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2026. 2. 28. 19:58ㆍ자유게시방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족보(族譜)를 앞세운다.
이는 적통(嫡統)과 정통성(正統性)을 내세워 자신의 권위와
정당성(正當性) 내지 합리화(合理化) 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적통(嫡統)은 정실에게서 난 자식의 계통을 말함이고
정통성(正統性)은 통치를 받는 사람에게 권력 지배를 승인하고
체제를 허용하게 하는 논리적이고 심리적인 관념이나 근거를 말한다.
둘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자
적통(嫡統)은 혈연관계가 얽힌 것이고,
정통성(正統性)은 혈연관계보다 지역적, 학문적,
종교적이나 정파(政派)적 관계에 얽혀 있다.
그러나 적통과 정통은 동일 선상에서 다루어지기도 하고
둘이 상반된 관념으로, 때로는 보완관계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사회는 이러한 관념이 다소 희석되고 있지만
인간이 사회적 공동체의 일원인 이상
여전히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 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가부장적(家父長的) 사회에서나
유학(儒學)을 통치 이념으로 여기는
국가에 있어서 더욱 그렇다.
왜냐하면 국가의 통치 이념인 충(忠)은
효(孝)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효(孝)가 곧 충(忠)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국가에 대한 것은 반역은 불충(不忠)이 되고
개인이 적통을 잇지 못하면 불효(不孝)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통의 효(孝)를 중시하게 된 나머지
적실의 장자가 아닌 서자(庶子)를 홀대하였지만
이마저 여의찮으면 방편으로 씨받이를 들이거나,
양자를 들임으로써 적통을 보완하여 정통성을 내세워
이를 합리화하고자 한 것은 동서고금의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적통성으로 해결하기 힘든 예도 있다.
학문이나 종교나 정파적 이해관계가 부딪치면
적통(嫡統)보다는 정통(正統)을 중시하여 이를 해결한 것이다.

역사적 한 예로 공자(孔子)를 보자.
부처가 불교의 창시자라면 예수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이다.
그러나 공자는 엄밀히 말해 유교의 창시자는 아니다.
그러나 유가 사상을 대표하는 개조로 추앙되는 성인이다.
공자의 아버지는 숙량흘(叔梁紇)이다.
사람들은 공자를 알지만 숙량흘은 잘 모른다.
왜냐하면 적통성(嫡統性)이 부실함으로
유학의 정통성이 적통성을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공자를 옹호하려는 방편이기도 하다.
공자(孔子)의 부친인 숙량흘(叔梁紇)은
일찍이 노나라의 여자에게 장가가서 딸만 아홉을 두었다.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숙량흘은 아들을 얻기 위해
첩을 얻어 아들 맹피를 낳았다.
그러나 그 아들은 다리가 불구였고 어려서 일찍 죽었다.
적통이 끊어진 것이다.
그러자 숙량흘은 66세가 넘은 나이에
다시 젊디젊은 안 씨의 셋째 딸 안징재에게 구혼을 하여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공자다.
안징재의 결혼 당시 그때 나이는 방년 16세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에 나온 이야기다.
정도를 걷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합치는 그것을 가리켜
<야합(野合)>이란 말로 사마천은 『사기』에서 기록하고 있다.
적통을 주시하고, 효를 중시하는 유가(儒家)의 교리로 보면
이를 수긍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숙량흘 한 개인의 음욕(淫慾)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그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그 의식의 근저에는
대(代)를 이어야 한다는 절실한 적통의 사상도 깔려 있었을 것이다.

성경을 보자
성경에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 나온다.
동생 아베를 죽인 카인은 아담과 이브의 적통자다.
그러나 살인을 저질을 죄로 하나님으로부터 축출된 것은
적통성을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성경을 보면 카인의 후손은
간략히 기술되어 있지만 아담이 나은 삼남인 <셋>의 후손 이야기는
장황하게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도 유출할 수 있다.
“셋”은 정실의 아들이긴 하지만 장남은 아니다.
다만 아담의 핏줄을 이었다는 점으로만 보면
적통이 아니라고도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셋>의 후손은 대를 이어 <노아>에 이르고 다시 대를 이어
<데라>에 이르고 데라는 3명의 아들을 낳으니
아브라함, 나흘, 하란이다. 하란은 <롯>을 낳고 일찍 죽으니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에서 천사를 맞이한 자가 <롯>이다.
<롯>은 족보로 보면 데라의 손자가 된다.
아브라함과 롯의 자산(양)이 늘어나 목자들 간에 분쟁이 일어나자
롯은 분가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살았고
롯은 요르단 분지에 있는 여러 도시에 살다가 마침내
소돔으로 천막을 옮겼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은
야훼에게 못 할 짓만 하는 아주 못된 사람들이었다.
음란과 패륜의 도시였던 모양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는 여기서 비롯된다.
아브라함은 야훼(하나님)가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유황불로 멸하겠다는 이야기를 듣자
간청하여 의인(義人) 10명이라도 있으면
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끝내 이를 찾지 못하여 멸망의 길을 밟게 된다.
야훼의 명을 받은 두 명의 천사가 소돔성에 이르자
이를 알아본 롯이 극진한 대접을 베푼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천사는 롯의 가족과
친지들을 데리고 이 성을 빠져나가도록 일러주었다.
롯의 이야기를 들은 두 딸의 약혼자들은 떠나기를 거부하자
두 딸과 아내만을 데리고 소돔을 빠져나왔지만
불행히도 그의 아내는 소돔성을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무시하고
돌아보자 소금 기둥으로 변했다고 한다.

이를 이야기 하는 것은
한 민족의 적통성과 정통성을 소고(小考)해 보려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한 후 롯은 소돔성과 떨어진
“소알”이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그 고장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이 두려워 두 딸을 데리고
소알에서 나와 산에 들어가 굴속에서 살았다.
하루는 언니가 아우에게 말하기를
“ 아버지는 늙어가고 이 땅에는 우리가
세상의 풍속대로 시집갈 남자가 없구나.
그러니 아버지가 술에 취하도록 대접한 뒤에
우리가 아버지 자리에 들어 아버지의 씨라도 받도록 하자” 하여
그렇게 실행했다. 그렇게 해서 큰 딸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는데 오늘날 모압인의 조상이 된 것이다.
둘째 딸 역시 아버지 씨를 받아 아들을 낳으니 벤암이라고 하는데
그의 후손이 오늘날의 맘몬인의 조상이 된 것이다.
롯의 두 딸로부터 태어난 모압과 벤암은 롯의 핏줄이긴 하지만
적통(嫡統)으로 보기 어렵다.
단지 같은 혈통으로만 본다면 정통성을 인정할 수 있지만
출생의 동기를 보면 모호하다.
그러나 그의 후손이 모압인의 조상이 되고,
맘몬인의 조상으로 된 것은 정통성마저 부정하기도 그렇다.
딸의 아들이면서 또한 아버지 롯의 아들이면서 손자가 되어
족보를 논하기가 애매하기 때문이다.
적통과 정통은 이렇게 모호한 경계가 있다.


불교의 경우를 보자.
불교의 교리는 <무아(無我)>임으로
중생은 물론 가족이라는 것이 인정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통과 정통성 그런 문제는 야기되지 않는다.
부처님 이전의 6분의 부처가 있었다.
석가모니불을 포함하여 이를 <과거칠불>이라 부른다.
<장아함경>에 의하면 과거칠불(過去七佛)은 모두 아들을 두었다.
비바시불의 아들은 방응(方膺). 시기불의 아들은 무량(無量).
비사부불 아들은 묘각(妙覺), 구륜손불의 아들은 상승(上勝),
구나함의 아들은 도사(導師), 가섭불의 아들은 집군(集軍),
석모니불의 아들은 나후라(羅睺羅)를 두었다.
아들 즉 적손(嫡孫)을 두었지만, 어느 부처님도 대를 이은 예는 없었다.
아니 이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일대(一代)로 끝나버린 것이다.
왜냐하면 출가가 기본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적자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출신도 다르고
시대가 달라서 족보처럼 그러한 계통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장아함경>에 따르면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과
석가모니불은 찰제리(왕족) 출신이고,
구류손불, 구나함불, 가섭불은 바라문에 속하기 때문이다.
신분 계급이 다르면 족보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법맥이 있다.
부처님 이래 달마대사에 이르기까지를 28대 하고,
달마대사를 시조로 하여 오가종(五家宗)을 말하는 것은
혈연으로 이어진 적통 관계가 아니라
선맥(禪脈)의 계통을 밝힌 것일 뿐
세속에서 말하는 적통이나 정통성과는 거리가 있다.
여기서는 시간성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통이나 정통성을 인정하는 그 근본은 <나>가 존재해야 한다,
<나>가 있어야 가족이 성립하고,
가족이 성립해야 적통 즉 족보가 성립한다. 정통성 또한 마찬가지다.
<나>가 있어야 지연(地緣)이 맺어질 수 있고,
<나>가 있어야 나와 같은 생각, 같은 이념,
같은 행동을 표출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유일신을 세워 인간을 창조하였으므로
이를 기반으로 가족의 족보처럼 성경에 나열할 수 있지만
불교는 중생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이러한 족보나
정통성을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불교의 근본 교리가 무상(無相),
무아(無我), 무원(無願)이기 때문이다.
모양이 없으니, 무어라 규정지을 수 없고,
<나>가 없으니 어떠한 인과관계를 형성할 것도 없으며,
<나>가 없으니 바랄 것도 지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적통과 정통성을 인정한다고 해서 나쁜 것이 아니고
이를 부정한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적통(嫡統)이니 정통(正統)이니 하는 말은 명자상(名字相)에 불과하다.
실체가 없는 분별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과정이 결과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것이 무엇인지
깊이 깨닫고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로 인한 복과 재앙도 마찬가지다.
실체가 없는 중생의 분별심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는 모두 어리석은 중생들을 설득하고
바른 지혜로 이끌기 위한 언어(말)와 그 표현의 방편이 다를 뿐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쿠란에는 유일신을 부르는 99개의 이름이 있다고 한다.
신의 호칭 또한 명자상에 불과하다,
장미를 로즈라 부른다고 장미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부처라 부르던, 야훼(하나님)라 부르던, 알라라고 부르던
그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암시하고 있는
참뜻을 바르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할렐루야면 어떻고 쿠다 하피즈(주님의 가호가 있기를)는 어떻고,
나무아미타불이면 어떤가?
명자상에 얽매인다면 분별 망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적통이니 정통이니 하는 말은 분별 상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참 마음을 바로 알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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