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삿갓 방랑기 71화

2020. 10. 21. 08:31김삿갓 방랑기


★ 시인 김삿갓 방랑기 071화

[돌팔이 의원 집에서 보내는 기막힌 하룻밤, 上]

다음날 아침 조반을 얻어먹은 김삿갓은 곽호산 훈장에게 금천의 산천을 두루 돌아보겠다고 말을 하고 떠났지만 마음은 이미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곡산에 가 있었다.

그의 발길은 곡산을 향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곡산을 가기 위해서는 신계를 거쳐야 한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산길을 걷던 김삿갓의 눈에 신계를 앞둔 저 멀리 보이는 마을 입구에 臍生堂藥局(제생당약국)이라고 쓴 커다란 간판이 희미하게 보였다.
김삿갓은 그 간판을 잘못 보았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다시 보니 틀림없는 臍生堂藥局이었다.

김삿갓은 빙그레 웃음을 웃었다. 간판 글자가 터무니없는 글자로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약국은 생명을 다루는 곳이다. 따라서 약국은 생명을 건져준다는 뜻에서 흔히 濟生堂(제생당)이라고 쓴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간판은 ‘건널 제(濟)’가 아닌, ‘배꼽 제(臍)’ 자를 약국 이름으로 쓰지 않았나?

‘저 약국 주인은 한문에 어지간히 무식한 모양이군.’
빈 수레 끄는 소리가 사뭇 요란하고, 못생긴 여자가 짙은 화장을 하는 법이다.
그러려니 돌팔이 의원이라고 별다른 일이 있을 손가!
이렇게 생각한 김삿갓이 의원 앞으로 가보니 의원 집은 별로 크지도 않았는데, 지붕 위를 가로질러 올려놓은 간판은 지붕보다 더 커 보였다.
김삿갓은 간판 글자가 잘못된 것을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간판이 잘못된 것도 알려 줄 겸 오늘 저녁은 저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하자!’
김삿갓은 약국 문을 열고 주인을 찾았다.
약국 주인은 나이가 60가량 되었을까, 구레나룻을 허옇고 탐스럽게 기른 것이 풍채가 그럴듯한 사람이었다.

“어서 들어오시오. 무슨 병으로 왔는고?”
그는 김삿갓을 환자로 알고 반가운 어조로 맞았다.

“저는 환자는 아니옵고, 지나가던 과객입니다.”
“과객이 무슨 일로 약국에 들렀는가?”
“이 댁 간판 글씨가 잘못 되었기에 그것을 알려 드리려고 왔습니다.”
“간판 글씨가 잘못 되었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제생당의 ‘제’자는 건널 제(濟)자를 써야 할 것을 배꼽 제(臍)자로 잘못 쓰셨기에 그것을 알고 계신가 하여 여쭤봅니다.”
약국 주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크게 당황하는 빛을 보였다.

역시, 김삿갓의 예상대로 간판 글자가 잘못된 것을 주인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약국 주인은 너털웃음을 웃으며 말한다.

“내가 워낙 눈이 어두워 간판을 친구에게 써달라고 했더니 그 친구가 글자를 잘못 쓴 모양이구먼. 그러나 어쨌건 간에 ‘제생당’이라고 읽히기만 하면 될 게 아닌가?”
약국 주인은 되지도 않은 억지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일장 훈계조의 말을 늘어놓았다.

“무슨 일이나 귀공처럼 꼬치꼬치 따지기 시작하면 한이 없다네. 그러니 귀공도 오래 살고 싶거든 매사를 둥글둥글하게 보아 넘기게.”
김삿갓은 하도 어이가 없어 입을 딱 벌려 보였다.
그런 김삿갓의 모습을 본 약국 주인은 아래와 같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통에 더욱 기가 막혔다.

“귀공은 의원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사람이 죽고 사는 데는 배꼽처럼 중요한 것이 없네. 어린 아이가 태어났을 때도 배꼽 줄을 잘라 주어야 살게 되거든! 어찌 그 뿐인가? ‘배꼽에 어루쇠 붙인 것 같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명의는 환자의 배꼽만 보아도 그 사람의 뱃속에 어떤 병이 들었는지 훤히 안다는 소릴세.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제생당의 ‘제’ 자는 건널 ‘제’보다 배꼽 ‘제’를 써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 될 것이야!”
상사마(相思馬) 궁둥이 둘러대듯 능구렁이 같은 약국 주인의 변명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어찌 되었든 간판 글자가 잘못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런 승강이는 이제 그만 접고,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판이었다.

“제가 몰라서 부질없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건 그렇고, 날이 저물어 댁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하고 화제를 얼른 바꿔버렸다.
주인 늙은이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김삿갓을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귀공은 학식이 많은 모양이니 오늘 밤은 쉬어 가시게나. 그 대신 내가 눈이 어두워 읽지 못하는 의서가 있으니 그 책이나 좀 읽어 주게.”
주인 늙은이는 안으로 들인 김삿갓에게 ‘동의보감’ 한 권을 내놓으며, 첫 장부터 자세히 읽어 달라고 한다. 김삿갓이 생각하건대, 주인 늙은이는 눈이 어둡다는 것은 핑계이고, 워낙 까막눈이어서 의원이라면 통달했어야 할 동의보감조차 읽어 본 일이 없었을 성싶었다.

김삿갓이 정좌세로 앉아 동의보감을 읽자, 마주 앉아 이를 듣던 주인 늙은이는 점점 자세가 꼬부라지더니 이내 비스듬히 다리를 뻗고, 한 손으로 머리를 괴고 옆으로 누워 듣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한참을 듣다 말고 한마디 하는데,

“자고로 명의가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세. 명의를 들라치면 중국에는 화타(華陀)와 편작(扁鵲)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허준(許俊)과 안찬(安瓚), 양예춘(楊禮春) 정도가 있을 뿐이지.
그러나 그들도 명의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는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야 명의가 되었거든. 그러니 명의란 칭호는 치료과정에서 실수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칭호밖에 안 되는 걸세.”
자기도 명의라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려고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주인 늙은이도 어쩐지 사람을 많이 죽였을 성 싶었다.

그때 마침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환자 한 사람이 찾아 왔다.
나이는 사십 가량 되었을까, 얼굴에 살이 붙어 두 볼이 볼기짝처럼 생겨먹은 장년이었다.

“어디가 아파서 왔는고?”
제생당 주인은 부랴부랴 책상다리로 꼬고 앉으며, 턱을 들어 새삼스럽게 위엄을 떨쳐 보였다.
그러자 환자는 머리를 수그려 보이며 말한다.

“제가 요새 몸이 몹시 불편합니다. 선생께 진맥을 받고 싶어 왔습니다.”
“몸이 몹시 불편하다고? 어디 팔을 내밀어 보게.”
제생당 의원은 환자의 팔을 잡아당겨 맥을 짚어 보기 시작했다.
김삿갓은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맥을 짚어 볼 것이 아니라 차라리 배꼽을 들여다보시죠!’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제생당 의원은 진맥을 하고 뒤로 물러앉으며 말했다.

“맥으로 보아서는 별 이상이 없군그래.”
“아니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 사람아! 자네가 나를 어떻게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가? 그럼 자네는 어떻게 괴로운지 증상을 자세히 말해 보게.”
“웬일인지 밥을 먹으면 뱃속이 까닭 없이 평소보다 불룩해 오고, 잠시 후 달걀만한 덩어리가 뱃속 위 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합니다.”
“뱃속에서 달걀만한 덩어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왔다 하면서 자네를 괴롭힌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놈의 달걀덩어리가 위로 올라왔을 때 혹시나 입을 크게 벌리면 나와 줄까 싶어서 입을 크게 벌려 보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내 아래로 다시 내려가 버려 사람을 괴롭히니 아마도 병중에서도 보통 병이 아닌가봅니다.”
“음...”
제생당 주인은 눈을 지그시 감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가 별안간 눈을 번쩍 뜨며 말한다.

“이제야 알았네. 그것은 병이 아니라 방귀가 탈출구를 찾지 못해 뱃속에서 방황을 하는 현상일세. 자네 얼굴이 볼기짝처럼 생겼기 때문에 방귀조차 어디가 위인지 아래인지 찾지 못해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왔다 하며 헤매고 있는 것이야. 내가 조위승기탕(調胃承氣湯)을 세 첩 지어줄 테니 그것을 달여 먹도록 하게. 그러면 방귀가 제 갈 길을 알아차려서 병이 깨끗이 나을 걸세.”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북받쳐 오르는 웃음을 참느라고 배꼽을 움켜잡았다. 얼굴조차 빨개졌고, 김삿갓은 조위승기탕이라는 약이 어떤 병에 쓰는 약인지는 모른다.

그리고 뱃속에 방귀를 몰아내는데 약을 쓴다는 말조차 들어 본 바가 없었다.
환자가 약 세 첩을 지어 가지고 인사를 하며 돌아가자, 김삿갓이 제생당 의원에게 웃으며 물었다.

“선생님! 한약에는 뱃속에 가득 찬 방귀를 몰아내는 약도 있습니까?”
“있지! 있고 말구! 조금 전에 환자가 지어간 약이 바로 그 약이라네.”
제생당 의원은 눈썹조차 까딱 않고 태연자약하게 배짱 좋은 대답을 한다.
그러자 김삿갓은 무시당한 것만 같아서 다시 캐고 물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어떤 의서에 그런 처방문이 나와 있지요?”
그러자 제생당 의원은 별안간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하하하하... 귀공은 사람이 왜 이다지도 고지식한가. 속이 볶이는 것은 필시 위장이 나쁘기 때문이 아니런가? 그러니 소화가 잘되는 약을 먹게 되면 위장이 좋아져서 자연히 방귀가 절로 나올 것 아닌가?”
“앗차! 선생님 말씀을 들어보니 과연 그렇기는 하군요.”
김삿갓은 한 대 단단히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제생당 주인은 훈시라도 하듯이 다시 말을 했다.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약국을 하고 있지만 사람의 몸이란 신비롭기 짝이 없어서 병이라는 것은 그냥 내버려 두어도 시간이 지나면 절로 낫게 되어 있는 것이네. 사람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조금만 불편하면 부랴부랴 의원을 찾아오거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약이란 것이 병자의 마음만 안심시켜줄 뿐이고, 약으로 병을 고친다는 것은 멀쩡한 거짓말일세. 죽을병에 걸린다면 세상 그 어떤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것이야. 만고의 명의였던 화타나 편작, 허준 같은 사람도 처방문이 없어서 죽었겠나? 어때? 귀공은 내 말 뜻을 알아듣겠나?”
김삿갓은 손뼉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늘 저는 선생님 말씀을 듣고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귀공이 내 말을 듣고 깨달은 것이 있다니 고맙네. 그렇다고 노상 의원을 멀리 하라는 말은 아닐세. 다리가 불편한 사람에게 지팡이가 필요하듯 병자에게는 의원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야. 그러니 나 같은 엉터리 의원도 먹고 살아가게 되는 게 아닌가? 안 그래? 하하하...!”
하며 호탕하게 웃어댔다.
바로 그때 문밖에서,

“선생님 계세요?”
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30 중반으로 보이는 가난한 가정부인이 들어선다.
이번에는 또 어떤 환자일까 하고 김삿갓은 호기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병으로 왔는고?”
제생당 주인은 여자 환자에게도 함부로 반말을 쓰고 있었다.
60이라는 나이 탓도 있지만 어쩌면 환자에게는 반말을 써야만 권위가 선다고 생각한 탓인지도 모른다.

대소사(大小事)에 긴박한 일을 맞아 굿을 하는 사람이나 길흉화복을 점치는 무당들이나 처사들은 자신의 고객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반말을 내뱉는다.
그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긴박과 곤궁에 처한 고객의 우위에 서서 자신의 허술한 처방이나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 방법의 정당성을 역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김삿갓은 잘 알고 있었다.

환자는 옆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꺼리는 듯 김삿갓을 힐끗힐끗 바라보다가 얼굴을 붉히며 조그맣게 말한다.

“선생님, 혼자 여쭤 볼 말씀이 있어서 찾아 왔습니다.”
“그래? 그러면 아랫방으로 내려가세 그려!”
주인 영감은 여자 환자를 아랫방으로 데리고 내려갔다.

그러나 아랫방이라야 장지문 하나로 가로막혀 있을 뿐이어서 숨소리조차 송두리째 들려 올 정도였다.
찾아온 여자 환자가 윗도리를 활짝 벗어부치고 의원에게 진찰을 정확히 받아 보려는 것이라고 김삿갓은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이 아랫방에서 주고받는 대화를 들어보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디가 어떻게 아파서 그러는고?”
의원이 그렇게 묻자, 여인은 한동안 주저하는 빛을 보이다가,

“저는 병이 있어 온 것은 아니옵고, 실상은 태기가 있어서...”
“태기가 있어서 왔다고?”
주인 영감은 약간 실망하는 어조로 여인의 말을 듣고 나서,

“남편이 있으면 젊은 나이에 태기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를 찾아 왔는가?”
제생당 의원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는지,

“혹시 남편이 없는데, 태기가 있어서 걱정이란 말인가?”
하며 서슴없이 물었다.
그러자 여인은 펄쩍 뛸 듯이 놀라며 말을 하는데,

“선생님! 그런 것은 아니옵니다. 남편도 없이 제가 어떻게 애가 생기겠습니까?”
“하하하, 그래? 그렇다면 내가 안 할 말을 했구먼, 남편이 있고 태기가 있다면 그런 경사가 어디 있는가?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약국을 찾아 왔단 말인가?”
여인은 또다시 한동안 말을 주저하는 듯싶더니,

“실상인즉, 저는 이미 아이가 열이나 있사옵니다. 게다가 이번에는 열한 번째의 태기가 있으니 이 일을 어찌 했으면 좋겠습니까? 선생님을 찾아온 것은 그 때문이옵니다.”
“자식이 열 명이나 되는데, 그 중에 머슴아이는 몇 명이나 되는고?”
“열 아이 모두가 머슴아이 뿐이옵니다.”
“저런~ 저런! 이제 알고 보니 자식 복을 무던히 타고 났구먼 그려, 게다가 또 태기가 있다니 이번에도 또 아들을 낳을 것은 분명하지 않겠나?”
여인은 딴 생각이 있어 찾아온 모양인데, 제생당 의원은 눈치도 없이 딴전만 부리고 있었다.
여인은 어처구니가 없었던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용기를 낸 듯이 말을 하였다.

“선생님! 없는 살림에 머슴아이가 연년생으로 열 명이나 있으니 먹이기는 무엇을 먹이며, 입히기는 무엇을 입히옵니까? 그래서 이번 애기만은 숫제 떼어 버리고 싶어서 선생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제생당 의원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어조로 대답한다.

“허어, 뱃속에 들어 있는 애기를 떼어 버리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애기는 삼신할머니가 점지해주시는 것인데, 어떻게 사람이 맘대로 떼어 버린단 말인가? 행여 그런 생각 말고 집에 돌아가 몸 간수나 잘하게.”
“아니옵니다. 이번 아이만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꼭 떼어 버려야 합니다. 지금도 굶다시피 살아가고 있는데, 게다가 또 하나 낳게 되면 무엇을 먹이옵니까?”
“모르는 소리 그만하게. 사람이 세상에 나올 때는 제가 먹을 것은 모두 타가지고 나오는 법이야, 그런 것은 걱정할 필요조차 없네.”
“어르신네들은 흔히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어떡합니까? 다섯 아이가 있을 때와 열 아이가 있을 때와는 먹고 살아가기가 하늘과 땅처럼 다르옵니다. 제 몫을 타고 나온다는 어른들 말씀을 믿을 수가 없사옵니다. 저의 집 식구들을 살려 주시는 셈치고, 이번 아이만은 꼭 떼어 버리게 해주시옵소서. 선생님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사옵니다.”
살림살이가 어지간히 궁색했던지 여인의 부탁은 간곡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허어... 이런 변고가 있나. 이 사람아! 약국이라는 데는 애기를 못 낳는 여인에게 약을 써서 애기가 생기게 하는 곳이지, 뱃속에 들어있는 애기를 떼어 버리는 곳은 아닐세. 그런 것도 모르는가?”
“제가 그런 것을 왜 모르겠사옵니까? 그러나 저의 집 사정은 남다르오니 뱃속의 아이를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있는 아이들만은 살려내야 하겠습니다. 그런 줄 아시고 제발 부탁합니다.”
여인이 하도 간청을 하니까 의원 영감도 어지간히 딱했던 모양이다.

“어허, 그것참! 세상에 이런 학질이 있나.”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온 식구가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옵니다. 선생님께서 저의 집 식구들을 꼭 좀 살려 주십시오.”
제생당 의원은 한동안 말이 없더니 문득 어떤 결심을 했는지,

“이번 애기만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꼭 떼어 버리고 싶단 말이지?”
하고 단호하게 따져 묻는다.
제생당 주인이 이렇게 단호하게 따지듯이 묻는 말투로 보아서는 임신부가 그렇게 소원한다면 뱃속의 아기를 낙태시켜 줄 것만 같아 보였다.

그러기에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섬뜩해 왔다.
왜냐하면 뱃속의 애기를 섣불리 낙태시키다가는 모태조차 희생되기 쉽기 때문이었다.

‘돌팔이 의원인 저 늙은이가 어쩌자고 무모한 짓을 하려 하는가!’
김삿갓은 제생당 늙은이가 괘씸하게 여겨지기까지 하였다.

“선생님, 꼭 좀 부탁합니다! 이번 애기만은 꼭 좀 없애 주십시오.”
임신부의 태도는 시종일관 확고부동하였다.

“잘 알았네. 소원이 그렇다면 자네 소원대로 해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선생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임신부는 머리를 몇 번이고 수그려 보이는 모양이더니 이번에는 약값 걱정을 한다.

“약은 몇 첩이나 쓰면 되겠습니까? 그리고 약값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소리가 들린다.
그 말에 대해 제생당 의원은 태연자약하게 이렇게 대답한다.

“먹을 것도 없다면서 약값이 무슨 약값인가? 약을 먹지 않고도 애기를 떼어 내는 방도가 있으니 그 방법을 쓰기로 하세.”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삿갓은 까무러칠 듯 놀랐다.
약을 쓰지 않고도 뱃속의 아이를 어떻게 떼어낸단 말인가?
혹시 저 엉터리 의원이 몽둥이로 임신부의 배를 두들겨 패기라도 한단 말인가 하는 의구심조차 가득 들어차며 침을 삼켰다.
김삿갓은 두 사람의 다음 대화에 귀가 쫑긋해졌다.

- 072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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