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

2020. 9. 28. 08:36김삿갓 방랑기


★시인 김삿갓 방랑기 049화

[귀향(歸鄕) 길]

이튿날부터 김삿갓은 모든 것을 다 잊고 고향에나 갈 결심을 굳게 하였다.
옛날 걸어온 그 길을 부지런히 걸어 보름 만에 강원도 땅을 밟았다.
가을도 깊어 이제는 조석으로 찬 서리가 내려 겨울을 재촉하는 무렵이었다.

늦은 가을 고향 산천은 이미 낙엽이 지고 오곡을 거두어들인 전답은 황량하기만 했다.
삿갓은 며칠을 더 걸어 영월 땅 고향 마을에 당도했다.
벌써 해는 지고 황혼이 깔린 뒤라 아무도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삿갓은 금의환향을 하는 게 아니어서 차라리 해가 져 어두운 것에 마음이 편했다.

삿갓은 초라한 초가집 사립문을 가만히 밀고 들어섰다.
집은 4 년 전 떠날 때 보다 더 낡고 쓸쓸해 보였다.

“어머니!”
마음은 크게 불러야 하겠다고 시켰지만 정작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는 모기소리보다 작게 나오고 말았다.
부엌 쪽에서는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들리는데 아내는 지금쯤 설거지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어머니!”
이번에는 조금 힘을 주어 불렀다.
그러자 부엌에 있던 아내가 주발 하나를 든 채,

“누구세요?”하고 다가선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음성이었다.

“나요, 나. 그동안 잘 있었소?”
“에그머니나!”
아내는 4 년 만에 만나는 남편을 보고 이렇게 외마디 소리만 칠뿐 장승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래 어머니는 안녕하시오?”
“.....네.”
아내는 겨우 그렇게 대답하고 그때서야 앞장서 방으로 들어가서 등잔불을 댕겼다.
불빛에 언뜻 보이는 아내의 모습은 그동안 너무도 많은 고생을 한 탓인지 더 초라하고 볕에 그을린 검은 피부에 야위어 있었다.

“어머니는 어디 가셨소?”
“동네 내려가셨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아내의 음성은 울음이 섞인 목멘 소리였다.
삿갓도 눈시울이 붉어져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불현듯 형님 내외가 생각나 물었다.

“형님은 어디 가셨소?”
“...돌아가셨어요, 그만...”
아내는 북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한 채 그렇게 말하고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뭐... 형님이?”
삿갓은 너무도 의외였다.
어려서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 형이었다.
역시 허약한 탓으로 작년 봄에 세상을 떠났다고 아내는 말을 이었다.

더욱이 불쌍한 것은 형수였다.
시집 온지 3 년 만에 아무 소산 없이 남편이 건강해지면 오겠다고 친정에 가서는 결국 청상과부가 된 것이 아닌가.
삿갓은 방에 앉지도 못한 채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에 어쩔 줄 몰랐다.

“앉으세요. 제가 동네에 가서 어머니랑 익균이를 데리고 올게요.”
“익균이가 누구요?”
“참 모르시겠네요. 당신 아들이지 누구예요?”
“아~ 참 그렇던가?”
삿갓은 아들의 이름을 알리가 없었다.
아내가 뱃속에 아이를 품고 있을 때 집을 떠났으니...

“돌아가신 큰아버지가 지어 주셨어요. 날개 익(翼) 자를 써서 익균(翼均)이라고요.”
“...이름도 괜찮군.”
그때 마침 어머니가 마을에서 돌아와 방에서의 인기척을 듣고 물었다.

“누가 왔냐?”
그러면서 문을 연 노인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들을 희미한 불빛에서 보자, 다시 한 번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놀라 눈이 둥그레지며,

“아니? 네가....”
하고 말을 잊지 못하고 흐느껴 울었다.

“어머니, 불효자식이 이제야 왔습니다.”
삿갓은 절을 넙죽하면서 죄스런 마음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래 어디를 다녔기에 그동안 소식이 없었니? 네 형은 그만...”
노인은 말을 더는 못하고 다시 울음이 터졌다.
삿갓도 다시 눈물을 글썽이며,

“어머니 뵈올 낯이 없습니다.”하고 무릎을 꿇었다.

“그래, 몸 성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다만 원 사람이 그렇게 무심할 수 있느냐?”
“.....”
삿갓은 달리 말을 할 수 없었다.

“어서 저녁 차려라!”
아직도 우두커니 서 있는 며느리에게 다소 마음을 진정한 노인이 이르면서,

“참, 익균아. 네 아비다, 절해야지.”
하고 어깨너머에 영문 모르고 서 있는 손자를 앞으로 끌어 세웠다.
삿갓은 그제야 아이를 보았다.

“그래, 네가 익균이구나.”
희미한 등잔불 아래 자기 모습을 닮은 사내놈이 토실토실 살이 올라 귀엽게 보였다.

“자, 네 애비라니까, 절 좀 하라니까?...”
하지만 처음 보는 낯선 사람에게 절을 하라니까 꼬마가 달갑게 절을 할 리 없었다.
아이는 금방 울상이 되며 할머니 품을 파고들며 울음을 터뜨린다.

“오냐! 그만둬라. 원~ 아비도 모르고...”
“애가 네 살 되었나요?”
“그렇지. 만 4 년이 다 되었구나.”
모자간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았다.

삿갓도 금강산으로 해서 안변, 문천, 함흥, 단천을 거쳐 길주, 명천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대강의 경로를 말씀드렸다.
아내는 서둘러 저녁상을 차려들고 왔으나 가난한 집에 반찬인들 별스러운 게 있을 리 없다.

“내일은 닭 한 마리 잡자!”
어머니는 쓸쓸한 얼굴로 말하며, 그래도 돌아온 아들이 대견했던지 자꾸 넘겨다보았다.

얼마 후 밤이 이슥해서야 삿갓은 사 년만 에 아내와 나란히 누웠다.
자연히 아내의 입에서는 원망의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원 세상에... 그렇게 소식도 없이 나가 돌아다니는 양반이 어디 있어요?”
“그러게나 말이오. 할 말이 없구려.”
“저는 영 안 돌아오시는 것 아닌가 걱정되어 밤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허~ 산 사람이 안 올 리야 있겠소.”
“정말 이 어린 것만 없었더라면...”
“오~ 왜 어린 것만 없었더라면 개가라도 하려고 그랬나?”
“아유 무슨 말씀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세요.”
“그럼.”
“정말 목이라도 매고 죽어버리려고 했지 뭐예요!”
“허허, 그래? 그러니 다 삼신할머니가 당신을 살리려고 아들을 보내신 것 아닌가?”
“그래 어딜 그렇게 다니셨어요?”
“참 많이도 다녔지. 금강산으로 함경도로...”
“이제 다시는 안 떠나시죠?”
“글쎄 두고 봐야지.”
“또 나가시게요?”
“허허... 다음번에도 나갈 양이면 또 아들이나 하나 심어주고 나가든지 허지!”
“아유 그럼 이번에는 저도 따라 나설래요.”
“허어.. 아녀자가 그런 소리, 그만하고 잡시다.”
“잠이 와요? 그동안 익균이 놈이 왜 난 아버지가 없느냐고 물을 때는 얼마나 난감했는지 알아요?”
아내는 돌아누워서 다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삿갓은 난처했다.
그러면서 아내를 달랠 방법이 묘연했다.

“허어~ 이젠 그만 좀 하오. 낸들 그러구 싶어서 돌아다니다 왔겠소?”
아내도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
그때서야 삿갓은 아내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워낙 오랜만에 남편의 손이 닿자 아내는 처녀처럼 몸을 떨기까지 했다.
그런대로 아내의 몸은 포동포동 했다.

“당신 객지를 나다니며 외도도 많았겠지요?”
아내는 몸을 허락하면서도 한 마디 했다.
삿갓은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아내의 말에 순순히 대답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허... 무전에 걸식을 하는 놈이 외도는 무슨 외도를 했겠소? 괜한 소리를 하는구먼!”
“......”
약한 게 여자의 마음이라.

무전걸식이라는 삿갓의 말에 아내는 이렇다 할 대꾸를 못한 채 방법조차 잊어버린 것 같은 부부간의 이불속 행사가 낯선 듯 남편의 몸을 꼭 쥐고 부르르 떨기만 하였다.

그렇게 4 년 만에 만난 부부의 분홍빛 밤은 깊어만 갔다.

- 05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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