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
2021. 1. 19. 10:56ㆍ김삿갓 방랑기
★ 시인 김삿갓 방랑기 159화
[파자점(破字占)]
“무슨 일로 어떤 점을 치려고 오셨소?”
“바깥양반이 얼마 전에 장사차 집을 나갔는데, 석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아요.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 견딜 수가 없네요.”
“음... 그러면 사주를 보아야 하겠구먼, 바깥양반의 사주는 가지고 오셨는가?”
“사주가 무슨 사주예요. 나 같은 시골뜨기가 주인 양반의 사주를 알기나 하나요?”
“사주를 모른다면 간단한 방법으로 파자점(破字占)을 쳐 드릴까?”
“좋을 대로 해 주세요.”
점쟁이는 돗자리 위에 놓여 있는 한문책 한 권을 집어 들더니 여인에게 내주며 말했다.
“보시다시피 이 책에는 글자가 많이 쓰여 있소. 이 책 어디에서나 마음 내키는 대로 글자 한 자를 골라 보시오. 그러면 당신 남편의 운수를 그 글자로 풀어 드리리다.”
김삿갓은 그 여인이 어떤 글자를 골라잡을지 흥미진진하였다.
여인은 책을 받아 들고 이리 뒤적 저리 뒤적하더니 ‘약 약(藥)’자를 손가락으로 짚어 보이며,
“이 글자로 점을 쳐 주세요.”
하고 말했다.
글자의 뜻을 알고 골라잡은 것이 아니라, 글을 모르니 되는 대로 짚어 보인 글자임은 말할 것도 없다.
김삿갓은 점쟁이는 아니지만 파자점에 대해 약간의 상식을 가지고 있다.
예전에 관북천리(關北千里)를 다니던 중에 안변 석왕사(釋王寺)에서 만난 반월 행자에게 들은 이태조(李太祖) 건국 신화에서 알게 된 무학(無學)도사의 파자점 풀이를 비롯하여 뜻글자인 한자를 두루 섭렵하는 처지이기에 글자만 놓고 보아도 그 뜻을 어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가령, 누가 땅 위에 한 일(一) 자를 써놓고, 점을 쳐달라고 한 경우 점쟁이는 그 사람의 차림새와 풍채 등을 보아가면서 어떤 사람에게는,
“토상가일(土上加一)하니”
“왕위지격(王位之格)이라”
(해설)
“흙 토(土) 자 위에 한 획을 더 그었으니 임금의 품격을 지녔구려.”
하기도 할 것이고,
같은 글자를 써놓더라도 차림새와 풍채에 따라서는 아래와 같은 다른 해석을 내놓게 된다.
“노상예장(路上曳杖)하니”
“걸인지상(乞人之相)이라”
(해설)
“길 위에서 지팡이를 끌고 가니 거지 신세가 분명하다.”
이렇게 글자를 선택한 사람의 면모와 짚어 놓은 글자 사이의 상관관계를 당시의 상황과 적절히 조합하여 글자를 선택한 사람의 기분을 감안하여 듣기 좋은 말로 해석하는 것이 파자점인 것이다.
그러나 김삿갓은 점에 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었다.
따라서 약(藥)자와 같이 복잡한 글자를 점쟁이는 과연 어떻게 풀어낼 것인지 매우 궁금하였다.
여인이 글자를 짚어 보이고 나자, 점쟁이는 조금 전에 김삿갓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수법으로,
“점이라는 것은 복채를 먼저 내놓아야 점괘가 잘 들어맞는 법이오.”
하고 복채부터 내놓으라고 한다.
점쟁이의 복서력(卜筮力)이 어떤지는 알 길이 없지만 복채를 받아내는 수법만은 귀신같았다.
점쟁이는 복채를 받아 주머니에 챙겨 넣고 나서 한동안 끙끙거리더니, ‘藥’자의 점괘를 다음과 같은 네 구절로 적어 놓았다.
頭上草冠(두상초관) : 머리에는 풀감투를 쓰고,
下撑以木(하탱이목) : 아랫도리는 나무로 버티고,
左右絲縛(좌우사박) : 좌우를 실로 묶어 놓았는데,
白骨在中(백골재중) : 백골이 그 중에 있구나.
김삿갓은 점괘를 적은 글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약’이라는 글자 하나를 두고 이리 쪼개고 저리 쪼개가며, 네 구절의 점괘를 그럴듯하게 만드는 수법도 귀신같았지만, 그 점괘는 여인의 남편이 이미 죽은 사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머리에는 풀감투를 쓰고, 아랫도리는 나무로 버티고, 좌우를 실로 묶어 놓은 데다 백골이 그 속에 들어 있다면, 그것은 이미 관 속에 들어 있는 시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점쟁이도 점을 쳐놓고 난 후 기가 막히는지 입맛을 쩝쩝 다시면서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글을 알아보지 못하는 여인은 점괘의 내용이 여간 궁금했던지,
“점괘가 어떻게 나왔어요? 설명을 자세히 해 주세요.”
하고 졸라대는 것이다.
점쟁이는 점괘를 사실대로 말해 주기가 거북한지 입을 연실 쩝쩝 다셔 가면서,
“바깥양반은 당분간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이오.”
하고 점괘와는 거리가 먼 거짓말을 적당히 꾸며대고 있었다.
아무리 점쟁이라도 당신 남편은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솔직하게 말해 주기가 거북했던 모양이었다.
여인은 점쟁이의 말을 듣고 적잖이 실망하는 얼굴을 하면서,
“당분간 집에 돌아오지 못한다면 몇 달 후에나 돌아올 것 같아요?”
“글쎄... 그것까지는 나도 모르겠는걸...”
“어째서 돌아오지 않을까요? 혹시 다른 여자가 생겨서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여인이 궁금한 것은 그 문제뿐인 모양이었다.
“아니오, 새로운 여자가 생긴 것은 아니오. 그것만은 안심하시오. 다만, 당분간은 집에 돌아오지 못할 것만은 분명하오.”
점쟁이는 구렁이 같아서 여인의 남편이 죽었다는 말은 끝끝내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점괘가 그렇게 나왔다면 몇 달 더 기다릴 수밖에 없겠네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내 신수나 좀 보아주세요.”
‘모르는 게 약’이라고 했던가, 그 여인은 자기 남편이 죽었다는 점괘가 나왔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살아 있는 본인을 위해서는 그편이 다행한 일인지 모른다.
김삿갓은 그 비극적인 광경을 계속 보고만 있을 수가 없어 부랴부랴 그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 160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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