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113화
2020. 12. 2. 07:48ㆍ김삿갓 방랑기
★ 시인 김삿갓 방랑기 113화
[훈장의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
김삿갓이 공맹재 훈장으로 들어앉자 이변이 하나 생겼다.
지금까지의 서당 아이들은 모두가 ‘천자문’을 배우던 조무래기 일곱 아이들뿐이었는데, 김삿갓이 훈장으로 부임한 그날부터 소학(小學), 중용(中庸)과 사략(史略) 같이 제법 어려운 책을 공부하는 중간치기 아이들 열 둘 씩이나 대거 서당에 몰려왔던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런 아이들은 필봉 선생에게는 배울 것이 없어 숫제 글공부를 포기하고 있었던 아이들이었던 것이다.
필봉은 그러한 현상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김삿갓에게 자신의 느낌을 토로하였다.
“약국이라는 것은 임기응변으로 이럭저럭 명의 행세를 할 수 있지만 훈장 자리만은 아는 것이 없어가지고는 하루도 지탱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소이다.”
하고 고백하며 훈장 자리를 김삿갓에게 넘겨준 것을 크게 잘한 일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필봉은 이제부터라도 의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은지,
“삿갓 선생은 아이들에게 글만 가르쳐 줄 게 아니라 나한테는 동의보감이라는 책을 좀 가르쳐 주시오.”
하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나는 의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의보감이라는 책이 있기만 하면 설명은 해드릴 수 있으니 우선 책부터 구해 오시죠.”
“네, 알겠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책을 구해 보겠습니다.”
필봉은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참, 삿갓 선생! 우리 마을에는 얌전한 과부가 하나 있는데, 내가 그 과부에게 중신을 들어줄 테니 선생은 숫제 결혼을 해가지고 우리 마을에서 나와 함께 정착을 하면 어떠하겠소이까?”
하고 난데없는 제안을 해오는 것이 아닌가!
“에이, 여보시오. 나는 처자식이 있는 몸이니 행여 그런 말씀은 두 번 다시 하지 마시오. 나는 아이들에게 당분간 글이나 가르치다가 적당한 기회에 평양으로 떠나갈 생각입니다.”
김삿갓은 혼담을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리고, 모든 아이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아이들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우선 천자문을 읽혀 볼 생각이었다.
천자문은 옛날 중국 양(梁)나라 시절 주흥사(周興嗣)라는 사람이 지은 만고의 명저(名著)로써 네 글자씩 짝을 이뤄 도합 250수로 구성되어 있다. 이로써 글자의 수효는 모두 1천 자에 달하여 ‘천자문’이라 불리게 되었다.
당시에 주흥사는 천자문 한 권을 짓는 데 얼마나 고심이 많았던지 그 책을 다 짓고 난 뒤에는 검던 머리조차 하얗게 백발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천자문을 일명 백수문(白首文)으로도 불러온다.
천자문은 네 글자 문장만으로도 우주 만물의 원리를 속속들이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이 책 한 권만 떼어도 인생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본적 상식과 인격도 형성될 수가 있는 것이다.
첫 구절을 보자.
‘천지현황(天地玄黃)’
아이들은 하나 같이 ‘하늘 천, 땅 지, 검을 현, 누를 황’ 하고, 자신만만하게 소리 높여 읽는다.
그러나 천지현황이라는 네 글자로서 이루고 있는 뜻을 새기지 못하고 있으니 글자만을 익혔다 뿐이지 뜻을 모르기 때문에 배우기도 어렵고 새겨두기도 어려운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 본다.
‘한래서왕(찰 한‘寒’, 올 내‘來’, 더울 서‘暑’, 갈 왕‘往’)’ : 추위가 오니 더위가 간다는 뜻이 된다.
천자문에 실려 있는 모든 문장은 이런 식으로 읽어야만 뜻을 알기가 쉬운 것이다.
아이들에게 묻고 이렇게 설명을 하는 사이 아이들이 글을 읽는데 흥미를 가지고 공부를 하게 되었다.
김삿갓의 이러한 새로운 교수법(敎授法)을 아이들의 입을 통하여 듣게 된 학부형들은 모두들 크게 기뻐하였다.
“우리 집 아이는 글 읽기를 죽기보다도 싫어했었는데, 새로 온 훈장이 무슨 요술을 부렸는지 지금은 눈만 뜨면 서당에 간다고 법석을 떨고 있으니 그야말로 알고도 모를 일이야.”
“누가 아니래! 우리 집 아이도 서당에 가라면 배가 아프니 골치가 아프니 하고 핑계를 대기가 일쑤였는데, 훈장이 새로 오고 나서부터는 서당에 일찍 가야 한다고 새벽부터 안달이거든.”
“하여간 이번에 오신 훈장은 학식과 실력이 대단하신 분임에 틀림이 없어!”
이구동성으로 동네 사람들은 김삿갓의 실력을 칭찬하고 있었다.
한편, 김삿갓은 필봉의 계략에 말려 억지로 훈장 자리를 떠맡게 되기는 하였으나 추운 겨울을 지내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사방팔방을 편답(遍踏)하던 처지가 졸지에 조무래기 학동(學童) 사이에 갇혀 지내려니 여간 좀이 쑤시는 것이 아니었다.
날마다 코흘리개들을 상대로 ‘하늘 천, 땅 지’가 아니면 ‘공자 왈, 맹자 왈’만 외고 있으려니 세상에 그처럼 따분한 일이 없었다. 그나마 머리가 총명하여 쉽게 깨우치는 아이라도 있으면 그런대로 보람을 느낄 수도 있으련만 아이들이 모두가 까마귀 고기를 삶아 먹었는지 열에 하나 같이 아둔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天, 地, 玄, 黃’ 네 글자를 열흘이 넘도록 가르쳐 주어도 다음 날 아침이면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데는 똥이 탈 노릇이었다.
김삿갓은 ‘훈장의 똥은 개도 먹지 않는다.’는 속담이 생겨 난 이유를 이제야 실감할 수가 있었다.
‘인간사의 모든 욕심을 털어 버리고, 한평생을 구름처럼 떠돌며 살아가려던 내가 어쩌다가 이처럼 비참한 처지가 되어 버렸을까.’
김삿갓은 솔직히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충동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받았다.
그러면서도 도망을 치지 못하고 하루하루 질질 끌고 있는 것은 자기가 떠나가면 20여 명에 이르는 아이들의 장래가 너무나도 불쌍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김삿갓은 후임자를 구해 달라고 필봉에게 몇 차례 부탁을 하였으나 그때마다 필봉은 콧방귀를 뀌며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후임자라니 무슨 말씀이시오? 삿갓 선생은 아무 소리 말고 한평생을 나와 함께 우리 마을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김삿갓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에서 불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언젠가는 훈장의 고리타분한 신세를 다음과 같은 시로 읊어 보기도 하였다.
世上誰云訓長好(세상수운훈장호) 세상에 훈장을 누가 좋다고 했던가?
無烟心火自然生(무연심화자연생) 연기도 없는 불길이 절로 타오르네.
曰天曰地靑春去(왈천왈지청춘거) 하늘 천 땅 지 하는 사이 청춘이 가고,
云賦云詩白變成(운부운시백변성) 부요 시요 하다 보니 머리가 세네.
雖誠難聞稱道語(수성난문칭도어) 정성껏 가르쳐도 칭찬 듣기 어렵고,
暫離易得是非聲(잠이이득시비성) 자리를 잠시만 비워도 비난받기 일쑤인데,
掌中寶玉千金子(장중보옥천금자) 천금 같은 귀한 자식 훈장에게 맡겨 놓고,
請囑撻刑是眞情(청촉달형시진정) 잘못하면 매질하라 진정으로 부탁하네.
김삿갓은 따분한 생각이 들 때마다 뒷산으로 달려 올라가기가 일쑤였다.
마을의 진산인 월출산(月出山) 중턱에는 망월정(望月亭)이라는 고색이 창연한 정자가 하나 있다.
김삿갓은 깊은 산속에 그와 같은 정자가 있는 것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그날도 김삿갓은 저녁을 먹고 난 뒤 답답한 마음에 망월정으로 나가 바람을 쏘이고 오던 길이었다.
서당이 저만치 달빛 속에 보이는 길에서 마주 걸어오던 여인 하나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며,
“삿갓 선생님 아니세요?”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 114화에 계속 -
'김삿갓 방랑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삿갓방랑기 (0) | 2020.12.04 |
---|---|
김삿갓방랑기 114화 (0) | 2020.12.03 |
김삿갓방랑기112화 (0) | 2020.12.01 |
김삿갓 방랑기 111화 (0) | 2020.11.30 |
김삿갓 방랑기110화 (0) | 2020.11.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