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濁(청탁)

2025. 12. 8. 06:59좋은글

菜根譚

제 7부 : 淸濁(청탁) :지나치게 가리지 말라.

 

제 151장 : 心無可淸(심무가청) :

마음을 애써 맑게 할 필요가 없다.

 

水不波則自定    鑑不翳則自明    故心無可淸

수불파즉자정    감불예칙자명    고심무가청

 

去其混之者而淸自現    藥不必尋    去其苦之者而樂自存

거기혼지자이청자현    약불필심    거기고지자이락자존

 

물은 물결이 일지 않으면 절로 고요해지고,

거울은 먼지가 덮지 않으면 절로 맑아진다.

마음도 애써 맑게 할 필요가 없다.

마음을 혼탁하게 만드는 사념(邪念)을 없애면 맑은 모습이 절로 나타난다.

즐거움 역시 반드시 찾을 필요가 없다.

마음을 괴롭게 만드는 번뇌(煩惱)를 버리면 즐거움이 절로 그 안에 있다.

 

 

수불파즉자정(水不波則自定)의 파(波)는 물결이 일고 파도가 친다는 뜻의 동사로 사용된 것이다.

감불예칙자명(鑑不翳則自明)의 예(翳)는 먼지 등이 가린다는 뜻이다.

마음을 맑게 하는 법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마음속에 풍파가 일지 않게 하면 된다.

사념을 버리는 게 관건이다.

즐거움 역시 애써 찾을 필요가 없다. 괴로운 심사를 야기하는 번뇌를 버리면 된다.

마치 물결이 일지 많으면 물이 잔잔하고 먼지가 앉지 않으면 거울이 절로 밝은 것과 같다.

선가(禪家)의 수양법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중국의 선종(禪宗)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달마의 법통을 이어받은 6조(六祖) 조사 혜능(惠能)이다.

당초 그는 기주(蘄州)의 동산사(東山寺)에 머무는 홍인(弘忍)이라는 위대한 선승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곧바로 길을 나섰다. 가르침을 받기 위한 여정이었다. 오렌 여행 끝에 마침내 홍인을 만날 수 있었다.

홍인은 혜능을 보자마자 이같이 말했다.

“그대는 여기에 무엇 하러 왔는가? 그대는 나를 찾아올 필요가 없다.”

혜능은 자신이 아직 어린 까닭에 그같이 말한 것으로 생각해 이같이 간청했다.

“부디 저를 제자로 받아 주십시오.” 홍인은 혜능의 청이 하도 간절해 이내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혜능에게 시킨 일은 하루 종일 후원에서 방아를 찧는 일이었다.

당시 홍인이 주석(駐錫)하고 있던 절은 대중(大衆)이 5백 명가량 되는 큰 절이었다.

수많은 학자와 명상 수행자들이 각기 연구와 명상 수행을 하고 있었다.

당시 홍인은 혜능에게 이같이 명했다.

“후원에서 일하면서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라. 필요하면 내가 부를 것이다.”

혜능은 쌀을 씻고 방아 찧는 일에만 몰두했다.

한번도 스승을 찾지 않고 오직 후원에서 스승이 불러주기만을 기다렸다.

절의 누구도 혜능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누가 봐도 혜능은 평범한 일꾼에 지나지 않았다.

얼마 후 홍인이 곧 입적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후계자 물색이 시작되었다.

홍인이 제자들에게 깨달은 바를 게송(偈頌 )으로 지어낼 것을 명했다.

게송을 보고 진리를 깨달은 제자를 한 사람 찾아내 법통을 전수하고자 한 것이다.

당시 동산사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제자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신수(神秀)였다.

홍인의 제자들은 신수가 응당 뒤를 이을 것으로 생각해 게송을 써서 내지 않았다.

결국 신수 홀로 게송을 써냈다. 이런 내용이었다.

 

몸은 보리수이고 身是若提樹(신시약제수)

마음은 명경대다 心如明鏡臺(심여명경대)

매일 열심히 닦아 時時勤拂拭(시시근불식)

먼지가 없게 하리 莫使惹塵埃(막사야진애)

 

모든 경전에 나오는 수도(修道)의 이치를 절묘하게 집약한 뛰어난 게송이었다.

다음날 홍인이 게송을 보고는 문하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

“아주 좋은 게송이다. 이를 쓴 사람은 깨달았다.”

모든 제자들이 이 게송을 외우고 다녔다. 부엌에서 일하던 혜능이 그 연유를 물었다.

자초지종을 들은 혜능이 크게 웃자 옆에 있던 한 승려가 물었다.

“자네는 왜 웃는 것인가? 방아나 찧는 주제에 뭐 아는 게 있는가?”

혜능이 웃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벙어리처럼 말도 하지 않은 채 일만 했기 때문이다

혜능이 이같이 답했다. “나는 글을 쓸 줄도 모르고, 깨달은 사람도 아니오.

허나 이 게송은 틀렸소. 내가 게송을 읆을 터이니 한번 적어보도록 하시오.

승려가 호기심에서 혜능이 읆은 게송을 적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보리에 본래 나무가 없고   若提本無樹(약제본무수)

명경 또한 틀이 아니지       明鏡亦非臺(명경역비대)

본래 어떤 것도 없는데       本來無一物(본래무일물)

어느 곳에 티끌 앉을까       何處惹塵埃(하처야진애)

 

이 게송을 본 승려들이 깜짝 놀랐다.

홍인이 게송을 지은 자를 묻고는 혜능이 지었다는 말을 듣자마자 ‘게송이 틀렸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승려들이 안심했다.

이날 밤 홍인은 모두가 잠든 틈을 타서 혜능을 찾아갔다.

”너의 게송은 깨달은 자의 것이다. 네가 나의 의발을 전수받으면 아마도 그들이 너를 죽일 것이다.

여기서 달아나라.“

이상이 『육조법보단경』에 전해져 온 일화이다.

 

신수처럼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번뇌가 끼지 않게 하는 수도 방법을 통상 북방선(北方禪)

또는 점수선(漸修禪)이러고 한다.

이에 반해 혜능처럼 본래의 불성(佛性)을 깨달으면 굳이 털고 닦는 등의 인위적인 청정(淸淨)을 행할 필요가

없다는 식의 수도 방법을 통상 남방선(南方禪) 또는 돈오선(頓悟禪)이라고 한다.

돈오선이 점수선보다 한 단계 위에 있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육조법보단경』이 7대조사인 신회(神會)가 의도적으로 신수를 깎아내리고 혜능을 6대조사로 현창하기

위해 만든 저서라는 점을 감안 할 필요가 있다.

1900년 중국 감숙성 돈황 석굴레서 방개한 양의 고문서가 출토된 바 있다.

중국 초기 선종의 역사와 선사들의 어록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호적(胡適)의 연구에 의해 신수와 신회가 중국 초기 선종사의 선구자로서 선의 기초를 만든 인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한국에서는 아직도 『육조단경』의 기록을 토대로 신수와 북방선을 한 수 낮은 것으로 평가 하고 있다.

이는 잘못이다. 남북조시대 남조 양나라 해교(慧皎)의 『고승전 高僧傳』 과 당나라 도선(道宣)의 『속고승전』

‘습선(習禪)에 따르면 선(禪) 사상은 달마 이전에 이미 중국에 널리 전해져 있었다.

수많은 선사들이 참선 수행을 한 사실이 『구당서』를 비롯해 『능가사자기 楞伽師資記』와 『송고승전 宋高僧傳』

등에 나온다. 이에 따르면 5조 홍인의 동산법문을 이어받은 사람이 혜능이 아닌 신수였다.

 

신수는 지금의 하남성 개봉시 남쪽 변주(汴州) 울지(蔚至) 출신으로 속성(俗姓)은 이씨(李氏)이다.

신장이 8척이고, 눈썹과 눈매가 빼어났다.

젊어서부터 경서와 사서를 두루 읽어 박학다식했다.

13세에 출가하여 20세에 낙양 천궁사(天宮寺)에서 계를 받고 46세 때 동산의 홍인대사를 만났다.

홍인은 한 눈에 그가 큰 법기(法器)임을 읽었다.

신수가 묵묵히 물을 길으면서 도를 구하자 홍인이 이내 문하의 으뜸으로 삼았다.

신수상좌(神秀上座)라는 이름을 얻게 된 배경이다.

나이 95세 때 측천무후의 부름을 받고 주석하고 있던 옥천사(玉泉寺)를 떠나 천궁사에 머물며 황실에서

보낸 종려나무 잎으로 덮은 천자의 가마를 타고 입궐하곤 했다.

그 때마다 측천무후가 마치 살아 있는 부처를 대하듯이 엎드려 절하며 맞이했다.

그가 입적하자 대통선사(大通禪師)로 추중했다.

당현종 때 재상을 지낸 장설(張說)은 영주 옥천사의 대통선사 비문을 썼다.

선종의 형상과 선사상의 정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게 확실하다.

최근 돈황 출토 자료에 있는 신수의 관심론(觀心論)이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불성을 각성(覺性)으로 풀이하면서 불성을 자각하고 타인에게도 깨닫게 하여 지혜의 명료함을 깨달으면

그것이 바로 해탈(解脫)이라고 주장했다.

본래 청정한 불성을 자각하면 원래부터 갖추어진 지혜에 의해 오염된 마음의 두꺼운 구름을 걷어내고 마침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신수가 정립한 북종선은 달마의 선사상을 토대로 홍인이 역설한 좌선(坐禪)과 수심설(守心設)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선사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왜 신수는 남방선을 정립한 혜능보다 한 단계 떨어지는 인물로 왜곡된 것일까?

신룡 2년(706) 2월 낙양 천궁사에서 입적했다. 세수(世壽) 102 세였다. 측천무후가 대통선사의 시호를 내렸다.

선문에서 시호를 받은 최초의 일이었다.

이듬해인 신룡 3년(707) 9월 측천무후가 사망했다. 신수의 수제자 보적(普寂)과 의복(義福)이 법통을 이어받아

문하의 여러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수가 3천에서 1만 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번성했다.

그러나 이후 신수를 지원하던 세력이 사라지면서 황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이때 남쪽에서 달마의 법통을 주장하면서 혜능을 6대조사로 현창하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신회(神會)가 장본인이었다.

당현종 개원 20년(732), 그는 지금의 하남성 활현인 활대(滑臺)의 대운사(大雲寺)에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열고 수많은 대중들 앞에서 이같이 선언했다.

”북종의 신수는 방계에 지나지 않고, 남종의 혜능이야말로 보리달마의 정법을 이은 진정한 조사이다.“

이를 ’활대의 종론(宗論)‘이라고 한다.

신화는 달마가 혜가(慧可)에게 법을 전할 때 함께 전한 가사를 홍인이 혜능에게 그대로 전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전의부법설(傳衣付法設)이라고 한다.

조작이라는 이설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북종은 서서히 쇠퇴하고 남종이 점차 활기를 띠어 갔다.

마침내 당대종 대력(大曆)13년(778) 당나러 조정이 혜능을 중국 선종의 6조로 공식 승인하게 되었다.

혜능의 제자 신회는 자연스럽게 제7조로 추앙 받았다.

관련 기록에 따르면 신수와 혜능은 가까이 지내며 서로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홍인이 입적한 후 혜능은 영남으로 내려갔다.

장안과 낙양 일대는 신수의 무대였던 까닭에 자신이 활약할 여지가 거의 없다고 판단한 결과였다.

신수는 측천무후에게 상주하여 혜능을 부르도록 하면서 스스로도 서신을 써 초청했다.

그러나 혜능은 이를 고사하면서 자신은 영남과 인연이 있어 대유령(大庾嶺)을 넘을 수 없다고 답했다.

여기서 신수와 혜능의 선사상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원래 신수를 홍인의 방계로 깎아내린 신회는 한때 신수의 문하에서 3년 동안 수행한 경력이 있는 인물이다.

이후 그는 혜능을 섬겼다. 그는 자신의 적통을 주장하기 위해 이전의 스승인 신수를 멋대로 깎아내린 셈이다.

덕분에 혜능의 뒤를 이은 7조로 숭앙받았지만 본인 역시 중국 선불교를 완성 시킨 마조(馬祖)와 같은 제자를

길러낸 회양(懷讓)에게 7조의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중국 선불교의 효시는 보리달마이다.

그의 선사상은 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으로 이어질 때까지는 달마가 전한 선(禪) 그대로였다.

그러나 당나라가 들어선 초기 홍인 밑에 신수와 혜능이라는 뛰어난 2명의 제자가 등장했다.

여기서 달마가 전한 선사상은 크게 혜능의 남종선과 신수의 북종선으로 갈리게 되었다.

혜능이 홍인으로부터 의발을 전수받아 남쪽으로 달아났다는 일화가 암시하듯 당시 혜능과 그 제자들은 주로

남쪽인 화남 일대에서 둥지를 튼 까닭에 남쪽에 뿌리를 두었다는 의미의 ’남종선‘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신수와 그의 제자들은 주로 북쪽에 위치한 낙양과 장안에서 활동한 까닭에 

’북종선‘의 명칭을 얻게 되었다.

이를 줄여 남능북수(南能北秀)라고 한다. 남은 혜능, 북은 신수라는 뜻이다.

남종선과 북종선의 가장 큰 사상적 차이는 도를 닦아 깨우치는 수증법(修證法)에 있다.

돈오(頓悟)와 점수(漸修)가 그것이다.

돈오는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번에 최고의 경지까지 깨닫는 것을 말한다.

점오(漸悟)로도 표현되는 점수는 점진적이면서도 단계적인 수행을 통해 하나하나 깨달아가는 것을 말한다.

남종선과 북종선의 특징을 하나로 묶은 게 바로 남돈북점(南頓北漸)이다.

남종은 돈오, 북종은 점오를 중시한다는 취지이다.

 

돈오와 점오는 깨달음에 대한 관점 차이에 비롯된 것이다.

깨닫는 순간만을 놓고 보면 돈오이나, 부단히 수행한 덕분에 그 결과로 돈오를 이루었다고 파악할 경우

이는 점오에 해당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돈오는 그 이전에 수행한 것이 바탕이 되어 가능케 된 것이지

아무런 바탕도 없이 문득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를 통해 신수와 혜능을 대비시키며 돈오와 점오의 차이를 역설하는 것은 혜능과 남방선을 법통으로 삼기

위한 속셈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의 상황을 토대로 유추히면 남방선은 북방선과 비교가 되지 못했다.

북종선의 효시인 신수는 장안과 낙양의 양경(兩京)에서 법주(法主)로 있던 당대 최고의 선승이었다.

혜능의 경우는 양경에서 멀리 떨어진 남쪽 변방의 무명에 가까운 선승으로 존재했을 뿐이다.

혜능의 제자 신회는 이를 뒤집기 위해 대운사에서 거대한 규모의 무차대회를 열고 남종선이 법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때 그는 ’돈오‘를 역설했다. 이게 적중했다.

이때 만들어진 ’활대의 종론‘ 덕분에 혜능은 입적한지 30년이 지난 시점에서 신수를 제치고 홍인의 수제자로

둔갑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후 남종선에서 신회와 회양 등 천재적인 선승들이 잇달아 배출 되었다.

남방선이 북방선에 대해 우위를 점하게 된 결정적인 배경이다. 남방선의 우위는 계속되었다.

석두, 마조, 백장, 황벽, 임제 등 뛰어난 선승들이 속출한 덕분이다.

남종선이 휩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정반대로 신수를 효시로 한 북종선은 몇 대에 걸쳐 뛰어난 제자들이 등장하지 못했다.

신수의 가르침이 계승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진 배경이다.

실제로 이후에 등장한 5가7종(五家七宗)의 선문(禪門) 모두 남종선에서 갈라져 나왔다.

고금을 막론하고 그 어떤 사상이든 최소한 2대 이상에 걸쳐 수제자들이 잇달아 배출돼야만 후대에 정상적으로

전승될 수 있다. 계승자가 없으면 당대에 그칠 수밖에 없다.

춘추시대 말기에 등장한 공자의 사상이 후대에 그대로 전해질 수 있었던 것도 안회처럼 뛰어난 한사(寒士)와

자공처럼 학문과 부를 동시에 달성한 책사(策士), 자로처럼 몸을 아끼지 않고 스스로를 내던지는 용사(勇士)

등의 인물이 곁에서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다.

스승이 제자를 육성해야 하는 이유다.

 

원래 보리달마는 남인도 출신으로 처음으로 선을 중국에 전한 인물이다.

그가 전한 선을 달마선이라고 한다.

선사상을 글자의 뜻풀이에 매이지 않고 조사들이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식의 조사선(祖師禪),

화두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간화선(看話禪), 모두 달마선에서 파생된 것이다.

보리달마와 관련한 대표적인 공안(公案)으로 확연무성(廓然無聖)을 들 수 있다.

’공안‘은 선종에서 도를 터득하기 위하여 깊이 생각하게 하는 문제를 말한다.

종용록(從容錄)과 더불어 선문의 쌍벽서(雙璧書)로 일컬어지는 벽암록(碧巖錄)에 따르면 불교황제로

일컬어지는 양무제가 달마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가장 성스러운 제일의 진리인가?“

달마가 말했다. ”크게 깨닫는 데에는 성스러움 같은 것은 없습니다.“

양무제가 다시 물었다. ’나와 대면하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달마가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양무제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자 달마는 이내 강을 건너 북위로 갔다.

이후 숭산 소림사로 가서 9년 동안 좌선했다. 이를 ‘면벽(面壁)9년’ 이라고 한다.

 

달마의 수행론은 크게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이다.

‘이입’은 경전학습 등의 이치를 통해 진리에 이르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행입’은 실천을 통해 진리를 깨닫는 수행법을 말한다.

달마는 ‘이입’과 ‘행입’의 방안으로 크게 4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보원행(報怨行)이다.

현세의 고통은 과거에 지은 업의 과보인 까닭에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둘째, 수연행(隨緣行)이다.

삶의 고락은 모두 인연에 의한 것이므로 담담히 불도를 닦는 게 옳다.

셋째, 무소구행(無所求行)이다.

이는 욕망, 욕구, 애착심을 억제하며 모든 것을 공(空)으로 생각해 탐욕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넷째, 칭법행(稱法行)이다.

진리를 뜻하는 법에 합당한 생활을 의미한다.

‘이입’과 이들 4가지 ‘행입’을 통틀어 ‘2입4행론(二入四行論)’이라고 한다.

달마는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방법에 대하여 이같이 말했다.

‘밖으로 모든 인연을 끊고, 안으로 헐떡이는 마음을 없애야 한다.

마음이 장벽처럼 무심해야 가히 도(道)에 들어갈 수 있다.

원문은 ’외식제연(外息諸緣), 내심무천(內心無喘), 심여장벽(心如牆璧), 가이입도(可以入道)이다.

여기의 ‘장벽’은 석녀(石女), 및 목인(木人) 등이 상징하듯 무심(無心)을 의미한다.

장벽처럼 무심한 경지가 되어야만 비로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취지이다.

달마선의 수행 방법을 흔히 안심법문(安心法門)이라고 한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진리를 터득하는 방법이다.

그의 뒤를 이은 2대 조사 혜가와 가진 문답을 보면 달마선의 성격을 보다 명확히 알 수 있다.

당시 커다란 심적 괴로움에 시달리던 혜가가 달마를 찾아가서 물었다.

”지금 제 마음이 몹시 불안합니다. 이 불안한 마음을 제거해 주십시오.“

달마가 대답했다.”네가 말한 그 마음을 가지고 오라. 그러면 편안하게 해 주마.“

혜가는 그 마음을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 없었다. 이내 달마에게 말했다.

”마음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습니다.“

달마가 말했다.”벌써 그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그러고는 혜가에게 『능가경 楞伽經』을 전했다. ‘능가경’은 초기 선종의 대표적인 경전이다.

5대 조사 홍인 때까지 존숭 되었으나 6대 조사 혜능이 금강경(金剛經)을 중시하면서

기본 경전의 자리를 내주었다.

이후 달마선은 홍인의 뛰어난 두 제자인 신수와 혜능에 의해 남종선과 북종선으로 갈라졌다.

북종선 계통이 달마선에 더 가깝다는 게 중론이다.

말할 것도 없이 혜능의 치열한 구도 정신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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