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 46화

2020. 9. 25. 08:39김삿갓 방랑기


★ 시인 김삿갓 방랑기 046화

[과년한 시인 곱단이]

“원 별말씀을~ 죄송합니다. 함부로 최선생의 시를 왈가왈부 해서...”
김삿갓은 자기의 시를 고쳤음에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오히려 고마워하는 이 선비가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헌데 김선생, 내가 듣던 것보다 훨씬 젊어 보이는데, 성혼은 하셨는지요?”
“예, 성혼은 했습니다만 선생께선 저보다 연세가 높으신 것 같으니 말씀을 낮추시지요.”
“허~ 천만에요. 내가 아직은 사십이 못 되었는데, 선생 같은 시객에게 그럴 수야 없지요.”
하며 그 역시 겸양의 말을 했다.
이렇듯 두 사람이 잠시 세상일을 잊고 아름다운 단천 변에 앉아 시와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도 주고받고 있었다.

“김선생, 다 있는데 술이 없구려.”
“허허, 최선생 술은 없지만 물은 맘껏 있소이다!”
김삿갓의 이 말에 최백호는 호쾌하게 웃었다.

“그런데요, 최선생. 선생은 이 마을에서 무얼로 소일을 하시오?”
“하하, 나야 감농(監農)이나 하며 이렇게 가끔 산수간에 나와 풍월이나 읊조리며 살고 있지요.”
“역시 고매하신 분입니다.”
“김선생, 오늘은 어디로 가실 작정입니까?”
“저야 뭐 일정한 여로가 없습니다. 그저 오늘은 이 강물이나 따라 내려가 볼까 합니다.”
“참, 풍류객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강물을 따라가시면 바다밖에는 없습니다.”
“허, 그렇습니까?”
“김선생, 오늘은 딴생각 마시고 우리 집에 가십시다. 우리 사랑방에서 며칠 묵으시면서 근동에 글 좀 하는 시객들을 모아 풍월도 즐기시면 좋을 것입니다. 내 꽤 너른 농사를 지어 의식주 걱정은 없는 터라 김선생이 여러 날 계시더라도 소찬에 밥을 대접할 수 있으니 사양치 마시기 바랍니다.”
“글쎄올시다. 저야 떠도는 몸이니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댁에 폐가 될 듯하여...”
“허허, 자 갑시다. 가셔서 저녁이나 들고 우선 한 잔씩 합시다.”

김삿갓은 최백호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최백호의 집은 과연 선비의 집이요 풍류객의 집이었다.
깨끗한 기와집의 네 귀에는 풍경을 달았고 아름드리 기둥에는 좋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사랑채에 안내된 김삿갓은 대청마루 책장에 꽂혀있는 고금의 진서(珍書)가 즐비한 것에 놀랐고, 이어 나온 주안상의 정갈한 솜씨에 안주인도 바깥 선비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자, 한 잔 하십시다.”
“네, 고맙습니다.”
이렇게 김삿갓은 최백호의 사랑에 열흘 가까이 머물면서 시름을 잊고 시문을 나누며 기거하게 되자 금강산과 안변, 문천과 함흥 일대 등 그가 거쳐 지나왔던 곳에서의 소문이 온 동네를 휩쓸고 있었다.

그때 마침 그 마을에는 과년한 규수 시인 하나가 살았으니 이름은 곱단이라 하였다.
곱단의 어머니는 옛날 함흥의 관기로 있다가 이 마을 김진사의 첩실이 되어 단천에 와서 살게 되었는데, 지금은 김진사도 죽고 그가 남겨준 농사땅을 도지(賭只)를 주고 비교적 넉넉하게 살면서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 침선으로 소일하며 살고 있었다.
곱단이는 그런 김진사의 씨앗이라 그런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예뻤으나 이상스럽게 혼삿말만 나오면 성사가 되지 않아 스물이 넘도록 출가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출신이 진사의 딸이라 상민하고는 혼인을 하고 싶지 않은 데다 막상 내로라하는 양반집에서는 퇴기의 딸임을 앞세워 좋게 보지도 않음으로 차일피일 시간만 보내게 된 것이다.
이런 곱단이의 귀에 최백호의 사랑에 온 김삿갓의 이야기가 들어가게 되었다.

“어머니, 백호 선생님 사랑에 글 잘하는 손이 들었다면서요?”
“글쎄 말이다. 나이도 스물다섯밖에 안 들었다는데, 그렇게 글을 잘 한다는구나!”
“어머나~ 어쩜!”
이렇게 말을 한 곱단이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눈치 빠른 그 에미가 모를 리 없었다.

한편, 최백호의 사랑에서는 이웃 마을 훈장까지 밤마다 소문난 김삿갓을 보려고 모여 들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어린 학동들을 잘 가르칠 수 있는가 묻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김삿갓은 기초가 되는 천자문을 가르치는 방법에 대하여 이렇게 말을 하였다.

「천자문」이라는 책은 그 옛날 중국 양(梁)나라 때 주흥사(周興嗣)라는 사람이 지은 만고의 명저(名著)로 네 글자씩 짝을 지어 도합 250수로 구성되어 있어서 글자 수로는 모두 1천 자로 만들어진 작은 시집(詩集)인 바, 이것을 한 글자 한 글자씩 가르치는 것 보다 네 글자를 이어서 가르치는 것이 뜻을 새기는데 더욱 좋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첫 장에 수록된 ‘天地玄黃’의 경우 아이들 열이면 열 하나같이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하고 글자만 배우고 익히게 할 것이 아니라, ‘천지현황’의 뜻을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뜻을 묶어서 가르쳐야 숲을 먼저 보게 하고, 나무를 보게 함으로써 교육의 성과와 질을 높일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면서 ‘寒來暑往(한래서왕)’은 ‘찰 한, 올 래, 더울 서, 갈 왕’이라는 네 글자로 되어 있으니 ‘추위가 오니 더위가 간다.’는 뜻이 되고, 이렇듯 천자문에 실려 있는 모든 문장을 읽고 새기게 하여야 아이들도 흥미를 가지고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과연 송곳 같은 말씀이외다!”
모여든 훈장들은 김삿갓의 말에 무릎을 치며 감탄한다.
이렇게 밤마다 최백호의 사랑에서는 학문과 시를 논하는 자리가 벌어지곤 하였는데, 어느 날은 짓궂은 선비 하나가 말을 건넸다.

“삿갓 선생! 우리 마을에 처녀 문장가가 한 사람 있는데, 그 처녀를 불러다가 시 좀 같이 지어 보면 어떻겠소?”하며 악의 없이 웃으며 말을 하였다.
그러자 또 다른 선비가 말하기를,

“그 일이야 곱단이 어머니하고 자별하신 백호 선생께서 다리를 놓아야지. 누가 대신할 사람이 있습니까?”하고 말했다.
그러자 다른 선비가 말하기를,

“참, 곱단이가 올봄도 그냥 넘겼으니 이제 스물 하난가? 너무 과년해서... 그런데 요즘도 글을 읽나?”
최백호가 말을 받는데,

“아, 곱단이 글이야 한 문장 하지요. 요즘도 저 혼자 풍월을 한다던데...”
“그러면 백호선생이 곱단이에게 한 상 차리라고 이르고, 우리 삿갓 선생님을 한번 모시고 가면 어떻겠소? 혹시나 알겠소? 노처녀 머리까지 얹어줄 기회가 될지?”
삿갓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앉아 있는데, 사랑방 손님들은 자기들끼리 이같이 말하며 들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백호는 정중히 삿갓에게 묘한 의견을 물었다.

“저녁마다 마을 훈장 선생들도 더러 권하기도 했지만 혹시 선생께 무례가 될까 염려되어 말씀을 못 드렸는데, 마침 우리 내자가 곱단네 집에 볼일이 있어 들렸더니 그 에미가 반색을 하며 선생의 일을 낱낱이 묻기로 왜 의향이 있냐고 반문하니 퍽 그럴 듯이 말하더랍니다. 이미 조강지처가 계신 줄 아오만은 대장부가 객지에서 노처녀의 원한을 풀어 주기로 뭐 어떻겠습니까?”
“글쎄올시다. 나야 뭐 객창에서는 무관하옵니다만 규중의 동정녀 머리까지 얹어줄 자격이 있다 하겠습니까? 아무래도 분수에 지나친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허허, 김선생! 이렇게 해서라도 처녀귀신 소리를 면하게 해준다면 그 또한 적선이 아니겠소?”
“허허... 과분한 말씀입니다.”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가련이처럼 기녀가 아닌 요조 규수라는 데는 마음이 끌렸다.

“더구나 시서에 능하여 그 에미 소원대로 데릴사위로 들어가시면 단 둘이 풍월도 즐기며, 이런 호강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허허, 저는 호강하러 객지에 나온 위인은 아니올습니다만...”
“아따, 덕분에 이 최백호도 술 한 상 얻어먹읍시다.”
“허허허...”
최백호의 집념은 말을 할수록 강해졌다.

- 04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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