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신, 사막의 여우 롬멜

2020. 6. 20. 22:14그때그시절 세계역사 625

전쟁의 신, 사막의 여우 롬멜

 

 

 

에르빈 롬멜

 

소속 : 독일 국방군

최종계급 : 원수

수훈내역 :

2급 전쟁공로 철십자 훈장

1급 전쟁공로 철십자 훈장

검 기사 철십자 훈장

백엽 검 철십자 훈장

다이아몬드 백엽 검 철십자 훈장

푸르 르 메이트 훈장

참전 전쟁 :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1915년 아르군숲전투에서 언덕을 올라가는 독일보병)

 

1차 세계대전 당시 롬멜은 보병장교였다.

프랑스, 루마니아, 이탈리아 등지에서 싸웠던 그는 많은 전투를 치뤘다.

전투와 전투를 거듭하며 전투에서 얻은 교훈은 다른전투들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다.

 

(1차세계대전때의 전투와 교훈들을 정리해놓은 롬멜 보병전술, 필자도 가지고 있다.)

 

후에 교훈들을 정리하여 롬멜 보병전술이라는 책도 썼다.

그만큼 전투에서 얻은 교훈의 양도 방대하다.

2차세계대전 발발후에도 이 교훈은 여러차례 도움을 주었다.

1차세계대전후에 평범한 군생활을 하던 그에게 변화를 준 이가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 그는 롬멜뿐만아니라 모든 독일의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바로 히틀러 였다.

그는 괴벨스를 앞세워서 선동을 하였는데 그 효과는 무시무시 했다.

라디오를 통해 24시간 나치에대한 방송이 나갔다.

그러면서 스포츠및 문화행사에도 참여와 후원을 하며 독일국민들에게 친근한 나치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롬멜도 그런 나치에 친밀감을 느낄수밖에 없었다.

롬멜은 히틀러 경호대장까지 지내며 히틀러의 신뢰를 받았다.

 

(파리에서의 롬멜)

 

그러던중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폴란드침공에서도 보병장교였던 롬멜은 전차의 위력을 보았다.

롬멜은 자진하여 기갑시단장이 되어 전 차를 지휘하게 되었다.

프랑스 침공때에도 롬멜은 전차들을 이끌고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그떄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25만명의 이탈리아군은 3만 5천여명의 이집트 주둔 영국군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화력이 약했던 이탈리아군의 진격은 시디 바라니에서 멈추었고 곧 영국의 반격을 받았다.

 

(보병전차 마틸다 II, 두꺼운 장갑으로 인해 전장의 여왕이란 별명을 얻었다.)

 

12월 9일 새벽, 영국군이 이탈리아 군을 기습하였다.

화력이 빈약했던 이탈리아군은 마틸다를 앞세운 영국군의 공격을 막을수 없었다.

엘 아게일라까지 진격한 영국군의 공세는 그리스로의 병력차출로 멈추었다.

하지만 이탈리아군은 충분한 위험에 빠졌고 독일은 롬멜을 아프리카군단장으로 파견했다.

 

(롬멜의 첫번쨰 공세)

 

롬멜은 공세를 금지당하였지만 영국군이 약해졌다는 것을 눈치체고 공세를 시작하였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 라는 말을 남기고 그야말로 방어를 목적으로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영국군의 저항은 거의 없어서 롬멜은 손쉽게 영국군을 격파할수 있었다.

하지만 보급품부족으로 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을 완전히 몰아낼수는 없었다.

 

결국 웨이벌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의 반격을 받는다.

대규모 지원을 받은 영국군의 배틀액스 작전이 시작되었다.

강력한 전차를 앞세운 영국군의 공격을 막은 장애물이 있었다.

 

(독일군의 강력한 88mm 대공포)

 

바로 88mm 대공포였다!

88mm 대공포를 대전차포로 사용하여 영국군의 전차들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전장의 여왕이던 마틸다마저도 전장의 여왕이라는 지위를 잏게되었다.

전차돌격에 실폐한 영국군은 많이 약해져 있었다.

결국 측면에서 독일전차의 공격을 받고 후퇴할수 밖에 없었다.

결국 웨이벌 장군이 자리에서 물러나고 롬멜은 영국군으로부터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고 처칠로부터 참군인으로 불렸다.

 

(영국의 오킨텍 장군, 그는 중동파견군의 새로운 지휘관이 되었다.)

 

영국 중동파견군의 사령관이된 오킨텍은 새로운 공세를 준비하였다.

바로 크루세이더 작전이었다.

전력을 보강한 제8군은 작전을 개시하였다.

하지만 롬멜의 반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이집트국경까지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뉴질랜드 사단등의 분전으로 전투는 소모전 양상을 띄었다.

결국 보급품이 부족했던 롬멜은 협공당할 위험을 피해서 철수를 감행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을 롬멜이 아니었다.

전력을 보충한 롬멜은 다시한번 반격에 나섰다.

롬멜은 가자라 방어진지에서 우회공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강력한 영국전차대에 저지당하고 지뢰밭으로 인해 보급로도 열수 없었다.

그떄 롬멜은 전부대를 모아 방어진지 '가마솥'을 만들어서 영국군을 격퇴하고 보급로를 여는데 성공하였다.

롬멜이 반격을 시작하자 영국군은 진지를 버리고 후퇴하였고 결국 토브룩을 독일군에게 내주었다.

하지만 여러번의 공세와 반격으로 많은 전력을 손실한 독일군은 안전한 트리폴리타니아로 후퇴할수밖에 없었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 그는 오킨텍의 자리를 물려받은 장군이었다.)

 

몽고메리는 북아프리카 영국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몽고메리가 이끄는 군대는 병력이 독일군의 2배나 되었다.

몽고메리는 압도적 병력수를 이용하여 엘 알라메인지역을 공격한다.

본국에서 치료차 요양중이던 롬멜은 아프리카에서 다시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1차세계대전때부터 자주있던 복통으로 인해 최전선에서 지휘하던 롬멜은 제 힘을 다하지 못하였다.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영국군을 독일군들은 온힘을 다해서 막았지만 결국 방어선이 두군데에서 뚫리고 말았다.

롬멜은 갈림길에 놓였다.

히틀러는 끝까지 싸우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병사들을 지극히 아끼던 롬멜은 히틀러의 명령을 무시하고 후퇴를 감행한다.

덕분에 많은 독일병사들을 구했지만 롬멜은 히틀러의 총애를 잃었고 프랑스 북해연안의 방어를 맡았다.

 

(영화 라이언일병 구하기의 한장면, 노르망디)

 

B집단군을 지휘하게된 롬멜과 서부방면군을 지휘하는 게르트 폰 룬트 슈테트가 북해 방어를 맡았다.

이때 연합군의 프랑스 상륙의 징조가 보였다.

이때 연합군의 기만전술로 인해 상륙장소로 노르망디를 조금이나마 예상한건 롬멜이 유일하다.

하지만 이미 엘 알라메인전투에서 총애를 잃은 롬멜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노르망디의 방어에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결국 히틀러에게 미움을 사기에 이른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의 한장면, 롬멜은 발키리작전에 횝슬리게 된다.)

 

그러던 그때 사건이 하나 터지게된다.

바로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 이다.

이일로 히틀러는 위험인물을 몰아내야 했다.

롬멜은 히틀러 암살이후 독일의 다음 지도자로 지목되고 유태인학살과 같은 나치의 만행을 비판한 매우 위험한 인물이었다.

롬멜은 암살계획을 모르고있었지만 히틀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롬멜이 생전 가장 아꼈던 아프리카 군단 제복)

 

1944 10월 14일, 사복 차림으로 입은 12명의 게슈타포 요원들과 히틀러의 명령을 받은 부르크도르프, 마이젤 두 명의 장군은 검은색 차량의 메르세데스를 타고 독일울름에 위치한 롬멜의 집 주위를 둘러쌌다.

그리고 정각에 제택에 들어가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 대한 공로죄를 물었다.

독일의 국민적 영웅을 재판을 할수 없기에 장례를 국장으로 치뤄주고 가족의 신변을 보호해 준다는 조건으로 자살을 권유하였다.

잠시뒤 자신이 아끼던 아프리카군단 제복을 입고 롬멜이 밖으로 나왔다.

그는 차를타고 집에서 500m 떨어진곳에 도착한다.

롬멜은 청산가리를 입에 물었다.

그때 그의 눈에는 고통보다는 슬픔이 더 많았다.

롬멜사후 몇분동안 잠시 모두 말이 없었다.

진정한 군인이 죽은 그순간에...................................

 

----------------------------------------------------------------------------------------------------------------

참고 문헌

 

독일육군전사 저자 : 우에다 신

롬멜 보병전술 저자 : 에르빈 롬멜

영문위키 Erwin Rommel

폴그레이브 멕밀런 지도로 보는 세계전쟁사 제2차 세계대전 저자: 메슈 휴스, 윌리엄 J. 필포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