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과 마누라

2025. 12. 9. 22:29자유게시방

영감과 마누

 
 

마누라,
아내를 낮잡아 부르는 말일까?

마누라(왜 그래요)
외양간 매어놓은 얼룩이 황소를 보았나(보았죠)
어쨌나(친정집 오라버니 장가들 밑천으로 주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마누라지

- 반야월 작사, (잘했군, 잘했어)

'마누라'라고 하면 남성이 자기의 아내를
허물없이 부르는 호칭입니다. 듣기에 따라서 '여편네'와 비슷하게 낮잡아 부르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편지 중에서 봉투에 한글로 '뎐 마누라 젼(前)'이라고 쓴 것이 있습니다. 1882년, 그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텐진에서 유폐생활을 할 때 쓴 것이라서 후세 사람들은 아내에게 보낸 편지라고 짐작했는데요, 편지 내용이 이렇습니다.

마마께서는 하늘이 도우셔서 환위를 하셨거니와 나야 어찌 생환하기를 바라오리까. 나는 다시 생환은 못 하고
만 리 밖 고혼이 되오니, 우리 집 후사야 양전께서 어련히 보아 주시겠습니까.

도저히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로 볼 수 없는 내용이지요. 여기에서 마마는 며느리이자 정치적 라이벌인 명성황후 입니다. 임오군란 때 명성황후가 지방으로 피신했다가 왕궁으로 돌아온 일을 두고 흥선대원군은 하늘이 도왔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왜 편지봉투에 '뎐 마누라 젼(前)', 다시 말해 마누라에게 보낸다고 썼을까요?

마누라의 어원은 '마노라', 고려 후기에 몽골에서 들어온 말로 놀랍게도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됐던 극존칭 이었습니다. 왕과 왕비를 비롯한 앙실의 일가를 존칭할 때 마노라를 붙여서 '대비 마노라', '대전 마노라'라고 불렀지요.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마마'와 함께 궁중용어였습니다.

이렇듯 왕실의 일가를 일컬었던 극존칭이 아내를 낮춰 부르는 뜻으로 전락한 것은 최근 백 년 사이의 일이며 마누라와 비슷하게 그 뜻이 전락한 단어로 '영감'이 있습니다.

영감(왜불러)
뒤뜰에 뛰어놀던 병아리 한 쌍을 보았소 (보았지)
어쨌소(이 몸이 늙어서 몸보신 할려고 먹었지)
잘했군 잘했어 잘했군 잘했군 잘했어
그러게 내 영감이라지

- 반야월 작사, (잘했군, 잘했어)

영감은 본디 정3품과 종2품의 당상관을 높여 부르는 존칭이었습니다. 벼슬아치들을 통칭하는 것처럼 부르는 대감은 영감 이상, 즉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가진 이들을 부르는 존칭이었지요. 이처럼 벼슬아치를 높여 불렀던 말이 어쩌다 늙은 남편이나 늙은 남성을 일컫는 말이 됐을까요?

평균 수명이 40세였던 조선시대에 오래 사는 것은 큰 복이었습니다. 그래서 조선 중기에는 8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벼슬을 내렸는데, 이 벼슬을 받은 노인들을 사람들은 영감이라고 높여 불렀습니다.

마누라와 영감, 영감과 마누라. 썩 기분 좋은 호칭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원래 고귀한 신분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요즘은 부르는 사람도 불리는 사람도, 대부분 그 고귀함을 모르고 사용하겠지요.

유선경 지음
문득, 묻다
첫 번째 이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