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168화
2021. 1. 29. 08:08ㆍ김삿갓 방랑기
★ 시인 김삿갓 방랑기 168화
[‘탁’하고 친 것도 아닌데, ‘억’하고 죽은 사연]
“손님은 아직도 주무시지 않고 책을 읽고 계셨습니까?”
“어서 들어오세요. 잠이 오지 않아 책을 읽고 있던 중입니다. 주인 양반이야말로 여태까지 잠을 자지 않고 계셨소?”
김삿갓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인을 맞았다.
“책을 읽으시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주인은 김삿갓 옆에 털썩 주저앉더니 담배를 한 대 권한다.
“한밤중에 주무시지도 않고 책을 열심히 읽고 계시는 것을 보니 손님은 대단하신 선비인가 보군요?”
“대단한 선비는 아니지만 책을 좋아하는 편이지요. 그런데 노형은 어찌 주무시지 않고 계셨소?”
“걱정스러운 일이 있어 잠이 와야 말이지요.”
“걱정스러운 일이라뇨? 댁에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신가요?”
“실은 내 형님께서 사정이 매우 딱하게 되셔서...”
그리고 주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손님은 선비시니까 말씀인데, 지금 사경(死境)에 처해 있는 내 형님을 좀 도와주실 수는 없을까요?”
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적이 놀랐다.
“형님께서 사경에 처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어떤 사정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지 사정 한 번 들어 봅시다.”
그러자 주인은 김삿갓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주인의 친형인 양중태(梁中泰)라는 노인은 어느 날 자기 집 사랑방에서 마을 친구인 김명주(金明珠)라는 노인과 장기를 두다가 한 수만 물러 달라느니 안 된다느니 하고 말다툼을 벌였다.
늙은이들이 장기를 두다가 흔히 벌이는 언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일진이 사나운 탓인지 양 노인이 상대방을 밀치거나 때린 것도 아닌데, 상대방 김 노인은 혼자서 노발대발하다가 제풀에 쓰러져 그 자리에서 죽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양 노인은 본의 아니게 살인범으로 몰려 지금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김삿갓은 그 이야기를 듣고 측은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탁’치니 ‘억’하고 죽은 것도 아니고, 흥분해서 제풀에 죽은 것을 무슨 살인죄가 된단 말이오?”
“누가 아니랍니까? 그런데 김 노인의 친구로서 내 형님하고 사이가 좋지 않은 훈장놈이 하나 있어요. 그놈이 고소장을 교묘하게 써 가지고 관가에 무고를 하는 통에 내 형님은 꼼짝없이 살인범으로 몰려 지금 옥에 갇혀 있는 중이랍니다.”
“고소장을 어떻게 썼기에 생사람을 살인범으로 몰았다는 것이오?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구려.”
“고소장 사본이 여기 있으니까, 한 번 읽어 보아주시렵니까?”
김삿갓은 주인이 내민 고소장을 읽어 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감탄의 고개를 끄덕거렸다.
‘양중태는 김명주 노인이 자기와 말다툼을 하다가 쓰러져 죽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입니다. 서로 간에 치고받고 하는 육박전을 하지 않았다면 단순한 말다툼만으로 김 노인이 죽었을 리 만무합니다. 양중태는 김명주가 뇌출혈로 죽었다고 말하지만 아무런 폭력을 가하지 않았다면 멀쩡하던 사람이 절로 죽었을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훈장이라는 사람은 양 노인을 이렇게 살인범으로 교묘하게 몰아붙이고 나서 끝으로 다음과 같은 절묘한 글을 한 구절 써넣었다.
毒酒在房 不飮不醉(독주재방 불음불취)
腐繩繼牛 不引不絶(부승계우 불인불절)
(해설)
독한 술이 방 안에 있어도 마시지 않았다면 취하지 않을 것이고,
썩은 새끼로 소를 매어 놓아도 잡아당기지 않으면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 글은 양 노인이 어떤 식으로든 김노인을 죽게 만들었다는 내용이었다.
김삿갓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소장의 내용은 글을 직업으로 밥을 먹는 훈장이 쓴 것으로 그럴듯한 주장이었다.
글이 주장하는 논리대로라면 양 노인은 살인죄를 모면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생사람을 살인범으로 몰아 버리는 데는 동의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음... 글이라는 것은 참으로 마술 같은 것이로구나!”
주인은 ‘마술’이라는 말을 듣고,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란다.
“네? 마술이라뇨? 뭐가 마술 같다는 말씀입니까?”
“아, 아니올시다. 나 혼자 지껄여 본 말이오... 아무튼 이 고소장만 읽어 보아서는 주인장 형님이 살인죄를 면하기는 어렵겠습니다.”
주인은 그 말을 듣고 얼굴이 사색이 되면서 한탄하듯 말을 한다.
- 17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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