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생(妓生) 소백주(小柏舟) - 21회

2025. 4. 7. 08:58수호지

★ 기생(妓生) 소백주(小柏舟) - 21회

제21회 쓸쓸한 귀향

넋 나간 듯 마루에 잠시 서서 한 손으로 기둥을 짚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 보니 이 냉혈 찬 인간이 삼천 냥이나 되는 돈을 꿀꺽 받아 삼켜 먹고는 간다는 사람 붙잡기는커녕 노잣돈 한 푼 챙겨 주지 않으니 참으로 기가 막혀 정말로 그 자리에 꺼꾸러져 죽을 지경이었다.

​김 선비는 순간 두 주먹을 힘껏 부르쥐었다.
​“내 저 자를 당장에!...”

김 선비는 그렇게 성난 범처럼 낮게 웅얼거리며 이 정승의 방문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찢어지는 가슴을 가까스로 움켜잡고 사랑방으로 간 그날 아침 김 선비는 정말 빈털터리 맨몸으로 달랑 자신의 짐을 챙겨 등에 짊어지고 길을 나서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함께 살던 사랑방 식객 선비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작별 인사를 하고 나선 몸, 다시 돌아가 노잣돈이라도 몇 푼 챙겨달라고 이 정승에게 자존심상 도무지 말할 수도 없었고, 또 노자가 없어서 고향에 못 가겠노라고 다시 사랑방에 눌러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김 선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딱한 처지를 한탄하며, 끓는 울분을 속으로 잘근잘근 씹어 삼키면서 우직하게도 정말로 노자 한 푼 없이 고향을 향해 터벅터벅 발길을 놓는 것이었다.

​걸식을 하면서라도 오직 걸어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마음속에는 자신도 모르게 피눈물이 철철 흘러넘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길에 무슨 일이 닥칠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때는 춘삼월 멀리 달아났던 남풍이 훈풍을 몰고 돌아와 찬바람 삭막한 눈 덮인 들을 녹여 푸른 풀잎들 무성하게 돋아나는 꽃피는 시절이었다.

​겨울바람 따라왔던 겨울 철새들도 다시 물러가는 차가운 겨울바람 따라 물러나고, 그 자리에 여름 철새들이 봄꽃 향기를 따라 와 즐겁게 노래했다.

​살구꽃, 복숭아꽃, 자두꽃 등 각종 봄꽃들이 다투어 피어나고, 들에 민들레꽃 산에 진달래꽃 피는 봄은 역시 생명이 생동하는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아름다운 시절 한번 즐기지 못하고, 벼슬길이 좋다고 오로지 벼슬자리 하나 챙기기 위하여 공부하고 시험보고, 또 공부하고 시험보고, 그밖에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마침내는 돈을 바쳐 벼슬자리를 얻어 보려 하였건만...

이렇게 초라한 행색이 되고 만 자신의 지나온 날을 다시금 회상하며 김 선비는 눈가에 솟아나는 뜨거운 눈물을 훔치며, 이처럼 작별해야만 하는 낯선 한양 땅의 쓸쓸한 봄 하늘을 황량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김 선비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란 말인가?

이 정승이란 저 작자! 별 실력도 없고 욕심만 많은 성정 포악한 사람인데도 오직 예쁜 누이 하나 잘 둔 덕으로 어디에 무슨 복이 저리도 많이 들었는지 높은 자리에 앉아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고, 실력 좋고 마음씨 선량한 사람은 도무지 되는 것 하나 없이 평생을 고통 속에서 헤매다 살다 가기도 해야 하니 도대체 그 까닭을 알 길 없는 것이 이놈의 인생사인 것만 같았다.

- 22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