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 74화
2021. 5. 17. 07:04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74화
☞ 기어이 파헤친 진시황의 무덤 여산궁(驪山宮)
다음 날 아침 범증은 항우를 찾아와 울면서 다시 말한다.
“대왕 전하! 진시황의 무덤을 파헤치게 되면 백성들의 저주에 찬 원망을 막아낼 길이 없사옵니다. 그러하오니 무덤을 파헤치는 것만은 중지하시옵소서. 그래야만 대왕 전하의 전도가 양양하실 것이옵니다.”
백발이 성성한 범증이 이렇게 간곡히 간하는 모습은 처량해 보이기까지 하자, 항우는 비로소 다시 생각되는 바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군사가 이토록 반대하신다면 단념하기로 하지요.”
패망한 제왕이라도 그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을 항우도 모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이 문제는 일단락이 되어 버린 듯이 보였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항우가 종일 정무(政務)를 보고 저녁 무렵에 내전(內殿)에 들어오니, 사랑하는 아내 우미인(虞美人)이 보이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하는 아내인지라, 항우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왕후가 어디 가셨느냐?”
“어디를 가셨는지 곧 찾아 모시겠사옵니다.”
※ 註) ‘우미인(虞美人)’의 미인(美人)의 뜻.
미인(美人)을 단지 ‘아름다운 여인’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듯하여 ‘사족’을 붙여본다.
물론 항우의 애첩인 우미인이 대단한 미모의 소유자였다는 것은 전해오는 글이나 초한지에서 항우가 우랑(虞娘)을 처음 만났을 때 한눈에 뿅~ 간 것만 보더라도 미루어 짐작이 간다.
하지만 미인의 유래는 춘추 전국시대부터 전한(前漢) 개국 전까지 제왕의 여인(妻妾, 처첩)은 관직이 있었는데, 정부인 1명을 후(后)라 하고, 후를 제외한 왕비급을 비(妃), 그 다음이 부인(夫人), 희(姬), 미인(美人) 순으로 호칭하였다. 그러니 우미인은 제왕의 여인 관직으로는 가장 낮은 것이었고, 나중에 우희(虞姬)라고 한 것을 보면 한 단계 높아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만 황우가 다른 여인과 결혼한 기록이 없고, 해하에서 죽을 때까지 함께 한 여인이었는데, 어찌 정부인인 후(后)로 부르지 않았는지는 의문이다.
전쟁에만 미쳐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패자(敗者)라서 승자의 기록에 그리 된 것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다가 후한 시대 이후에는 비. 빈 등으로 호칭이 바뀌는데... 개인의 추측과 생각일 뿐이다.
시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우미인을 찾았다. 그러나 우미인은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다.
사랑하는 아내가 보이지 않으므로 항우는 매우 걱정이 되었다.
백년가약을 맺은 그날부터 줄곧 생사고락을 같이해 오던 아내가 아니었던가!
그러니 항우에게는 백만 대군보다도 소중한 것이 아내였다.
이토록 사랑하는 아내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항우는 화가 치밀어 올라 시녀들에게 벼락같은 호통을 질렀다.
“이것들아! 왕후가 어디 가셨는지도 모르고,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이냐? 왕후가 어디 가셨는지 당장 찾아오너라!”
마침 그때 왕후(王后)가 빨래 광주리를 옆에 끼고 뒷문으로 들어오고 있었으니 항우는 우미인을 보자, 허겁지겁 마주 달려가며 다급하게 물었다.
“여보! 당신은 어디를 갔다 오는 길이오?”
우왕후는 빨래 광주리를 내려놓고 방그레 미소를 지으며,
“제가 가기는 어딜 가겠어요. 개천에 흘러가는 물이 하도 맑기에 빨래를 빨아가지고 오는 길인걸요. 당신께서 퇴청하시기 전에 다녀온다는 것이 조금 늦었네요.”
하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항우는 그 대답을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뭐요? 빨래를 하러 갔었다고? 이 사람이? 여보! 당신은 보통 여자가 아닌 왕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그런 왕후가 무슨 빨래를 한다는 말이오?”
우미인은 얼굴도 아름답지만 마음씨는 얼굴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여인이었기에 그녀는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남편에게 말했다.
“저는 왕후이기보다는 평범한 지어미로 살고 싶어요. 당신은 남자라서 잘 모르시지만, 여자들은 남편의 옷을 손수 빨아드릴 때가 가장 행복한 법이에요.”
귀엽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으나 항우는 여자들의 이 같은 섬세한 감정이 이해될 턱이 없었다.
“당신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게야? 나는 천하를 호령하는 초패왕이고, 당신은 당당한 왕후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세상에 어느 왕후가 빨래를 손수 하더란 말이야? 이제부터는 행여 빨래에는 절대 손도 대지 말아요!”
그러나 우미인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말한다.
“다른 빨래는 몰라도 당신 옷만은 제가 직접 빨고 싶어요. 그것만은 말리지 말아주세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우미인은 워낙 여자다운 성품을 타고났다.
때문에 왕후로서 거들먹거리며 호강을 누리기보다는 알뜰한 주부로서 귀여움을 받는 여인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우는 아내의 그러한 성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무슨 소리를 하고 있어? 왕후는 왕후로서의 체통을 세워야 하는 법이야. 빨래가 말이 되는 소리야?”
하고 정색을 하며 꾸짖어 주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내의 목을 보니,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는 싸구려 자연석(自然石) 목걸이가 아닌가!
그 목걸이는 지난날 항우가 결혼 기념으로 걸어 준 것으로 항우는 그때만 해도 값진 보석을 살 돈이 없어서 파란 빛깔의 자연석 목걸이를 선물로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와는 사정이 크게 달라져 있지 않은가.
항우 자신은 ‘대왕’이고, 사랑하는 아내 우미인은 ‘왕후’가 아닌가!
“아니 그래, 당신은 왕후가 된 지금에도 그런 싸구려 목걸이를 아직도 걸고 있단 말인가?”
우미인은 뜻밖의 말이란 듯 눈을 커다랗게 뜨면서,
“당신은 무슨 말씀을 하세요? 이 목걸이는 당신이 결혼선물로 주신 것이에요. 따라서 제게는 어떤 값진 보석보다도 귀중한 선물인걸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라고! 그때는 돈이 없어 부득이 그런 것밖에 줄 수 없었지만, 지금의 나는 초패왕이 아닌가? 그런데도 일국의 왕후인 당신이 창피스럽게 어떻게 그런 싸구려 목걸이를 걸고 다니냔 말이오?”
그러나 우미인의 생각은 남편하고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창피스럽기는 뭐가 창피스러워요. 왕후가 되었거나 말거나 당신의 아내이기는 마찬가지인걸요. 남들이 뭐라거나 제게는 이 목걸이는 소중한 보물이에요.”
“허어... 정말 안 되겠는걸!”
항우는 혼자 개탄하다가 문득 시황제의 무덤 속에 들어있을 수많은 보물들이 머리에 떠올라
“그러지 말고, 조만간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쳐서 기가 막힌 보물을 선사할 테니, 제발 그 싸구려 목걸이만은 벗어 버리도록 하라고!”
우미인은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쳐 기가 막힌 보물을 선사하겠다는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라 남편의 팔을 와락 움켜잡으며 따져 묻는다.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치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시황제의 무덤 속에는 희귀한 보물들이 산더미처럼 들어있거든. 그 보물들을 모두 꺼내 가지고 그중에서도 가장 진귀한 보물을 당신에게 선사할 테니, 그 싸구려 목걸이만은 그만 벗어 던지란 말야.”
그러자 우미인은 남편의 팔을 두 손으로 움켜잡으며 애원하듯 말한다.
“저는 아무것도 필요치 않으니, 제발 시황제의 무덤만은 파헤치지 마세요. 제왕의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은 절대로 안 될 말씀이에요. 당신이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쳐 보세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얼마나 저주하겠어요?”
“나는 이 나라의 절대 군주야. 내가 하는 일에 어느 놈이 감히 반대를 하겠어?”
“아무리 그렇기로 남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은 끔찍스럽고 옳지 못한 일이에요. 옳지 못한 일을 강행하면 하늘조차 노여워하는 것이에요. 저는 당신이 주신 싸구려 목걸이로도 충분히 행복하니까, 제발 무덤만은 파지 마세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 얘기는 그만하고 잠이나 잡시다!”
항우는 적당히 얼버무리기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칠 결심을 굳게 먹었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치지 않겠노라고 범증에게 굳게 약속했던 항우는 내전으로 들어오기 직전까지도 그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아내의 목에 걸려 있는 싸구려 목걸이를 본 순간, 그의 결심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이 나라의 절대 군주다. 절대 군주인 내가 사랑하는 아내에게 주기 위해 무덤 속에서 보물을 파내기로 뭐가 나쁘단 말인가! 자고로 부부는 일신(一身)이라고 일러오지 않던가? 왕후를 기쁘게 해 주는 것은 왕으로서의 나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또 생각한다.
‘아내가 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무덤을 파헤친다는 것을 끔찍스럽게 여기는 것이지, 정작 진귀한 보물들을 듬뿍 안겨주면 아내는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 아닌가!’
항우는 자기 나름대로 간단하게 판단하고, 아내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 기어코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칠 결심을 하였다.
그로부터 며칠 후, 항우는 범증과 우미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치려고 1만 군사를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아침 일찍 군사들을 직접 인솔하고 시황제의 무덤인 여산궁(驪山宮)으로 향했다.
여산궁은 거창하고도 호화로운 방대한 능궁(陵宮)이었다. 입구에서부터 아름드리 거목(巨木)들이 햇빛조차 새어들지 못할 정도로 무성했다.
울울창창한 수목 사이사이에는 호화롭기 그지없는 전각(殿閣)들이 산재해 있었다.
이처럼 전각이 수다한 밀림지대를 20리쯤 걸어 들어가니, 그곳에는 호랑이와 코끼리의 석상(石像) 등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다시 20리쯤 더 들어가자 철의(鐵衣)를 입은 문무백관(文武百官)들의 입상(立像)이 능침(陵寢)을 향하여 두 손을 감싸 잡고 좌우에 도열해 있었다.
이렇게 시황제의 능침을 향하여 도열해 있는 문무백관들의 입상은 무려 3천 개나 되어 그 거리만도 20리가 넘었다.
항우가 능침 앞에 이르러 정상을 올려다보니, 능침은 마치 하늘에 솟아오른 태산처럼 장엄하기가 짝이 없었다. 게다가 능침 기슭에는 오만 가지 기화요초(奇花妖草)가 무성하였다.
“아아, 진실로 엄청난 규모로구나! 시황제가 생전에 무덤을 호화롭게 꾸며놓았다는 말은 들어왔지만, 이처럼 거창한 규모인 줄은 정말로 몰랐구나.”
앞장서서 걸어가던 항우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성이 절로 나왔다.
시황제의 능침의 규모의 거창함과 치밀함에 놀랐던 것이다.
마침내 항우는 1만 군사에게 호기로운 명령을 내렸다.
“이 무덤 속에는 수많은 보물이 들어있으니, 어서 무덤을 파헤쳐라!”
항우는 1만 군사를 총동원한 후 2대로 나누어 주, 야로 여산궁을 헐어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산궁은 전체가 집채 같은 돌로 쌓아 올린 무덤인지라, 그것을 헐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만여 군사가 총동원되었다.
그러나 나무를 베어내고 전각을 헐어내고 돌을 추려내고 흙을 파 옮기고 하다 보니, 한 달이 지나도록 발굴 작업은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이런 속도로 파내려 가면 몇 해가 걸릴지 모를 형편이었다.
마침내 항우는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이거 안 되겠다. 발굴 작업을 석 달 안으로 끝낼 수 있도록 10만 군사를 더 동원하여라!”
그러나 좁은 지역에 사람만 많이 동원한다고 발굴 작업이 쉽게 끝날 일이 아닌데도 항우는 지지부진한 발굴 작업에 조바심을 느끼면서,
“보물을 어느 곳에 두었는지 그곳만 파 들어가면 될 터인데, 누가 그곳을 아는 사람이 없겠느냐? 상을 크게 내릴 터이니, 그곳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아내도록 하여라.”
그러자 영포(英布)가 달려와 아뢴다.
“지난날 소신이 노역부로서 이 공사에 동원된 일이 있는 관계로 보물을 넣어 둔 곳을 소신이 잘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면 그대가 진두지휘를 하여 그곳을 우선 파헤치도록 하라. 보물이 나오게 되면, 그대에게는 중상(重賞)을 주리라.”
이번에는 영포의 진두지휘로 무덤을 파헤쳐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영포가 지목한 곳으로부터 5백 자쯤 파 들어가니, 홀연 백 평 가량 되는 널따란 광장(廣場)이 나왔다.
그 광장을 남쪽으로 50보쯤 걸어 들어가니, 돌로 만든 누문(樓門)이 있었다.
돌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기부터는 기다란 복도였는데, 복도에는 돌로 아로새겨진 용(龍)들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좌우로 도열해 있었다.
이런 복도를 천 보쯤 걸어가니 그제야 분문(墳門)이 나온다.
그 분문을 열자, 그 안에는 대전(大殿), 향전(享殿), 침전(寢殿) 등 대궐을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삼궁 육원(三宮六院)이 있었다.
시황제의 시체가 들어있는 석관(石棺)은 침전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석관 앞에는 금은보화 60만 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가 천하의 보물들이었다.
항우는 그 보물들이 처음 보는 희귀한 것뿐인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밖에 있는 보물들조차 이렇듯 뛰어난 물건들일진대, 관속에 들어있는 보물은 얼마나 귀한 것이겠느냐? 이왕이면 석관도 때려 부수고, 그 속의 것도 꺼내도록 하여라.”
그러자 영포가 뛸 듯이 놀라며 아뢴다.
“대왕 전하! 석관을 건드렸다가는 큰일이 일어나옵니다.”
“무슨 큰일이 난다는 말인가?”
“석관 속에는 철포(鐵砲)와 대노(大弩)를 설치해 놓아서 관을 부수면 철전(鐵箭, 쇠 화살)과 포석(砲石) 등이 빗발치듯 쏟아져 나와 여기 있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게 되옵니다. 그러니 석관은 절대로 건드려서는 아니 되옵니다.”
“허어! 관 속에 그런 무서운 장치가 되어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석관은 건드리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어라.”
항우도 죽기는 싫어서 밖에 보이는 보물만 수습하도록 명령하고, 이번에는 침전 뒤에 있는 ‘지하 아방궁’으로 가 보았다.
지하 아방궁도 ‘지상 아방궁’과 똑같은 규모로 거대하고 정교하게 지어져 있었다.
항우는 지하 아방궁의 호화로움에 의분을 느끼며,
“아아, 국가의 재물을 이렇듯 탕진했으니, 진나라가 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구나!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불을 놓아 송두리째 태워버려라.”
병사들이 곧 불을 놓아 지하 아방궁을 태워버리기 시작했는데, 그 규모가 얼마나 방대했던지 지하 아방궁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석 달이나 계속되었다.
함양 백성들은 그 광경을 보고, 항우의 무지하고 잔학함에 모두 몸서리를 쳤다.
그러나 항우는 백성들의 원성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보물 중에서도 가장 값진 것을 골라 집으로 돌아왔다. 말할 것도 없이 사랑하는 아내에게 주기 위해서였다.
한편, 항우의 아내 우미인은 이날도 남편 모르게 시냇가에서 빨래를 한 후 일찌감치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남편의 옷을 직접 빤다는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의무감 같은 것이었다. 맑은 물이 좔좔 흘러가는 시냇가에서 사랑하는 남편의 옷을 빨고 있노라면 그녀는 전신에 행복감이 충만해 오는 것이었다.
퇴청한 항우가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왔다.
그리고 힘차게 포옹을 해주며 아내에게 묻는다.
“당신 오늘은 빨래질을 하지는 않았겠지?”
“안 했어요. 대왕님께서 하지 말라는 것을 제가 왜 했겠어요?”
우미인은 양심상 괴로웠지만, 남편의 꾸지람을 들을까 두려워 거짓말을 해버렸다.
“음, 잘했어! 당신이 내 말을 잘 들어 주었으니, 오늘은 대왕의 자격으로 왕후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사하겠어.”
항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들고 온 꾸러미를 끌러 보석 목걸이를 하나 꺼내더니,
“지금 당신 목에 걸려 있는 싸구려 목걸이는 창피스러운 것이니까, 이제부터는 이것을 걸고 다녀요!”
하고 말을 하며, 낡은 목걸이를 풀어내고, 새 목걸이를 걸어 주는 것이었다.
항우가 우미인 목에 걸어 주는 목걸이는 황옥, 청옥, 벽옥(碧玉), 자정(紫晶), 호박(琥拍), 비취(翡翠), 옥수(玉髓), 홍보석, 녹보석, 황보석, 남보석(藍寶石), 담황옥(淡黃玉) 등 오색(五色)이 영롱한 열두 가지의 보석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정교하게 아로새겨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목걸이였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시황제의 무덤 속에서 파낸 목걸이였던 것이다.
우미인도 여자인지라 남편이 목에 걸어 주는 휘황찬란한 목걸이가 싫을 리는 없었다.
“어마! 어디서 이런 진귀한 목걸이를 구해 오셨어요?”
우미인은 뛸 듯이 기뻐하며 남편에게 묻자, 항우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 소리 내 웃으며 말했다.
“어때? 이만하면 마음에 드는가? 당신은 내가 천하의 대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해요. 내가 구하고자 하면 무엇인들 못 구하겠어! 왕후의 목걸이는 이 정도는 되어야 체면이 서니까, 오늘부터는 이것만 걸고 다녀요.”
“그래도 제게는 처음부터 쓰던 자연색 목걸이도 소중한 것이에요.”
우미인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별안간 어떤 예감을 느꼈는지 일순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고, 얼굴빛이 심각해지더니 남편에게 따지듯 물었다.
“도대체 이 목걸이는 어디서 난 거예요?”
항우는 문제의 목걸이가 무덤 속에서 파낸 목걸이라는 것을 아내에게는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내 우미인은 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치는 것을 극력 반대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항우는 얼른 이렇게 둘러대었다.
“제후(諸侯)들이 왕후인 당신에게 선사하기 위해 각 지방의 특산물을 하나씩 모아서 이 같은 목걸이를 만들어 왔군 그래. 그런 줄 알고 소중히 걸고 다녀요.”
그러나 우미인은 그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여자들은 감성이 예리한 법이라 우미인은 모든 것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부르짖듯 말했다.
“아니에요. 이것은 시황제의 무덤 속에서 파내 온 물건임이 분명해요.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목걸이에 십이 지신들의 귀신상이 새겨져 있겠어요. 속이려 하지 마시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씀해 주세요.”
우미인이 워낙 진지하게 나오는 바람에 항우는 끝까지 속일 수가 없었다.
“무덤 속에서 파낸 물건이면 어떻다는 거야? 옛날에 황후가 사용하던 물건이라는 것을 알아야지. 어디서 생긴 물건이건 간에 내가 당신에게 주는 물건임에는 틀림없으니까. 그런 줄 알고 걸고 다니면 될 게 아닌가?”
“비록 당신이 주시는 물건이라도 무덤 속에서 파낸 물건이라면 저는 싫어요. 이런 물건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귀신이 쫓아다니는 것 같아서 언젠가는 우리가 불행하게만 될 것 같아요.”
우미인은 그렇게 말하며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끌러내려고 하자 항우는 버럭 화를 냈다.
“못난 소리 그만하라고! 나는 천하를 호령하는 대왕이야. 귀신 따위가 어찌 감히 우리를 불행하게 만들 수가 있겠냐고? 잠꼬대 같은 소리를 작작하라고.”
“이런 물건을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싫은 걸 어떡해요.”
“못난 소리만 하고 있네.”
“아무리 싫어도 목에 꼭 걸고 다녀야만 하겠어요?”
“물론이지! 남편이 주는 선물을 마다하면, 그것은 남편에 대한 신의를 배반하는 것과 다름없는 거야. 그러니 당신이 내 말을 기어코 듣지 않게 된다면 목을 쳐 버리지, 그냥 살려 둘 줄 아는가?”
사랑에 겨워서 하는 말이었지만, 농담치고는 무시무시한 말이 남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우미인은 남편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 말이 단순한 농담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보석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면서,
“당신이 그토록 원하신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목걸이를 걸고 다니겠어요.”
그러면서도 결혼선물로 받았던 싸구려 자연석 목걸이를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그날부터 우미인의 마음속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가셔질 때가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가느다란 줄로 목을 죄어 오는 것만 같은 불안감이 있었지만 그것은 남편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혼자만의 슬픔이었다.
- 제 75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