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호지(水湖誌) - 236
2025. 2. 19. 10:45ㆍ수호지
★ 수호지(水湖誌) - 236
왕경과 단삼랑은 요립과 10여 합을 싸웠는데, 왕경이 요립의 빈틈을 노리고 박도로 찔렀다.
요립이 넘어지자 단삼랑이 달려들어 한칼에 끝장을 내고 말았다.
반평생을 강도로 살아온 요립의 인생이 일장춘몽(一場春夢)이 되고 말았다.
왕경이 박도를 쳐들고 소리쳤다.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요립처럼 될 것이다!”
요립이 죽는 것을 본 졸개들은 아무도 항거하지 않고 모두 무기를 버리고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
왕경이 무리를 이끌고 산에 올라가 산채에 당도하니 그때 비로소 동방이 밝아왔다.
이 산의 사면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석실들이 많은데, 마치 방처럼 생겼기 때문에 방산(房山)으로 불렸고, 방주 관할이었다.
왕경은 가족들을 안정시키고, 졸개들을 점검하고 산채의 식량과 금은보화 등을 조사했다.
그리고 소와 말을 잡아 졸개들에게 상을 내리고 술을 마련하여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자축했다.
사람들은 왕경을 산채 주인으로 추대하였다.
한편으로는 무기를 만들고, 한편으로는 졸개들을 훈련시켜 관군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한편, 그날 밤 방주에서 왕경 일행을 잡으라고 보냈던 도두와 토병들 가운데 살아서 도망친 자들이 돌아가 부윤 장고행에게 말했다.
“왕경 등이 미리 알고서 관병에 대항하여 도두와 신고자 황달이 죽었습니다. 그 나쁜 놈들은 서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장고행은 크게 놀랐다.
다음 날 아침 토병들을 점검해 보니 죽은 자가 30여 명이고, 다친 자가 40여 명이었다.
장고행은 즉시 본주를 지키는 군관과 의논하여 포도관군과 감영 군사들을 보내 체포하게 하였다.
하지만 강도들이 흉맹하여 관병들은 또 패하고 말았다.
방산의 산채는 날이 갈수록 졸개들이 늘어갔고, 왕경 등은 산을 내려가 민가를 약탈했다.
장고행은 도적의 세력이 창궐하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공문을 각 현으로 보내 자신의 경계를 잘 지키는 동시에 병력을 내어 도적을 체포하는 일에 협력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방주를 지키는 병마도감 호유위와 도적을 토벌할 일을 상의하였다.
호유위는 영중의 군병을 점검하고 날을 택해 도적을 토벌하러 가기로 하였는데, 홀연 두 군영의 군사들이 난동을 부렸다.
두 달 동안 급료도 받지 못하고 군량미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지경이 되었으니 어떻게 도적과 싸울 수 있겠는가?
장고행은 변고가 일어났다는 것을 듣고, 할 수 없이 한 달 치 급료와 군량미를 먼저 지급하였다.
하지만 그건 도리어 군사들을 더 격노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 일을 담당한 자가 평소에 군사들을 잘 보살피지 않다가 군사들이 소동을 일으킨 다음에야 비로소 지급했기 때문에 도리어 군사들의 마음을 자극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평소와 마찬가지로 또 중간에 떼먹었기 때문에 쌓였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지게 된 것이었다.
화가 난 군사들은 한꺼번에 감정이 폭발하여 호유의를 죽여버렸다.
장고행은 형세가 좋지 않음을 보고 인신(印信)만 챙겨서 도망치고 말았다.
성중에 주인이 없어지자 무뢰한들이 반란을 일으킨 군사들에 부화뇌동하여 양민들의 집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했다.
왕경은 성중에 변란이 일어난 것을 알고, 그 틈에 졸개들을 이끌고 방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자 반란을 일으킨 군사들과 온갖 오합지졸들이 왕경을 따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왕경은 방주를 점거하여 근거지로 삼고 뜻을 얻게 되었다.
장고행은 끝내 도망치지 못하고 도적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왕경은 방주의 창고에 있는 돈과 식량을 털어 이조·단이·단오를 방산 산채 및 각처로 보내 말을 사들이고 군사들을 모집하게 하였다.
그리고 말 사료와 군량을 장만하기 위해 멀고 가까운 고을들을 모두 약탈하였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던 무뢰한과 범죄자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그때 황달의 밀고로 가산을 탕진해 버린 공단과 공정도 왕경을 찾아와 입당하였다.
인근 주현(州縣)들은 자신의 성을 지키기만 할 뿐 아무도 감히 군마를 동원해 도적을 토벌할 생각을 못했다. 왕경은 두 달 만에 2만여 명을 모아 인근의 상진현·죽산현·운향현 등 세 성을 점거하였다.
인근 주현에서 조정에 보고하자 조정에서는 도리어 각 지방의 군사를 동원하여 도적을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다.
하지만 당시의 관병들은 군량도 부족하고 훈련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장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장수들은 병사들을 알지 못했다.
도적의 기세가 흉맹하다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도적이 쳐들어온다는 말만 들어도 병사들은 겁을 먹었고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졌다.
도적과 마주치면 장군들은 겁을 먹었고 군사들은 나약했다.
그에 비해 왕경의 무리들은 모두 목숨을 내놓고 달려들었으므로 관군은 도적을 만나기만 하면 모조리 쓰러지고 말았다.
왕경의 세력은 더욱 커져 또 남풍부를 점거하였다.
동경에서 보낸 장수들은 채경이나 동관에게 뇌물을 먹이지 않으면 양전이나 고구에게 뇌물을 먹인 자들이었다.
채경 등은 뇌물을 받기만 하면 장수가 될 자들이 어리석거나 겁 많은 자라도 상관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수들은 본전을 찾기 위해 멋대로 군량을 잘라먹고, 양민을 죽이고서는 도적을 잡은 공인 양 꾸미기도 했다.
병사들이 민가를 약탈해도 내버려두었으므로 지방이 소란해지고 양민이 핍박을 받아 도리어 도적을 따르는 형편이 되었다.
이때부터 도적의 세력은 점점 더 커져서 병력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조는 본래 형남 사람이었기 때문에 점쟁이로 꾸미고 형남성으로 들어가 은밀히 악당들을 규합하여 안에서 내응하여 왕경은 형남성도 점거하였다.
왕경은 이조를 군사(軍師)에 임명하고, 스스로 초왕(楚王)이라고 칭하였다.
그러자 강 위의 도적들과 산 위의 강도들이 모두 와서 복종하였다.
3~4년 만에 왕경은 송나라의 여섯 개 군주(軍州)를 차지하였다.
마침내 왕경은 남풍성에 궁궐을 짓고 연호를 정하였다.
송나라 조정의 관제를 본떠, 문무백관을 임명하였다.
이조는 군사도승상(軍師都丞相), 방한은 추밀(樞密), 단이는 호국통군대장(護國統軍大將), 단오는 보국통군도독(輔國統軍都督), 범전은 전수(殿帥), 공단은 선무사(宣撫使)에 임명하였다.
공정은 전운사(轉運使)에 임명하여 돈과 곡식의 출납을 관장하게 하고, 구상은 어영사(御營使)에 임명하였다. 그리고 단삼랑을 왕비로 세웠다. 선화 원년에 난을 일으켜 선화 5년 봄에 이런 일이 이루어졌다.
그때 송강 등은 하북에서 전호를 토벌하면서 호관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회서의 왕경은 또 운안군과 완주를 격파하여 모두 8개 군주(軍州)를 점거하게 되었다.
남풍·형남·산남·운안·안덕·동천·완주·서경이었는데, 거기에 속한 현은 모두 86개였다.
왕경은 또 운안에 행궁을 세우고 시준을 유수관(留守官)으로 임명하여 운안군을 지키게 하였다.
왕경이 유민 등을 시켜 완주를 침략하였을 때 완주는 동경에 가까운 곳이었으므로 채경 등은 더 이상 천자를 속이지 못하고 사실을 아뢰었다.
도군황제는 채유와 동관에게 왕경을 토벌하고 완주를 구원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하지만 채유와 동관은 군대를 제대로 다스리지도 못했고 병사들에게 포학하기만 하여 병사들의 마음이 흐트러져 있었다.
그래서 유민에게 대패를 당하고 완주는 함락되었다. 동경은 공포에 떨었다.
채유와 동관은 벌이 두려워 오로지 천자를 속이기만 급급하였다.
그 사이에 적장 유민과 노성 등은 채유와 동관을 이긴 기세를 몰아 노주와 양주를 포위하였다.
송강 등이 하북을 평정하고 회군하다가 다시 회서를 토벌하라는 조서를 받은 것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참으로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도 없고, 말이 발굽을 멈출 새도 없었다.
송강은 20여 만 대군을 거느리고 남쪽을 향하여 출발했다.
황하를 건너자, 조정에서 또 공문이 내려와 재촉하였다.
진안무와 송강의 병마는 빨리 가서 노주와 양주를 구원하라는 내용이었다.
송강 등은 더위를 무릅쓰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속현과 사수를 거쳐 양적주 경계에 이르렀다.
가는 동안 백성을 추호도 범하지 않았음을 물론이다.
도적들은 송강의 병마가 당도한 것을 듣고, 노주와 양주 2곳의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그때 장청·경영·섭청은 전호가 처형되는 것을 보고 나서 송강이 왕경을 토벌하는 것을 도우라는 조칙을 받들어 동경을 떠나 영창주에 도착한 지 보름이 지나고 있었다.
송선봉의 병력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 사람은 나아가 영접하였다.
인사를 마친 다음 천자의 은혜로 관작 받은 일을 자세히 얘기했다.
송강을 비롯한 두령들이 모두 칭찬해 마지않았다.
송강은 장청에게 군중에서 명령을 대기하라고 하였다.
송강은 진안무·후참모·나무유 등을 청하여 양적성에 머물게 하고, 자신의 대군은 성에 들어오기 불편하여 방성산 숲속 녹음이 짙은 곳에 주둔하여 더위를 피하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들이 천리를 걸어오느라 더위 먹고 지친 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안도전으로 하여금 약을 지어 치료하게 하였다.
또 말들도 선선한 곳에서 쉬게 하고, 황보단으로 하여금 말들을 보살펴주게 하였다.
오용이 말했다.
“대군이 숲속에 주둔하고 있는데, 적들이 화공을 할까 염려됩니다.”
송강이 말했다.
“적들이 화공을 하기를 바라고 있소.”
송강은 군사들을 보내 높은 언덕 나무 그늘 아래에 대나무와 띠풀로 작은 망루를 만들게 하였다.
그러자 하북의 항장 교도청이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송강에게 아뢰었다.
“제가 선봉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오늘 작은 공이라도 세우고자 합니다.”
송강은 크게 기뻐하며, 은밀히 교도청에게 계책을 일러주어 언덕 위의 망루로 보냈다.
송강은 군사들 가운데 강건한 자 3만을 선발하여 장청과 경영으로 하여금 1만을 거느리고 동쪽 산기슭으로 가서 매복하게 하고, 손안과 변상으로 하여금 1만을 거느리고 서쪽 산기슭으로 가서 매복하게 하였다.
아군 중군에서 굉천포 터지는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뛰어나오라고 하였다.
군량과 마초는 산 남쪽의 평지에 쌓아놓고, 이응과 시진으로 하여금 5천 군사를 거느리고 지키게 하였다.
송강이 배정을 끝내자, 공손승이 말했다.
“형님의 계책이 아주 묘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더위에 지치고 군사들이 먼 길을 오느라 피로하고 병이 나 있어서 만약 적군의 정예병이 돌격해 오면 아군이 비록 10배나 많다 하더라도 승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빈도가 작은 술법을 부려 더위를 없애고 인마가 시원하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러면 자연히 힘이 나겠지요.”
말을 마치자 공손승은 검을 짚고 술법을 부리기 시작했다.
발로는 괴강(魁罡) 두 글자를 밟고, 왼손으로는 뇌인(雷印)을 짓고, 오른손으로는 검결(劍訣)을 짚었다.
정신을 집중하여 동남방을 향해 기운을 내뿜고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잠깐 사이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짙은 구름이 산봉우리에서부터 몰려나와 방성산 전체를 뒤덮어 20여 만의 인마가 모두 선선한 바람을 쐬면서 기분이 상쾌해졌다.
하지만 방성산 바깥은 여전히 쇠붙이를 녹일 정도의 뜨거운 해가 내리쬐고 있어서 매미들만 시끄럽게 울어댈 뿐 새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다.
송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기뻐하면서 공손승의 신통한 도술을 칭찬하였다.
그렇게 6~7일 지나면서 또 안도전이 군사들을 치료하고 황보단이 말들을 보살펴주어 사람과 말이 모두 점점 강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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