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21화

2021. 3. 25. 08:01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21화

☞ 형가, 진왕(秦王) 암살에 실패하다.

태자 단우와 태부 국무가 전광 선생을 찾아갔을 때, 전광 선생이 번어기 장군의 망명을 받아들이라고 한 것은 오늘과 같은 일을 미리 예상한 때문이었을까?
또한 번어기 장군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을 미리 예상하고, 형가에게 대임을 맡으라고 권유하였을까?

형가는 스승의 예지력에 감탄하며 번어기 장군과의 대화 내용을 태자 단우에게 전달하였다. 상세한 전말을 전해 들은 태자는 크게 놀라며 슬퍼하였다.

다음 날 아침 태자는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번어기 장군의 머리 없는 시신(屍身)을 수습하여 정중하게 장사를 치러주었다.
그러고 난 후 번어기 장군의 수급을 비단 보자기에 몇 겹으로 싼 다음 예리한 비수 한 자루를 형가에게 내주며 말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다 되었으니 바로 행차해주십시오. 그리고 내 수하에 진무양(秦舞陽)이라는 칼을 잘 쓰는 소년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를 데리고 가셔서 그 아이로 하여금 진왕을 죽이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무양이라는 소년은 어떤 소년입니까?”
“이를테면, 소년 깡패의 두목쯤 되는 아이인데, 싸움도 잘하거니와 사람 죽이는 것을 파리 죽이듯 하는 아이입니다.”
“이런 일에는 지혜와 담력이 필요한데, 사람 잘 죽이는 재주만 가지고는 안 되옵니다. 제가 혼자 갈 테니 진무양은 따라오지 말게 해주시옵소서.”
“선생은 선물만 바치고, 진왕을 죽이는 것은 그 아이에게 맡겨야 제 마음이 놓이겠습니다. 그러니 꼭 데리고 떠나 주소서.”
형가는 왠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태자의 권고가 하도 간곡하기에 진무양을 데리고 떠나기로 하였다.

며칠 후 형가는 진나라 국도(國都) 함양에 도착하여 진왕의 총신(寵臣, 총애 받는 신하) 몽가(夢嘉)를 만나 진왕에게 드릴 폐백(번어기의 수급과 독항 지방의 지도)를 내보이며, 진왕을 직접 만나 뵐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몽가는 번어기의 머리를 확인해보고, 크게 기뻐하며 묻는다.

“당신은 어떤 연유로 번어기의 수급을 가지고 오게 되었소?”
형가가 대답하기를,

“연왕은 평소에 진왕 전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계시옵니다. 그러므로 진왕께서 저희 연나라를 형식적인 독립국가로 인정만 해주신다면 기꺼이 진왕 전하의 번신(藩臣)이 될 생각을 하고 계시옵니다. 그런데 때마침 번어기가 진왕 전하를 배반하고 우리나라로 도망쳐 왔던바, 연왕은 그의 배신행위를 내심으로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던 차 기회가 닿아 그를 잡아들여 목을 베어주시면서 진왕 전하께 갖다 바치라고 하셔서 제가 이처럼 가지고 왔사옵니다.”
“당신이 이런 귀중한 선물을 가지고 왔으므로 대왕 전하께서는 연왕의 충심을 매우 기쁘게 여기실 것이오. 그러면 내가 이 선물을 대왕전에 곧 갖다 바치겠소.”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
“왜 안 되겠다는 말이오?”
“연왕께서 저에게 분부하시기를 이 선물은 제가 직접 진왕 전하께 바치도록 하라는 신신당부를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귀중한 선물을 중간에 사람을 통하여 바쳤다가 혹시 잘못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인 것으로 아옵니다.”
몽가는 그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워낙 귀중한 선물이기 때문에 직접 바치고 싶어 하는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겠소이다. 그러면 대왕전에 여쭈어 내일 아침에 당신이 대왕전에 이 선물을 직접 바칠 수 있도록 주선해 보리다.”
다음 날 아침 형가는 몽가의 인도를 받으며 진무양(秦舞陽)과 함께 함양궁으로 입궐하였다.

진나라의 대궐에 들어가려면 삼엄한 경계가 펼쳐지고 있는 궁문(宮門)을 다섯 개나 통과해야 했다.
소년 진무양은 궁문을 통과할 때마다 겁에 질려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이 녀석아! 떨지 마라. 이상한 눈치를 보이면 큰일 난다.”
형가는 진무양에게 귀엣말로 조용히 타일렀다.

이윽고 마지막 중문을 들어서니, 진왕은 저 멀리 정전(正殿) 용상(龍床) 위에 위엄을 갖춰 앉아 있었고, 돌층계 아래 좌우에는 중신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형가와 진무양은 돌층계 아래에 미리 깔아 놓은 돗자리까지 나아가 진왕 앞에 고두숙배(叩頭肅拜)하니, 진왕은 두 사람을 굽어보며 근엄한 음성으로 말한다.
※ 註) 고두숙배(叩頭肅拜) : 이마를 바닥에 소리 나게 찧으며 왕에게 절을 올리는 예법.
슬프게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태종(淸太宗)에게 항복 의식을 할 때도 이 의식을 행하였음을 기억하고, 교훈삼아야 할 것이다.

“연왕 희(喜)가 나에게 좋은 선물을 보내왔다고 들었는데, 풀어보시오.”
형가는 번어기 장군의 수급이 들어 있는 나무 상자를 두 손으로 받들고 층계를 올라가 진왕에게 바쳤다.
진왕은 상자 뚜껑을 손수 열어 번어기의 수급을 친히 검사해 보더니 흔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음... 번어기의 수급이 틀림없구먼!”
그리고 이번에는 좌우의 중신들을 굽어보며 말했다.

“배신자의 말로는 이렇게 비참하다는 사실을 경들도 깊이 인식해주기 바라오.”
그리고 형가를 다시 보면서 물었다.

“선물이 하나 더 있다고 하던데, 그것은 무엇이오?”
또 하나의 선물이란 독항 지방의 지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저 소년이 올려 드릴 것이옵니다. 무양아! 네가 들고 있는 선물 상자를 대왕전에 바쳐라.”
진무양이 들고 있는 상자 속에는 태자 단우가 하사한 비수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진무양이 그 상자를 들고 진왕 면전으로 올라가면서 전신을 와들와들 떠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고 중신들이 모두 수상하게 여기자 형가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시골뜨기 어린애가 어마어마한 대궐에 들어오니까 겁에 질려 온몸을 떠나봅니다. 너 대신에 내가 대왕전에 선물을 바치겠으니 그 상자를 이리 가져오너라.”
형가는 비수가 든 상자를 진왕 앞으로 들고 올라와,

“독항 지방의 지도는 이 상자 속에 들어 있사옵니다. 지도가 보자기로 여러 겹 싸여 있사오니 대왕께오서 친히 풀어보시옵소서.”
진왕이 겹겹이 싸여 있는 보자기를 하나씩 끌러보니, 그 안에는 서슬 퍼런 비수가 한 자루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형가는 오른손으로 비수를 움켜잡고, 왼손으로는 진왕의 옷소매를 다그쳐 잡으며 그의 가슴에 비수를 내리 찔렀다.
그러나 진왕은 원래 무술이 능한 자라 기겁하여 놀라 몸을 피하는 바람에 옷소매만 잘리고 몸은 재빠르게 피했다.

형가는 비수를 움켜잡고 도망가는 진왕을 재빠르게 쫓아갔다.
진왕은 기둥을 둘러싸고 몸을 피하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장검을 뽑아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검이 워낙 길어서 빠져나오지를 않았다. 형가는 비수를 꼬나들고 진왕을 쫒고, 진왕은 기둥을 둘러싸고 쫓겼다.
군신들은 너무도 뜻밖의 상황에 어쩔 줄을 모르고 허둥댔다.

진나라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궁중에 들어올 때에는 무기를 몸에 지니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대왕의 호위 무사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은 궁문 밖에 있었고, 너무도 순식간에 일이 일어나다 보니 밖에 있는 호위 무사들을 불러들일 경황이 없었다.

쫓고 쫓기는 숨 가쁜 추격전이 계속되는 동안 시의(侍醫) 하무차(夏無且)가 허리에 차고 있던 약주머니로 형가의 얼굴을 내리갈겼다. 그리하여 형가가 잠시 비틀거리는 순간 누군가가 소리쳤다.

“대왕이시여! 검 집을 등에 둘러메고 칼을 뽑으시옵소서.”
진왕은 그제서야 몸을 피해가며 검 집을 등에 둘러메고 칼을 뽑으니, 검신(劍身)이 쑤욱 뽑혀 나오는 것이었다.

진왕은 검을 뽑자마자 형가를 내리쳤다.
피하던 형가는 왼쪽 다리가 잘리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는 쓰러지면서 진왕의 가슴을 향하여 힘차게 비수를 던졌다. 그러나 비수는 날래게 피하는 진왕을 스쳐 기둥에 박혔다.

그러자 진왕은 형가에게 덤벼들어 장검(長劍)으로 닥치는 대로 내리치고 찔러댔다.
형가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절규하였다.

“아아, 슬프다! 네놈을 단숨에 찔러 죽일 수가 있었는데, 천운이 따르지 않는구나!”
“"이놈이 아직도 아가리를 놀려?”
진왕은 괴성을 지르며, 형가의 몸을 난도질했다.

그러나 형가는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큰소리로 외쳤다.
“네놈이 나를 죽여도, 내 정신만은 죽이지 못할 것이다.”

- 제 2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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