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20화
2021. 3. 24. 07:38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20화
☞자객(刺客) 형가(荊軻)와 의인(義人) 번어기(樊於期) 장군
나라가 잘 되려면 충신이 많아야 한다. 진나라에는 명장들이 수없이 많았는데, 그들 모두가 하나 같이 참된 충신이어서 진(秦)이 절대강국(絶對强國)이 된 것도 그들의 충성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중에 강골(强骨)한 사람만은 진왕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그는 명장 번어기(樊於期) 장군이었다. 번어기 장군은 성품이 강직하기 이를 데 없는 대쪽 같이 곧은 무장(武將)인지라 평소에도
‘아무리 대왕의 명이라 하여도 무조건 복종할 수는 없다. 시시비비를 가림 없이 무조건 복종만 한다는 것은 나라를 위해서나 대왕을 위해서 결코 잘하는 일이 아니다.’
라면서 자신의 신념(信念)을 결코 굽히려 하지 않았다.
평소에 이처럼 신념이 대쪽 같은 무장인 까닭에 진왕이 조나라를 점령하고 나서 선왕의 원수를 갚는다며 무려 3만 명이나 되는 백성을 토갱(土坑) 속에 생매장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했다.
“나라만 평정했으면 그만이지, 백성들이 무슨 큰 죄를 지었다고 3만 명씩이나 생매장을 한단 말인가? 이것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내 어찌 이처럼 잔학무도(殘虐無道)한 사람의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분노한 번어기 장군은 결국 연나라로 망명한다.
그 당시 진나라와 연나라의 관계는 몹시 나빴기 때문에, 번어기는 연나라로 망명을 했던 것이다.
진왕은 번어기 장군이 자기를 배반하고 연나라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길길이 뛰며 분노하였다.
한편, 연나라에서는 진나라 장군 번어기가 망명해 온 것을 놓고,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였다.
태자 단우(丹又)가 번어기의 망명을 수용하고자 하자, 태부(太傅) 국무(鞠武)가 정면으로 반대하며 말했다.
“우리가 가뜩이나 진과 사이가 좋지 않은데, 번어기의 망명을 받아들이면 두 나라의 관계가 더욱 험악해질 것이옵니다.”
그러자 태자 단우가 즉각 답한다.
“나도 그 점을 모르는 바가 아니오. 그러나 우리를 믿고 망명해온 사람을 쫓아낼 수는 없는 일이 아니오? 우리는 진을 치고 싶어도 힘이 부족해 참고 있는 형편이지만, 그렇다고 진왕이 싫어서 망명해 온 사람조차 받아들이지 못할 것은 없지 않겠소?”
국무가 심사숙고 후 말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전광선생(田光先生)과 의논하여 결정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전광선생이란 연나라에서 가장 존경 받고 있는 늙은 처사(處士)였다.
“그러면 우리 두 사람이 전광선생을 함께 찾아뵙고 상의해 보도록 합시다.”
태자 단우는 태부 국무와 함께 깊은 산속에 칩거 중인 전광선생을 찾아갔다.
전광선생은 90이 다 되어 뼈와 가죽만 남은 글자 그대로 피골이 상접(相接)한 노인이었다.
그는 두 사람을 움막 같은 자신의 거처로 정중하게 맞아들이며 묻는다.
“존귀하신 태자께서 어찌 이 누옥(陋屋)을 몸소 찾아주셨습니까?”
그렇게 물어보는 전광선생의 눈에서는 푸른 광채가 넘쳐나고 있었다.
태자 단우는 전광 선생을 찾아오게 된 연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나서,
“번어기 장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 선생의 고견을 듣고자 합니다.”
하고 말했다.
전광 선생은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기력이 왕성할 때에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준마(駿馬)도 기력이 쇠약해지면 하루에 백 리밖에 못 달리는 노마(駑馬)에게 오히려 뒤진다는 말이 있사옵니다. 미수(米壽, 88세)를 눈앞에 둔 소인에게 무슨 좋은 생각이 있으리라고 이 먼 곳까지 귀하신 걸음을 하셨사옵니까?”
“겸손하신 말씀이십니다. 부디 좋은 지혜를 가르쳐 주소서.”
이에 전광선생은 오랫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며 말한다.
“번어기 장군이 우리를 믿고 망명해 왔다면 우리로서는 응당 받아들여야 옳을 줄로 아옵니다. 그러한 신의도 없다면 어찌 나라를 지탱해 나갈 수 있사오리까? 아울러 진의 야욕(野慾)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도 강구하심이 옳은 줄로 아옵니다.”
“고마우신 말씀, 번어기 장군 문제와 함께 진의 야욕을 꺾을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어떤 것이옵니까?”
“지금 천하의 대세를 보옵건대, 우리나라와 진나라는 도저히 공존(共存)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사옵니다. 천하를 통일하려는 진왕의 야망은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데다 그는 이미 한과 조까지 정복했으므로 다음은 우리나라가 표적(標的)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하옵니다.”
태자 단우는 전광선생의 말에 심각해졌다.
“선생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러니 이 문제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전광 선생은 조용히 입을 열어 다시 말한다.
“진왕은 워낙 야망이 크고 포악하기 때문에 그를 이대로 두면 언젠가는 우리도 그의 손에 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를 지켜가려면 자객을 보내서라도 우리 손으로 그를 처치해야 할 것입니다.”
태자 단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생의 고견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저 역시 자객(刺客)을 보내 진왕을 죽여 없앴으면 좋겠습니다. 혹시 선생께서 아시는 분 중에 그런 임무를 맡아줄 만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저의 제자 중에 형가(荊軻)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는 40이 채 안 되었지만, 학식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검술(劍術)도 매우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자객으로 쓰시면 능히 임무를 감당해 낼 수 있을 것이옵니다.”
“제가 직접 만나서 부탁하기보다 선생께서 말씀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일에 어찌 수고를 아끼오리까?”
이리하여 전광선생은 자객 선정의 중책을 직접 맡고 나섰다.
태자 단우는 작별인사를 하고 궁으로 돌아가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전광선생을 다시 찾아왔다.
전광 선생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태자께서는 무슨 일로 되돌아오셨습니까?”
“제가 부탁드려야 할 말씀을 깜빡 잊어버리고 갔기 때문에 다시 돌아왔습니다,”
“무슨 부탁이시온데?”
“선생께서도 아시다시피 이번 일은 국가의 중대한 기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선생과 의논 한 일은 누구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시기를 부탁드리옵니다.”
태자 단우의 말에 전광선생은 순간 불쾌한 얼굴을 비치는가 싶더니 이내 담담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그 점은 염려 마시옵소서. 국가의 존망을 가늠하는 중요한 일을 어찌 함부로 남에게 말하겠습니까?”
태자가 다시 작별 인사를 고하고 돌아가자, 전광선생은 사람을 시켜 ‘형가’를 불러다 말한다.
“태자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나라를 지켜나가려면 진왕을 죽여 없애 버려야 하겠는데, 그 임무를 맡아 줄 사람이 없다고 하시기에 내가 자네를 천거했네. 자네가 나라를 위해 그 일을 맡아 줄 수 있겠는가?”
형가는 즉석에서,
“선생께서 저를 천거해 주셨다면 저는 다시없는 영광으로 알고 자객의 임무를 맡기로 하겠습니다.”
“고맙네. 그러면 근일 중에 자네가 태자를 직접 찾아가 만나 뵙도록 하게. 나는 오늘로써 중대한 내 임무를 다했기에 목숨을 끊어버릴 생각이니까, 자네는 태자를 만나 뵙거든 내가 죽었다는 소식도 함께 전해 주시게.”
형가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선생께서 오늘로 돌아가시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전광 선생은 담담한 어조로 조용히 말을 잇는다.
“태자께서 나와 작별을 하고 돌아가시다가 다시 나를 찾아오시더니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당부를 하셨네. 그것은 태자께서 나를 믿지 못하고 계시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니 나는 의심 받을 것을 막음과 동시에 비밀을 영원히 감추기 위해서 오늘부로 나의 생을 마감할 생각이네.”
“그것은 태자의 잘못이지 선생님의 잘못이 아니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도록 하소서.”
“내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자네는 중책이나 충실히 완수해주게.”
그날 밤 전광선생은 기어코 자결을 하고 말았다.
※ 이쯤에서 떠오르는 고사(故事) 하나!
때는 춘추시대, 진시황 시대보다 250여 년 전 천하의 명장이자 책사인 오자서(伍子胥)가 아버지와 형을 죽인 초나라를 피하여 도피 중 강을 건너는데, 강을 건너고 나서 자신을 존경한다는 뱃사공에게 자기를 보았다는 얘기를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하자, 그 말을 들은 뱃사공은 슬픈 얼굴로 그 자리에서 할복자살(割腹自殺)로 생을 마감했다는 옛 이야기.
- 제 21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