들과도 손을 잡고 함양을 공동으로 공략해야 할 것이옵니다. 만약 그들이 몰락했다면, 그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여 우리가 같은 전철(前轍)을 밟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진승, 오광 등과 섣불리 연합했다가 이용만 당하고 배신당하는 신세가 되면 어떡하지요?”
범증은 그 말을 듣고 파안대소하면서 말했다.

“하하하, 세상이란 결국 먹느냐 먹히느냐의 싸움이옵니다. 큰 고기는 작은 고기를 잡아먹어야만 살아가게 되므로 우리가 그들에게 잡아먹히느냐 또는 그들이 우리에게 잡아먹히느냐 하는 문제는 누가 큰 고기이고 작은 고기냐에 따라서 결정될 것이옵니다.”
항량은 범증의 말이 옳다고 여겨 사람을 사방으로 보내 진승과 오광의 소식을 소상하게 알아보았다.

그 결과 진승과 오광은 어처구니없게 몰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승은 몇 개의 고을을 점령하고 나자 스스로 초왕을 자처하고 많은 미녀들을 거느리며 주색에 탐닉하였다.

장이(張耳)와 진여(陳餘) 등 두 장수가 눈물로 간언하였으나 진승은 끝내 듣지 않고, 주색에 미쳐 돌아가다가 결국에는 진(秦)의 장군 장한(章邯)의 손에 어이없게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범증은 이 소식을 듣고 항량에게 물었다.

“진승이 왜 어이없게 망해버렸는지 그 원인을 알고 계시옵니까?”
“목전의 소욕에 눈이 어두워 주색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 점도 있사옵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항량은 바로 그 뜻을 알 수가 없어서 즉석에서 반문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원인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범증이 진지한 얼굴로 대답한다.

“진승은 대의명분을 내세울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진승도 처음에는 진나라를 징벌하여 백성들을 도탄 속에서 구한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세력이 커지자 초나라의 왕손을 왕으로 옹립할 생각은 아니 하고,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진승이 망하게 된 원인은 바로 그 점에 있었던 것이옵니다.”
항량은 그 말을 듣고 크게 깨닫는 바가 있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그런 과오를 범하지 않겠소이까?”
“공께서 군사를 일으켜 진을 친다는 소문을 듣고, 각처에서 장수들과 백성들이 앞 다투어 몰려드는 것은 공이 초나라의 충신이셨던 항연 장군의 후손이기 때문인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공께서도 천하를 잡고자 하신다면 초나라의 왕손을 초왕으로 옹립해놓고 활동하셔야 하옵니다.”

- 제 48화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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