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52화
2021. 4. 25. 08:23ㆍ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52화
☞ 범증(范增)의 웅대한 전략
한편, 패주(敗走)를 거듭한 장한은 절치부심(切齒腐心, 이를 갈면서 속을 썩인다는 뜻으로 매우 분하여 한을 품다.)으로 이우, 한장 등과 함께 새로운 전략을 세운다.
“적은 연승의 여세를 몰아 오늘 밤에 반드시 야습해 올 것이다. 그러므로 만반의 대책을 세워야 한다. 이우는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산기슭에 매복하고, 한장은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산기슭에 매복해 있으라. 기다렸다가 적이 나타나면, 좌우협공으로 적을 송두리째 괴멸시킨다. 나는 본진을 비워두고 사마흔과 함께 본진의 후방에 기다리고 있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적의 중앙을 격파해 갈 것이다. 전황이 우리 뜻대로 전개되면 항우를 생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항우만 생포하면, 전쟁은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초군은 초군대로 장한을 생포할 전략을 짜고, 진군은 진군대로 항우를 생포하는 작전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 그날 밤 축시가 되자, 항우는 좌군과 우군을 적진으로 먼저 쳐들어가게 하고, 자신은 3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적의 본진 중앙으로 휘몰아쳐 들어갔다.
후방에서 대기하던 장한은 항우군의 함성을 매복해 있던 이우와 한장이 이끄는 아군의 함성으로 착각하고 달려 나오니 구름처럼 몰려오는 군사들 모두가 항우의 초군이 아닌가?
“아뿔사!”
장한은 크게 당황하였다. 그러나 사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이제는 이판사판이라 정면 대결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둠 속에서 양군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백전노장인 장한이었지만 항우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힘에 부치자 후퇴를 명하고자 할 때, 좌우로부터 커다란 함성과 함께 또 다른 군사들이 들이닥치면서,
“장한은 듣거라. 이우와 한장의 군사는 이미 전멸되었다. 너는 독 안에 든 쥐다!”
하고 고함을 지르는 것이 아닌가?
영포와 환초가 어느새 이우와 한장의 군사를 제압하고, 항우의 군사들과 합류하고자 달려오는 길이었다.
장한은 그 소리를 듣자, 눈앞이 더욱 캄캄해져 기수를 돌려 무작정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항우를 비롯하여 영포, 환초 등이 무려 30여 리나 장한을 추격하는데, 달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이라 그만 장한의 행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여기가 어디냐?”
항우가 뒤따르는 장졸들에게 물으니, 그곳은 조왕이 진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거록성(鉅鹿城) 부근이었다. 항우는 그 사실을 알고 영포에게 명한다.
“그대는 수색을 계속하여 장한을 꼭 생포해 오라! 나는 거록성으로 조군을 구출하러 갈 것이다.”
항우가 군사를 몰아 거록성으로 달려가니 조군 대장 장이(張耳)와 진여(陳餘)가 성문을 활짝 열고 눈물로 영접한다.
“장군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던들 성 안에 갇혀 있던 저희들은 모두 아사(餓死)했을 것이옵니다.”
조왕도 항우의 손을 붙잡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역발산 기개세의 장군의 명성은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처럼 막강한 장한의 군사를 이처럼 쉽게 물리쳐 주실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하고 극구 치하하며 성대한 환영연을 베푼다. 사실 항우가 아니었으면 조왕과 조군은 거록성 안에서 아사를 면키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영포는 항우의 명을 받기가 무섭게 장한의 행방을 샅샅이 수색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떤 나무 아래에서 지쳐 쉬고 있는 장한을 발견한다.
“네 이놈 장한아! 네가 도망가면 어디까지 가겠느냐?”
영포는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비호같이 달려간다. 그러자 장한은 혼비백산, 또다시 도망치기에 바빴다.
이렇게 쫓고 쫓기기를 무려 20여 리, 두 사람의 거리가 눈앞에까지 이르렀을 때, 숲속에서 일군의 군사가 함성을 지르며 튀어나오며,
“영포야! 내 칼을 받아라!”
하며 고함을 지르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구호대장의 한 사람인 장평(章平)이었다.
영포는 장평과 30여 합을 싸웠다. 장평은 장한을 멀리 도망시키려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그러나 장평은 영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장평이 마침내 말머리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하니 영포가 소리친다.
“네 이놈, 어디로 내빼느냐! 장한 대신 네놈 목이라도 가져가야겠다!”
이렇게 장평을 뒤쫓다 보니, 이번에는 ‘구호대장’의 한 사람인 주웅(周熊)과 왕관(王官)이 한꺼번에 나서는 게 아닌가?
세 명의 젊은 장수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니 맹장인 영포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영포는 거록성으로 일단 후퇴하여 항우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명을 받들고 장한을 생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사오나 도중에 ‘구호대장’들이 나타나 실패하였습니다. 군율에 의해 소장에게 중벌을 내려 주시옵소서.”
항우는 껄껄껄 웃고 나서 영포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장한 또한 진국의 명장이므로 그대 혼자서 생포하기는 벅찬 인물이었소. 혼내 준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어찌 벌을 준단 말이오.”
조왕이 항우와 영포를 영접하여 축하연을 베풀고자 하자 항우가 사양하며,
“장한은 워낙 지모가 출중하여 그냥 두었다가는 언제 또다시 쳐들어올지 모르기 때문에 장한을 끝까지 추격하여 함양까지 쳐들어갈 생각입니다.”
항우는 생포해 온 왕리(王離)와 섭간(涉間)의 목을 그 자리에서 베어버리고 다시 출동하려 하였다.
그러자 군사 범증이 다가와,
“장군! 긴히 여쭐 말씀이 있사옵니다.”
“무슨 말씀이오?”
항우가 마상에서 반문하자 범증은 허리를 굽히며,
“죄송스런 말씀이오나, 이야기가 길어질 듯 하오니 일단 막사로 들어가셔서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범증의 얼굴빛이 평소와 같지 않아 보여서 항우는 막사 안으로 범증을 따라 들어갔다.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좌정을 하고 나자, 범증은 조용히 말을 꺼낸다.
“지난 사흘 동안 장군께서는 아홉 번 싸우셔서 아홉 번을 모두 이기셨는데, 이는 과거의 어떤 전사(戰史)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혁혁한 전과이옵니다. 삼가 축하의 말씀을 올리옵니다.”
항우는 그 말을 듣고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런 말씀을 하시려고 나를 일부러 막사로 들어오라고 하셨소? 군사께서 그렇게 칭찬을 해 주시니 대단히 기쁘오이다. 그러나 내가 구전구승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군사의 탁월하신 지도와 휘하 장수들이 용감하게 싸워 준 덕택이었소. 그것을 어찌 나만의 공적이라 할 수 있겠소?”
“아니옵니다. 우리 군사들이 그처럼 용감했던 것은 장군이 계셨기 때문이옵니다. 예부터 ‘용장 밑에 약졸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면 구전구승의 엄청난 승리는 모두가 장군이 계셨기 때문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튼 고맙소이다. 나는 이제부터 장한을 끝까지 추격하여 함양까지 쳐들어갈 계획인데, 군사께서는 그 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시오?”
범증은 자세를 바로 잡고 말한다.
“솔직히 장군께 드리고 싶었던 게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항우는 그제서야 범증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묻는다.
“군사께서는 나의 작전 계획에 찬성을 못 하신다는 뜻인가 보구려.”
“찬성, 불찬성보다 지금 곧 장한을 추격하여 함양까지 쳐들어가시는 계획은 일단 보류하심이 좋을 것 같사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는 애초에 왕명을 받들고 출정할 때 조왕을 구출하라는 군령만 받았을 뿐 멀리 함양까지 쳐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은 일은 없사옵니다. 따라서 대왕의 윤허도 없이 독단으로 함양까지 쳐들어가는 것은 왕명에 위배되는 월권행위가 되옵니다.”
“으음... 군사의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그럴 수 있겠구려. 그러나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진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있지 않소? 그렇다면 지금처럼 군사적으로 유리할 때 적을 깨끗이 쓸어버리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범증은 그 말에도 고개를 가로젓는다.
“군사적 측면으로도 계속 우리에게 유리하다고만 볼 수 없사옵니다.”
항우는 범증의 말에 일종의 불쾌감이 느껴졌다.
“아니, 우리는 지금까지 진군과의 전투에서 구전구승을 이루었는데, 어째서 군사적으로 유리하지 않다는 말씀이오?”
승리에 도취해 있는 항우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고, 범증은 항우의 우직스러운 성품을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무릇 군사 작전은 연전연승을 하고 있을 때가 가장 경계해야 할 때이옵니다. 우리 군사들은 아홉 번 싸워 모두 이기는 바람에 마음이 교만해지고 몸은 지쳐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군사들에게 지금 무엇보다도 시급한 것은 안정과 휴식입니다.”
항우는 그 점에는 수긍이 가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그 말씀은 알아듣겠소이다.”
“그뿐만이 아니옵니다. 진나라 군사들이 비록 허약하다고는 하오나 함양에는 아직도 50만의 대군이 건재합니다. 20만 밖에 안 되는 피로한 군사를 수천 리나 무리하게 이동해 갔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50만의 대군과 싸운다면, 어느 편이 유리하겠습니까? 우리는 그 점을 깊이 유념하셔야 할 것이옵니다.”
성미가 급한 항우는 승리에만 급급하여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하고 있었던지라 항우는 그제야 자신의 경솔함을 깨닫고 범증의 손을 잡으며 말한다.
“군사의 말씀을 듣고 보니, 과연 내가 너무 서둘렀소이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부터 어떻게 하는 게 좋겠으며, 또 어떻게 해야 함양을 함락시킬 수가 있겠소?”
“우리는 여기서 멀지 않은 ‘장남’이라는 곳에 진을 치고 병사들을 추스르면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일 것이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저들 내부에서 이번 전투에서 패한 것을 두고 혼란이 일어날 것이니 그때 본격적인 작전을 펼치면 될 것입니다.”
“저들의 내부 혼란이란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오?”
“진나라의 이세 황제는 워낙 혼매(昏昧)하여 주색밖에 모르고, 조고라는 자는 휘두르는 권력의 맛에 취하여 외침 방어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않는 위인입니다. 그런데 장한은 많은 군사를 잃었으므로 추가로 지원군 파병을 성화같이 요청할 것이 뻔한 일이옵니다. 그것 때문에 조고와 장한은 심한 의견 충돌을 일으켜 진나라는 결국 자중지란으로 멸망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작은 힘으로 천하를 도모할 수가 있을 것이옵니다.”
범증의 논리정연한 말은 마치 천하대세를 손바닥 위에서 바라보는 듯 한 느낌이니 항우는 범증의 지략에 크게 감동하였다.
“군사의 말씀은 마치 장님인 나를 광명천지로 인도해 주시는 것만 같구려. 그러면 우리는 ‘장남’에 주둔하며, 때를 기다리기로 하십시다.”
항우는 이렇게 범증의 웅대한 계략에 따라 잠시 때를 기다리게 되었다.
※ 註) 그의 앞날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리고 또 하나의 잠룡(潛龍) 유방의 앞날은...
진나라의 멸망과 함께 다가올 이 둘의 용호상박(龍虎相搏)! 박진감 넘치는 초한전(楚漢戰)이 펼쳐질 것이다!
- 제 53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