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대감의 유언
2026. 5. 9. 21:04ㆍ자유게시방
황대감의 유언
강원도 정선에 사는 심생원은 벼슬하는 게 소원인데 타고난 머리가 둔해 죽어라 공부해도 초시 한번 합격하지 못하고 미역국만 마신다.
여덟번 낙방 후 심생원은 책과 책상을 부엌 아궁이에 처넣었다.
그리고 문전옥답 다섯마지기를 팔아 백년근 산삼 열뿌리를 사서 이끼로 덮고 굴피로 감아 한양 길에 올랐다.
물어물어 팔판동에 자리한 당대의 세도가 황대감 댁을 찾아갔다.
권력 냄새를 맡은 파리 떼들이 들끓고 있었다.
마침내 심생원이 면담차례가 돼 집사 뒤를 따라 사랑방으로 들어가자
뒤룩뒤룩 살이 찐 황대감이 보료에 기대어 장죽을 물고 있었다.
심생원은 주소와 이름을 쓴 종이를 산삼 보따리에 끼워 황대감 발 앞으로 밀었다.
황대감은 보자기를 풀어보더니 흡족한 웃음을 띠며 “돌아가 기다리게. 곧 연락을 할 테니.” 했다.
심생원은 뒷걸음으로 방을 나와 벌써 사또나 된 듯이 훨훨 나는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한두달을 기다려도 가타부타 소식 하나 없자 심생원은 송이버섯을 들고 또다시 불원천리 한양 길에 올랐다.
소식이 없어 찾아왔다고 했더니 황대감 댁 집사는 “단 한번으로 벼슬자리를 받으면 벼슬 안할 사람이 없겠네.”라며 면박을 줬다.
송이보따리를 들이밀며 황대감의 눈도장을 찍고 집으로 돌아온 심생원은 눈만 뜨면 한양 쪽을 바라봤지만 날이 가고 달이 가도 감감무소식이다.
심생원은 또 논마지기를 팔아 우황과 사향을 사서 한양으로 올라가 황대감을 만났다.
“초헌관 자리가 하나 있어 자네를 점찍었는데, 글쎄 권대감이 찾아와 처남에게 줘야 한다며 통사정을 해서 내가 졌네.
집에 가서 기다리게. 곧 기별할 테니.”
어느 날 심생원이 손꼽아보니 황대감 댁을 들락거린 지 10년이 됐고, 그때마다 돼지 같은 황대감은 뇌물만 받아먹고 그럴듯한 핑계로 애간장만 태웠다.
그뿐인가. 먹고 살 만하던 살림살이는 바닥이 났다.
심생원이 석청을 외상으로 사서 황대감을 찾았더니 황대감은 앓아 누웠고 그 옆을 그의 아들이 지키고 있었다.
병색이 완연한 황대감은 가래가 끓는 소리로, “자네를 선전관 자리에 앉히지 못하고 내가 눈을 감을 수 없지.”
죽을 때까지 거짓말이다.
황대감 아들이 “소피 좀 보고 올 테니 잠시만 아버님을 지켜달라”며 나가자
심생원은 벌떡 일어나 “벼슬 안 해도 좋으니 네놈한테 당한 화풀이나 해야겠다!”며
가슴에 타고 앉아 황대감의 뺨을 연달아 열댓대 힘껏 때리고 두 주먹으로 가슴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아들이 돌아왔다.
심생원은 “대감님 빨리 쾌차하시라고 석청을 갖고 왔습니다.”라며 태연하게 말했다.
심생원에게 두들겨 맞은 황대감 캑캑 피를 토하며 말도 못하고 손가락으로 심생원을 가리켰다.
‘저놈이 나를 쳤다’는 뜻인데 황대감 아들은 ‘저 사람 꼭 선전관 자리 줘야 한다’로 받아들였다.
그날 밤을 못 넘기고 황대감은 죽었다.
황대감의 아들은 심생원의 두 손을 잡고 선친의 유언을 꼭 지키겠다며 눈물로 맹세했다.
7일장을 치르는 동안 심생원은 물불 안 가리고 상가 일을 도왔다.
한달 후 심생원은 꿈에도 그리던 선전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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