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 88

2020. 11. 7. 08:19김삿갓 방랑기


★ 시인 김삿갓 방랑기 088화

[김삿갓에게 닥친 불행]

그로부터 며칠 지난 비 오는 날 밤!
김삿갓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소변을 보려고 요강을 찾았다.

“여보게! 요강이 어디 있지?”
수안댁은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어마, 내 정신 좀 봐! 요강을 우물가에 그냥 내버려 두었네요. 지금 곧 가져올 게요.”
김삿갓은 비가 오는데 심부름을 시키기가 안 되어 보여서,

“자네는 그냥 앉아 있게. 내가 나갔다 옴세.”
“아니에요. 남자가 요강을 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남들이 뭐라 하겠어요.”
“쓸데없는 소리! 남자가 요강을 들고 다니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 내가 갔다 올 테니까 당신은 그냥 있어요.”
김삿갓은 마누라를 억지로 못 나오게 막았다.
마누라의 수고와 마음을 위로하고 싶은 심정에서 자기가 요강을 가져오려고 한 것이었다.

밖으로 나오니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데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길을 찾기가 어려웠다.
간신히 어둠 속에 더듬거리며 우물가에 도착한 김삿갓은 우물가를 한 바퀴 돈 후에야 요강을 찾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만 돌층계에서 발을 헛디뎌 앞으로 고꾸라졌다.

“쨍그렁~”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요강이 허공에 떴다가 돌 위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에구머니! 이게 무슨 소리예요!”
방안에 있던 마누라가 비명을 지르며 어둠 속으로 달려 나왔다.

“저런! 아무 것도 아니야. 돌에 미끄러져 잠시 넘어졌군. 걱정 말고 어서 방으로 들어가요.”
김삿갓이 넘어져 비에 젖은 옷을 툴툴 털고 마누라와 함께 방으로 들어와 보니 김삿갓은 무릎이 까져서 피가 한줄기 흘러내리고 있었다.
수안댁은 피를 보자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어마! 저 피!”
“괜찮아요. 이 정도를 가지고.”
“아니에요. 당신은 지금 신의 천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이것만은 무슨 재주로도 피할 수 없는 천벌이에요.”
“이 사람아! 어두운 밤중에 한 번쯤 넘어진 것을 가지고 당신은 무슨 말을 그리하는가? 하룻밤 자고 나면 아무렇지도 않을 테니 어서 잠이나 자요.”
김삿갓은 마누라를 가까스로 달래 자리에 뉘였다.

그러나 마누라는 어둠 속에서도 공포감으로 떨고 있었다.
김삿갓은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잠도 자지 못하고 마누라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벽녘에 자기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는데, 잠깐 눈을 붙였다 다시 떠보니 옆에 누워 있던 마누라가 없지 않은가!

“여보게! 어디 갔는가?”
김삿갓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달려 나가며 소리를 또 한 번 질렀다.
그래도 대답이 없었다.

어느새 날이 훤히 밝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한밤중까지 부슬부슬 오던 비가 지금은 억수로 퍼붓고 있었다.
게다가 천둥이 울고 번갯불이 번쩍이며, 뇌성벽력까지 귀청이 따갑도록 때려대고 있었다.
김삿갓은 억수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천방지축 마누라를 찾아 헤맸다.

“여보게! 나를 두고 어딜 갔는가?”
섬뜩한 예감까지 압도했던 김삿갓의 소리는 차라리 피를 토할 것 같은 절규에 가까웠다.

그러나 아무리 애간장이 타도록 불러도 마누라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물가에 가 보았으나 거기에도 없었다.
개천으로 달려가 보았으나 개천가에도 없었다.

“여보게! 자네가 나를 두고 어디로 갔단 말인가?”
김삿갓은 미친 사람처럼 하늘을 우러러 울부짖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산으로 들로 허겁지겁 찾아 헤매다가 문득 눈을 들어 보니 저 멀리 산신당(山神堂) 나뭇가지에 무엇인가 허연 것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엉? 혹시 저게 바로?”
김삿갓은 눈앞이 아찔해 오는 전율감을 느끼며 부리나케 달려와 보니 나뭇가지에 목을 매고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것은 틀림없는 마누라가 아닌가!
김삿갓은 부리나케 밧줄을 끊고, 마누라를 집으로 업고 돌아오며 울부짖었다.

“이 못난 사람아! 이게 무슨 짓인가!”
집으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방바닥에 눕혀놓고, 인공호흡도 해보고 손과 발을 주물러 보기도 했다.

그러나 무슨 짓을 해도 마누라의 사지백태는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마누라는 무당의 예언대로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기 자신이 대신 죽어 준 것이 분명해 보였다.

“이 못난 사람아! 죽기는 왜 죽어! 나를 살린다고 자네가 대신 죽는단 말인가!”
김삿갓은 이미 싸늘하게 식은 시체를 부둥켜안고 무당처럼 푸념을 하며 울부짖었다.

“자네가 청상살을 타고났다면 내가 죽어야 할 일인데, 어째서 자네가 죽는단 말인가?”
김삿갓은 애간장을 녹여내는 넋두리를 한없이 계속했다.

새벽부터 곡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도 너무도 처참한 현실이 놀라워 한동안 위로의 말을 찾지 못했다.
숨 가쁜 침묵이 잠시 계속된 뒤에 대동계장 제제가 입을 열어 물었다.

“여보게, 그만 울고 진정하게... 어쩌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되었는가?”
김삿갓은 울음을 멈추고, 그간의 자초지종을 대강 말해 준 뒤에,

“마누라는 나를 대신해 죽었으니 세상에 이런 비통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며 울부짖었다.

“꼭 그렇게만 생각할 건 아니지. 인명은 재천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수안댁이 이런 식으로 죽은 것은 어쩌면 그녀의 팔자인지도 모를 걸세.”
“팔자? 나와 결혼만 하지 않았다면 죽을 일은 없었을 것 아니겠나!”
“그러고 보면 수안댁은 전 남편이 죽었을 때도 남편 대신에 자기가 죽지 못한 것을 무척 한탄스러워 했거든. 그러니 수안댁은 남편을 기피하는 직성을 타고난 여자였는지도 모를 거야.”
“그렇다면 수안댁을 죽게 한 죄인은 나였다는 말이 되지 않은가?”
김삿갓은 그런 생각이 점점 확고해오고 있었다.
그러자 제제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자네 식으로 따지자면 수안댁을 죽인 죄인은 자네가 아니고, 우리들이었을 걸세. 왜냐하면, 두 사람을 강제로 결혼시킨 사람은 우리들이었으니까 말이야... 이러나저러나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모든 것을 운명으로 돌려 버리고, 너무 상심하지 말게.”
그러자 동석했던 늙은이 하나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참견을 했다.

“옳은 말이야. 죽은 사람은 죽었거니와 산 사람은 어디까지나 살아야 하거든. 인생이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닌가! 이제는 그만 고정하고, 장사치를 의논들이나 하라구.”
살아 있는 사람은 어디까지나 살아야 한다는 것은 인생의 영원한 진리인지도 모른다.
늙은이는 이런 저런 말을 하다가 불쑥 다음과 같은 말을 하여 듣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 089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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