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92화

2020. 11. 11. 07:36김삿갓 방랑기


★ 시인 김삿갓 방랑기 092화

[친구와의 돈거래도 남처럼 해야 한다.]

김삿갓이 산을 내려와 객점(客店)에서 해장술을 마시는데, 안쪽 구석에서는 어떤 시골 사람이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는 술을 몇 잔 거푸 마시며 한숨까지 몰아쉬더니 한탄어린 소리를 지껄였다.

“제기랄! 이놈의 세상은 어떻게 되려는지 사또란 자는 눈앞에 도둑놈 하나를 잡아 주지도 않네.”
하면서 사또가 들으면 목이 날아갈 소리를 마구 퍼붓고 있었다.

김삿갓이 건너다보니 돈푼이나 있어 보이는 순박한 시골 사람 같은데, 이렇게 사또를 나무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무척이나 억울한 사정이 있어 보였다.
남의 딱한 사정을 모른 척 넘기는 법이 없는 김삿갓!
기어이 술상을 냉큼 들고 그 사람 앞으로 갔다.

“노형은 무슨 억울한 사정이 있기에 혼자서 그렇게도 한탄하고 계시오. 초면이지만 우리 술이나 한 잔씩 나누면서 화를 풀어버리기로 합시다. 왜 옛말에도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 하지 않소?”
그러자 혼자 화를 내며 푸념을 하고 있던 사람은 김삿갓이 내밀어 주는 술잔을 받으며 억울한 자기 형편을 일장 늘어놓았다.

“이보시오, 노형!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이오?”
하며 거침없이 있는 속내를 드러냈다.

“나는 얼마 전에 친구한테서 돈 천 냥을 빚으로 얻어 썼다가 8백 냥은 먼저 갚아주고, 2백 냥은 나중에 갚아주었소. 그런데 소위 친구란 놈이 2백 냥만 받고, 그전에 갚은 8백 냥은 받은 일이 없노라고 잡아떼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이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너털웃음을 웃었다.

“허허, 말씀을 듣고 보니 노형은 친구끼리 돈거래를 하다가 피차간에 어떤 오해가 생긴 모양이구려. 그러기에 옛날부터 가까운 사이에는 돈거래를 안 하는 법이라고 말들 하지 않습니까?”
이름을 양상문(梁相文)이라고 하는 그 시골 사람은 오해라는 말을 듣자 발끈해서 말하는데,

“에이, 여보시오. 오해가 무슨 놈의 오해란 말이오. 돈이 8백 냥이면 얼마나 큰돈인데 그러시오. 나는 분명히 8백 냥을 먼저 갚아주었는데, 그놈은 받은 일이 없다고 잡아떼고 있으니 세상에 이런 기가 막힌 노릇이 있겠소이까?”
“빌린 돈을 갚을 때 영수증은 받아 두지 않으셨습니까?”
“빚을 얻어 쓸 때는 천 냥짜리 차용증서를 확실하게 써 주었지만 돈을 갚을 때는 천 냥 중에 8백 냥만 갚고, 2백 냥은 못 갚았기 때문에 그놈까지 갚고 나서 차용증서를 돌려받으려고 했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오.”
양상문의 말에 따르면, 그는 몇 달 전에 황주(黃州) 고을에 사는 박용택(朴鏞澤)이라는 친구에게 돈 천 냥을 빚으로 얻어 쓴 일이 있었다.
그때 차용 증서로 천 냥짜리 한 장을 써 주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빚을 갚으려고 하는데, 돈이 2백 냥쯤 부족하기에 우선 8백 냥만 먼저 갖다 주면서 차용증서는 나머지 2백 냥까지 갚고 난 후 돌려받기로 하고, 영수증도 받지 않은 채 그냥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에 잔금 2백 냥을 갖다 주면서 차용증서를 돌려달라고 했더니 박용택이란 놈이,

“자네가 언제 나에게 8백 냥을 가져왔단 말인가? 오늘은 2백 냥만 가져왔으니 나머지 8백 냥을 가져오기 전에는 차용증서를 돌려줄 수 없네!”
하고 말을 하면서, 양상문을 오히려 도둑놈으로 몰아붙이더라는 것이다.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양상문이 화를 내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태평스럽게 말을 해주었다.

“8백 냥을 먼저 갚을 때 차용증서는 돌려받지 못할망정 영수증만은 받아 둘 걸 그랬구려.”
“에이, 여보시오. 친구지간에 그런 배신을 할 줄이야 누가 알았겠소.”
“이러나저러나 빚을 깨끗이 갚았으면 상대방이 무슨 소리를 하던 그냥 내버려 두면 될 게 아니오?”
양상문은 어이가 없었던지 김삿갓을 대뜸 나무란다.

“뭐요? 그냥 내버려 둬도 별일이 없을 것이라고요? 노형은 도둑놈의 심보를 그렇게도 간단하게 보시오?”
“빚도 모두 갚았겠다, 제 놈이 뭐가 떳떳하다고 책망할 것이오?”
김삿갓의 말을 듣고 난 양상문은 어처구니가 없는지 김삿갓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노형은 정말 어리숙하시오. 박용택이란 놈은 내가 써준 차용증서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 주면서 ‘양상문이란 놈은 천 냥 빚을 2백 냥만 갚고, 8백 냥은 그냥 떼어먹으려는 도둑놈’이라고 동네방네 나발을 불고 다니더니 이제는 나에게 ‘해결사’라는 깡패를 보내 ‘잔금 8백 냥을 빨리 갚지 않으면 우리 집 가장집물(家藏什物)을 몽땅 자기 집으로 실어 가겠다.’고 협박공갈을 하고 있는 중이라오. 이러니 믿었던 친구에게 배반을 당한 것도 서럽지만 이제는 동네 망신은 물론이요, 패가망신까지 하게 생겼다오. 하늘도 무심하시지,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단 말이오!”
이렇게 한숨을 쉬며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김삿갓은 동정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놈이 그렇게나 악독하게 나오면 관가에 고발을 해서 주릿대를 안겨 줄 일이지, 어째 고발은 안 하고 그냥 내버려 두고 있소?”
“누가 아니라오. 하도 억울해서 관가에 고발도 해보았지요. 그랬더니 사또라는 작자가 뭐라고 한 줄 아시오?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양상문은 또다시 기가 막히는지 하던 말을 끊고 한숨만 쉬고 있었다.

“사또가 뭐라고 했기에 한숨만 쉬시오?”
그러자 양상문이 쓴 입맛을 다시며 말하는데,

“사또가 저간의 사정을 듣고 말하기를, ‘나는 수안 고을 사또인데, 박용택은 나의 관할이 아닌 황주 고을 백성이므로 나에게는 그자를 체포해 심문할 권한이 없다.’는 거예요. 이렇게 도둑놈을 놓고 관할 타령만 하고 있으니 내 억울한 사정을 도대체 어디에 하소연한단 말입니까?”
그 말을 듣자 김삿갓은 불현듯 분노가 치밀어 올라,

“뭐요? 사또는 백성들로부터 고발을 받으면 연루자를 불러다가 진상을 조사해 봐야 할 일인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관할 운운한단 말이오? 도대체 수안 고을 사또가 어떤 자이기에 그런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더란 말이요?”
“흥! 노형이야말로 잠꼬대 같은 말씀만 하고 계시는구려. 사또라는 자는 죄 없는 백성을 잡아다가 볼기를 쳐서 돈이나 뺏어 먹는 자라는 것도 모르시오? 세상이 썩었다 썩었다 해도 이렇게까지 썩은 줄은 정말 몰랐소이다.”
“그렇다면 수안 고을 사또는 이름이 뭐라는 사람이오? 내가 한 번 만나보기로 하겠소.”
김삿갓이 사또를 만나 보겠다고 말하자 양상문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란다.

“아니, 선생은 우리 고을 사또 어른을 잘 아시옵니까?”
방금 전까지도 노형이라고 불러오던 사람이 갑자기 김삿갓을 선생이라고 바꿔 불렀다.

“내가 사또와 지면(知面)이 있어 만나 보겠다는 것은 아니오. 듣자 하니 노형의 사정이 하도 딱해 보이기에 내가 사또를 만나 직접 호소해 볼 생각이니 사또의 이름이나 알려 주시오.”
양상문은 김삿갓을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짐작했는지 머리를 정중히 수그려 보이며 말했다.

“우리 고을 사또 어른의 이름은 백창수(白昌殊)라고 합지요. 어려서부터 하옥대감(荷屋大監 : 영의정 金左根의 別號) 댁 사랑에서 심부름을 하다가 50이 넘어 쓸모가 없게 되자 우리 고을 사또로 내려 보냈다고 합니다.”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이 절로 나왔다.

“에이, 여보시오. 하옥대감이 아무리 인사를 어지럽게 하기로 설마하니 사랑방에서 심부름을 하던 늙은이를 한 고을에 사또로 내려 보내기야 하겠소? 누군가 하옥대감과 사또를 욕하느라고 일부러 꾸며낸 이야기이겠지요.”
김삿갓은 입으로는 그렇게 말을 했지만 그 당시에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이 횡행하던 때였으므로, 내심으로는 그것이 사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것은 나중 일이고, 양상문의 딱한 사정을 사또에게 한 번 사정해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술집을 나온 김삿갓은 사또를 만나기 위해 발길을 관아로 옮겼다.
관아에는 두 명의 병사가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여보게! 나는 한양에서 내려온 사람일세. 사또 어른께 여쭐 말씀이 있으니 사또 어른 좀 만나게 해주게.”
한양에서 내려왔다고 해야만 사또를 쉽게 만날 수 있겠다고 생각되어 그렇게 말한 것이다.

- 093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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