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24화
2021. 3. 28. 09:37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24화
☞ 노장(老將) 왕전(王翦)의 지략(智略)
한편, 초나라는 왕전이 6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긴장한다.
초의 대장군 항연은 장수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적장 왕전은 우리가 지난번 격파한 이신 따위의 풋나기 장수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백전노장이다. 그는 흉중(胸中)에 어떤 전략을 품고 있는지 모르는 명장이니 함부로 나가 싸우지 말고 성문을 굳게 닫고 일단 수비만 하도록 하라.”
이처럼 초군도 수비 일변도의 전략으로 나왔다.
그러면서도 적의 의도를 알아보고자 때때로 싸움을 걸어 보기도 하였으나 진군은 일체 응전하지 않는 것이었다.
왕전은 날마다 장졸들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말했다.
“너희들은 무엇이든지 배불리 먹어라. 너희들이 잘 먹고 잘 싸워야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전장에 나온 최고 사령관이 이렇게 나오니 사병들의 사기가 크게 올라 입을 모아 왕전을 칭송한다.
“장군님의 명령이라면, 신명을 바쳐 싸우겠습니다.”
이와 같이 왕전의 60만 대군은 초의 수도인 형주성 앞에 진을 쳐놓기만 하고, 일체 공격할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성 안에 갇혀 있다시피 한 초군이 답답해하며 스스로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초장 항연은 진군이 장기전을 펴고 있음을 알고, 처음에는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다.
“왕전이 지략이 풍부한 백전노장인 줄 알고 있었는데, 이제 보니 아무 것도 아니로구나. 60만 대군을 무슨 수단으로 먹여 살리려고 장기전을 편다는 말인가?”
그러나 첩자들의 보고를 들어 보니 왕전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진군이 밭을 갈고 씨를 뿌린 수확이 대풍이라는 보고가 잇따르자, 사태가 이렇게 되어간다면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한 쪽은 자기편일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초장 항연은 석 달이 넘도록 성 안에 갇혀 있다시피 하면서 기다렸는데, 이제는 더 이상 참고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참다못한 항연은 부장 마충(馬忠)을 불러 다음과 같은 군령을 내린다.
“적은 싸울 생각을 않고 농사만 짓고 있다고 하니 이 기회에 우리가 먼저 적을 공격하여 무찔러버려야 하겠다. 나는 은밀히 군사를 이끌고 적의 후방으로 돌아가 뒤에서부터 공격해 들어갈 것이니, 그대는 전면으로부터 적을 쳐 나오라. 이렇게 전후에서 협공하면 진군을 반드시 섬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항연은 야음을 이용해 20만 대군을 이끌고 진군의 후방으로 은밀히 우회하였다.
그러나 첩보망을 거미줄처럼 쳐놓고 있는 왕전이 그런 적의 움직임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전군을 비상 소집해 놓고, 다음과 같이 독전의 말을 토(吐)했다.
“병자양지백년용지일(兵者養之百年用之一)이라고, 군사는 하루를 위하여 백 년 동안 양성해오는 것이다. 적은 오늘 밤 우리의 전방과 후방에서 동시에 협공해 올 것이다. 전, 후방으로부터 일시에 공격을 받게 되면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60만 대군을 두 부대로 나누어 내가 한 부대를 이끌고 후방에서 쳐들어올 적군을 기습작전으로 공격할 것이니, 다른 한 부대는 성하(城下)에 은밀히 잠복해 있다가 마충이 성문을 열고 나오거든 그 기회에 총공격을 퍼부어 형주성을 일거에 점령하도록 하라. 우리가 개선군으로 고국에 돌아가 사랑하는 부모형제를 반갑게 만나 볼 수 있느냐, 아니면 이국(異國) 땅 초나라의 황야에 떠도는 고혼(孤魂)으로 헤매야 하느냐는 오로지 오늘 밤 전투의 성패에 달려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하나같이 사력을 다하여 필승을 기해 주기 바란다.”
왕전의 웅변은 피를 토하듯 간절하여, 60만 대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하였다.
※ 흡사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벌인 7일 전쟁이 생각나는데 왜 그럴까?
단 7일 만에 ‘모세 다얀’ 장군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은 이집트의 전투기와 탱크를 고철덩이로 만들고, 전 군사력을 괴사 직전의 상태로 몰아넣은 그 전쟁이었다.
왕전이 군사들에게 행동개시를 명하자, 부장(副將) 몽선(蒙先)은 30만 군사를 이끌고 은밀히 형주성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리고 왕전 자신도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초군이 우회해 올 후방으로 이동했다.
초장 항연은 그런 줄도 모르고, 적을 뒤에서 공격하기 위하여 야음을 이용, 군사들을 급히 이끌어오고 있었다.
왕전은 초군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전격적인 기습작전을 개시한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예기치 못한 진군의 습격을 받게 된 항연은 크게 당황하였다.
이렇게 진, 초 양국군(兩國軍)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는데...
함성과 비명 속에서 창검이 번개처럼 번쩍이고, 피아(彼我)를 구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천지를 진동하는 아우성이 끝없이 교차되는 아비규환(阿鼻叫喚)의 혼전이 이어졌다.
초장 항연도 초나라 제1의 명장인지라 전격적인 기습에 놀라 당황하면서도 결코 녹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쪽이 선수를 쳐 공격해 오고, 반대쪽은 수세에 몰린 방어 위주의 반격이라 승패는 이미 ‘뻔할 뻔 자’였다.
초군이 크게 수세에 몰려 무너지기 시작하자, 마침내 초장 항연은 왕전을 상대로 장수끼리 1 : 1의 싸움으로 승부를 거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항연은 대장기를 들고 있는 왕전을 향하여 말을 달려 나갔다.
10합, 20합, 30합... 항연과 왕전은 불꽃 튀는 창검 대결로 서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가 진장 왕전은 거친 숨을 헐떡이며 말머리를 돌려 쫓기는 체 후퇴하기 시작하는데, 항연은 승부는 바로 이때다 하고,
“네 놈이 도망을 가면 어디까지 가느냐?”
하며, 말에 채찍을 가하여 쫓아가 왕전을 장창으로 찌르려는 순간 왕전이 날쌔게 몸을 숙여 옆으로 피하면서 장검으로 항연의 가슴을 가르니 항연은 왕전의 불의의 일격에 피를 쏟으며 말 위에서 땅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백전노장 왕전의 허허실실전법(虛虛實實戰法, 거짓 쫓김)에 속아서 초의 명장 항연이 어이없게도 속절없이 순식간에 전사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자 왕전이 초군을 향하여 크게 외쳤다.
“너희들의 대장군 항연은 이미 내 손에 죽었다. 그러나 너희들은 항복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니 모든 초군(楚軍) 장졸들은 무기를 버리고 깨끗이 항복하라.”
하고 외치니 초군들은 크게 경악하였다.
그러나 항복이란 군인으로서 가장 치욕적인 굴복이었기에 곧바로 항복할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왕전은 일찍이 패장들의 그러한 심리를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다시 한 번 큰소리로 외친다.
“패전의 책임은 오로지 최고 지휘관에게만 있다. 모든 장졸이 함께 책임질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귀중한 목숨을 헛되이 버리지 말고, 모두들 무기를 버리고 목숨을 보존하라. 누구든지 항복하는 자는 곧바로 집으로 돌려보내 사랑하는 부모처자를 만나도록 해주겠다.”
왕전의 이 같은 제안은 모든 초군에게 큰 동요를 일으켰다.
그러자 초군 장수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더니 한 장수가 창검을 내던지며 말에서 뛰어내려 왕전 앞에 엎드리자, 그 뒤로는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칼과 창을 버리고 왕전 앞에 무릎을 꿇는다.
문자 그대로 말할 필요도 없는 ‘무조건 항복’이었으니 왕전은 그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그대들은 전쟁에는 졌으나 내 어찌 그대들을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그대들을 약속대로 곧 고향으로 가게 해주겠소.”
그러자 창검을 버리고 항복한 초군 장졸들은 왕전을 우러러보며,
“저희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신 장군님, 만수무강하시옵소서.”
하며, 땅바닥에 엎드려 왕전을 향하여 연이어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이렇게 왕전은 후방으로 공격해 오던 초군의 뒷수습을 깨끗이 마무리하고 형주성으로 달려가니 형주성에서는 부장 몽선이 이미 성을 장악한 후 백성들에 대한 선무 공작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었다.
“초왕 부추(負芻)는 어찌 되었는가?”
왕전의 질문에 몽선이 대답했다.
“마충의 군사들을 괴멸시키고, 형주성으로 들어오자마자, 초왕 부추를 잡아 즉석에서 참수(斬首)해 버렸습니다.”
“수고했네. 이로써 초는 완전히 진멸(盡滅)되었구나!”
이로써 전국칠웅 중 강대국으로 자처해 오던 초나라는 건국한 지 41대 892년 만에 진나라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다.
왕전이 마침내 초를 정복한 후 초를 ‘초군(楚郡)’으로 개칭하여 몽선으로 하여금 ‘초군’을 지키게 한 후 자신은 나머지 군사들을 거느리고 함양으로 귀환한다.
그리고 진왕에게 승전 보고를 올리며,
“소장이 대왕의 명을 받들어 초를 정벌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제 대왕께서는 노신의 소원대로 장원을 하나 하사해 주시옵소서.”
하며, 출전에 앞서 소망했던 소원을 다시 아뢴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의구심을 사지 않기 위한 묘책이었다.
진왕은 왕전의 전공을 크게 치하하며,
“장군이 아니었으면 저 강한 초를 어찌 이처럼 쉽게 정복할 수가 있었겠소. 장군의 노력으로 천하통일의 대업이 성큼 눈앞에 다가온 셈이오. 장군의 소원대로 장원을 하사할 뿐만 아니라, 특별히 후작(侯爵)으로 봉(封)하여 국가 최고의 원로로 대우하겠소이다.”
이리하여 왕전은 진왕으로부터 어떤 의심이나 견제도 받지 않고, 안락한 노후를 보내게 된다.
※ 미래를 바라보는 왕전의 처세술은 난세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 제 25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