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 43화

2020. 9. 22. 09:25김삿갓 방랑기


★ 시인 김삿갓 방랑기 043화

[색주가(色酒家), 주모와의 내기 - 下]

“첫 문제는 ‘一’ 자로 시작하는 시예요. 내가 문제를 부르면, 즉석에서 대답을 해야 해요, 아셨죠?”
그리고 한시 한 줄을 읽었다.

“一粒粟中 藏世界(일립속중 장세계)”
김삿갓은 주모가 읊은 시구(詩句)를 듣고 크게 놀랐다.

이것은 오등회원(五燈會元)이라는 불서(佛書)에 나오는 시로서 우주의 원리를 일곱 개의 글자로 집약해 놓은 너무도 심오한 시였기 때문이다.

김삿갓은 주모에게 놀란 음성으로 물었다.

“주모에게 누가 그처럼 심오한 시를 적어 주던가?”
주모는 이번에야말로 내기에 이길 자신이 생겼다고 여기는지 의기양양하게 대답을 재촉한다.

“내기 문제를 누가 가르쳐 주었든 간에 대답을 못 하겠거든 빨리 손이나 드세요.”
“허~~ 참!”
김삿갓은 주모의 태도를 마뜩하지 않게 여기며 대구를 불렀다.

“일립율중 장세계. 좁쌀알 한 알 속에 온 세계가 숨어 있어, 半升鐺內 煮乾坤(반승쟁내 자건곤) : 반 되들이 솥 속에서 하늘과 땅을 삶는다.”

주모는 문제가 적혀 있는 종이 두루마리를 들여다보다가 김삿갓의 대답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고 크게 놀란다.

“첫 문제는 용케도 맞추셨네요. 그러나 두 번째는 안 될 거예요.”
주모는 두 번째 문제를

“二月江南 花滿枝(이월강남 화만지)”하고 말한다.
김삿갓은 즉각 대답했다.

“이월강남 화만지, 이월이면 강남에서는 가지마다 꽃이 피니, 他鄕寒食 遠堪悲(타향한식 원감비), 타향에서 한식을 맞는 이 몸 고향 생각 간절타. 지금 이 시는 당나라 시인 맹운경의 한식일이라는 시렸다.”

주모는 약이 오르는지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세 번째 문제를 읊었다.

“三五夜中 新月色(삼오야중 신월색)”
김삿갓은 또 다시 짝을 맞춰 대답한다.

“삼오야중 신월색, 한가위 보름 밤에 달이 솟아 아름다우니, 二千里外 故人心(이천리외 고인심),이 천리 타향 사는 친구의 마음은 어떠할까.”

세 문제를 연거푸 척척 맞춰내니 주모는 초조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주모는 낙담을 하지 않고 네 번째 문제를 불렀다.

“四十餘年 睡夢中(사십여년 수몽중)”
주모가 문제를 부르자 김삿갓이 말했다.

“그 시는 명나라 왕수인의 수기우성이라는 시라네. 내가 전문을 읊어볼 테니 들어보라구.”
그리고 김삿갓은 시 한 편을 줄줄 읊어 내렸다.

“四十餘年 睡夢中(사십여년 수몽중) 사십여 년을 꿈속에서 살아오다가
而今醒眼 始朦朧(이금성안 시몽롱) 이제야 깨어나니 눈앞이 몽롱하네.
不知日已 過停午(부지일이 과정오) 해가 이미 한낮이 지난 줄도 모르고,
起向高樓 撞曉鐘(기향고루 당효종) 이제사 다락에 올라 새벽종을 치누나.”

주모는 내기 문제를 낼 때마다 막힘없이 술술 풀어내는 김삿갓의 재주에 그만 넋이 나가 버렸다.
실상인즉, 주모는 한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손님들 돈을 우려먹을 심산으로 어떤 한학자(漢學者)에게 부탁하여 내기 문제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김삿갓에게는 통하지가 않았다.
주모는 내기 문제를 받을 때 한학자가 말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이 내기 문제로 짝 맞추기 내기를 걸면 백발백중 첫, 두 구절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게요. 만일 세 번째나 네 번째까지 알아맞추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우리나라 이태백일 것이오.”

사태가 이쯤 되니 주모는 내기에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 되지 않았다.
김삿갓에 대해 인간적인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주모는 감격 어린 눈으로 김삿갓을 바라보며 말한다.

“손님이 한시에 이렇게 훌륭하신 분인지 미처 몰랐어요.”
“내기를 하다가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나머지 하나도 마저 부르시오.”

“아녜요, 손님처럼 위대한 학자님께 이 이상 내기를 하자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승부는 끝난 것으로 하고, 술값은 한 푼도 받지 않겠어요.”

“웬일인가? 주모는 손님에게 내기 술 한 잔을 먹여 놓고, 석 잔 값을 받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는데...”
“그래요. 못난 사내놈들에게 돈을 울궈내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손님의 경우는 달라요.”

“지금까지 내기를 해오다가 별안간 나의 경우는 다르다니 별일이군.”
“손님은 학식이 너무도 높기 때문에 이제 와서는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어떡해요.”

“고맙네. 실상인즉, 나도 돈 한 푼 없어, 내기에 졌더라면 크게 창피를 당할 뻔 했구먼.”
“네? 그런 거짓말은 하지도 마세요. 돈이 한 푼도 없는 사람이 술집에 어떻게 들어와요?”

“색주가라는 간판을 보자 술 생각이 하도 간절해 돈 같은 것은 생각할 겨를 없이 덮어놓고 들어왔지.”
“아이참! 기막혀라. 생판 모르는 술집에 와서 무작정 무전취식을 하려는 배짱이었다는 말씀이에요?”

“나의 경우는 무전취식이 아니라 무전취주라는 말이 옳겠지, 하하하.”
“이제 보니 손님은 배짱이 보통이 아니시네요.”
“돈 없는 놈이 배짱까지 없으면 술맛을 평생 못 보게 될 것 아닌가, 안 그래? 하하하...”

- 제044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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