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130화
2020. 12. 19. 09:44ㆍ김삿갓 방랑기
★ 시인 김삿갓 방랑기 130화
[김삿갓 환영연으로 변한 회갑 잔치]
임진사가 누구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알고 묻는 바람에 김삿갓은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제가 ‘김삿갓’으로 불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유명하다는 말씀은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임진사는 어쩔 줄 모르도록 기뻐하면서 감격에 찬 소리로 말을 한다.
“선생을 이런 자리에서 만나 뵐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오늘같이 기쁜 날 선생께서 이런 자리에 나타나시게 된 것은 하늘이 나에게 내려 주신 또 하나의 축복입니다.”
임진사가 자신을 알아보고 너무도 기뻐하므로 김삿갓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진사 어른께서는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시옵니까?”
“무슨 말씀을! 시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선생의 함자를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소이까? 나는 수년 전에 금강산 구경을 갔다가 그곳을 먼저 다녀가신 김삿갓 선생의 말씀을 너무도 많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선생을 한 번 만나 뵙는 것이 나의 소원이었는데, 이렇게 나의 환갑잔치에 우연히 왕림해 주실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그러면서 가족들을 김삿갓에게 일일이 소개하고 나서 김삿갓에게 술잔을 직접 건네주며 말한다.
“선생이 나에게 축배를 주셨으니 나도 선생께 반배(返盃)를 올리겠소이다.”
“고맙습니다. 이 잔을 영광스럽게 받겠습니다.”
“무슨 말씀을! 영광스러운 사람은 오히려 나 자신이올시다.”
김삿갓이 어떤 위인인 줄 모르는 축하객들은 임진사가 거지행색을 하고 나타난 김삿갓을 귀객으로 환대하는 광경을 모두 경악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임진사는 주위를 둘러보며,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 어른은 우리나라의 시선(詩仙)이신 김삿갓 선생이시라오. 오늘 이 자리에 이 어른을 모시게 된 것은 나의 다시없는 영광이오.”
하고 소개하며, 또다시 술잔을 건네는 것이었다.
임진사의 회갑잔치는 김삿갓이 나타남으로써 졸지에 김삿갓을 위한 환영연으로 둔갑한 느낌이었다.
김삿갓은 매우 계면쩍어 자리에서 일어서며,
“시생은 술을 마실 만큼 마셨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고 꽁무니를 빼려고 하자, 임진사는 한사코 손목을 붙잡고 늘어진다.
“선생이 오시기는 맘대로 오셨지만 가시는 것만은 맘대로 못 가시옵니다. 선생께 부탁드릴 일이 있사오니 꼭 들어 주십시오.”
김삿갓은 부탁이라는 소리에 어리둥절하였다.
“저에게 무슨 부탁이 계시다는 말씀입니까?”
“선생도 보셨다시피, 이 자리는 우리 집안에서는 다시없는 기쁜 자리올시다. 이 자리에 선생이 참석해주신 것을 두고두고 기념하고 싶사오니 선생은 이 자리에서 자작시 한 편만 친필휘호(親筆揮毫)를 해주시옵소서. 그러면 우리 가문에서는 대대로 물려가며 가보로 삼겠습니다.”
“시생의 글씨를 가보로 삼으시다뇨.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김삿갓은 지금까지 수많은 즉흥시를 읊어 왔지만, 누구한테 부탁을 받고 지은 시가 아니라 그때그때 흥에 겨워 아무렇게나 읊어댔던 것이다.
그러려니 남의 부탁을 받고 휘호를 해 준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임 진사는 간곡히 부탁을 하며, 사람을 시켜 지필묵(紙筆墨)까지 갖다 놓게 하는 것이 아닌가.
‘동여 놓고 치는 매는 피할 수 없다’고 했던가.
사태가 이쯤 되고 보니 이제는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면 제 글씨가 서툴기는 하지만 시를 한 수 써보기로 하겠습니다.”
김삿갓은 그렇게 말하며 붓을 들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도 없이 붓을 들었기 때문에 어떤 시를 써야 할지 지극히 막막하였다.
당연히 수연을 축하하는 시를 써야 하겠지만 창졸간에 당하는 일이어서 시상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었다.
손에 붓을 든 김삿갓이 눈을 들어 사허정 아래를 굽어보니 능라도의 푸른 버드나무 숲과 하얀 모래밭이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모래는 햇볕에 반짝반짝 빛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붓을 든 김삿갓의 손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可憐江浦望(가련강포망)
明沙十里連(명사십리연)
令人個個拾(영인개개습)
其數父母年(기수부모년)
(해설)
저 멀리 강포 풍경 아름다워라.
고운 모래가 십 리나 이어져 있네.
그 모래 하나하나 모두 주워다 놓고,
양친부모 그만큼 수를 누리게 하소서.
아무 생각도 없이 모래사장을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에 즉흥적으로 써 내려간 시였다.
이것을 지켜보던 어떤 하객은 너무도 놀라워,
“야아, 시 한 편을 눈 깜빡할 사이에 쓰다니 과연 시선이 틀림없구나!”
하고 감탄하는가 하면, 또 어떤 하객은,
“시도 좋지만 글씨가 또한 명필일세 그려!”
하고 맞장구를 쳐 보인다.
임진사는 휘호를 한 폭 받고 나자 춤을 출 듯이 기뻐하며 옆에 있는 자식들에게 명령한다.
“얘들아! 이런 귀한 선물을 받고 그냥 돌아가시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어른을 우리 집 별당으로 모시게 하여라.”
- 131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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