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88화

2021. 9. 8. 07:51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88화

☞ 조왕(趙王) 여의(如意)를 독살하는 여 태후

한편, 여 태후는 조왕이 거짓 편지를 받아 보고 장안을 향하여 한단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기뻐하며 심복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조왕이 상경하는 사실을 황제가 알게 되면 반드시 대궐로 데려가려고 할 것이니 그렇게 못 하도록 사람을 놓아 조왕을 반드시 나한테로 데리고 오너라.”
태후는 이번 기회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조왕을 기어코 죽여 버릴 계획이었다.

그리하여 여 태후는 많은 역사(力士)들을 동원하여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조왕을 강제로라도 납치해 오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사정은 그렇지가 못했다.
조왕이 회경(懷慶)이라는 곳에 도착하자, 대장 장릉, 이보, 축통 등이 조왕에게 큰절을 올리며 말한다.

“황명을 받잡고 신 등은 대왕을 영접하러 나왔사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이틀 후에 조왕이 패상(覇上)에 도착했을 때는 황제가 친히 마중을 나와 반갑게 맞아 주며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현제(賢弟)는 무슨 일로 이렇게 갑자기 상경하는가?”
조왕이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태후께서 상경하라는 분부가 여러 차례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병중에 계신 어마마마와 주창 대부께서도 급히 상경하라는 편지를 주셨기에 급히 상경하는 중이옵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내가 직접 마중을 나오지 않았더라면 큰일 날 뻔 했구나.
그런 거짓 편지를 받고 함부로 나다니다가는 신변에 참화(慘禍)가 일어날 것이니 현제는 아무도 만나지 말, 금후에는 대궐에서 나와 함께 기거하기로 하자.”
황제가 이렇게 말을 하며 조왕을 대궐로 직접 데리고 가는 바람에 태후가 보낸 역사들은 조왕을 납치해 갈 수가 없었다.

태후는 납치에 실패했다는 보고를 받자, 또다시 이를 ‘부드득’ 갈며, 심복 부하들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린다.

“황제가 제아무리 조왕과 숙식을 같이 하기로 조왕을 납치해 올 기회가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들은 궁중의 동태를 엄히 감시하고 있다가 기회가 있는 대로 조왕을 나한테 잡아오도록 하여라.”
한편, 주창은 조왕을 비밀리에 만나 자기 이름으로 보낸 편지는 거짓 편지였음을 알려 주면서 어떤 일이 있어도 태후를 만나지 말 것을 누누이 경고하였다.

조왕은 그제야 태후가 무서운 흉계를 꾸미고 있음을 알고 몸을 떨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황제의 곁을 잠시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여 태후는 그럴수록 분노의 감정이 치밀어 올라 그때부터는 대궐의 궁녀들을 매수하여 조왕의 일거일동을 상세하게 보고하게 하였다.

황제는 성품이 온후한데다 정의감이 누구보다도 강한 편이어서 조왕을 죽여 없애려는 태후의 흉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 왔었다.

더구나 그는 선제(先帝)로부터 ‘너는 어린 동생인 조왕의 신변에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각별히 잘 보살펴 주라’는 유언까지 듣지 않았던가?

그러나 황제는 성품이 워낙 내성적이어서 태후의 흉계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못하고, 조왕의 신변을 보호하는 소극적인 방도만을 써 오고 있었다.

어느 가을날이었다.
황제는 조왕과 함께 사냥을 가기로 약속한 일이 있었다.

그날이 오자 황제는 새벽같이 사냥 준비를 갖추고 나왔으나 조왕은 그날따라 몸이 불편하여 사냥을 같이 갈 수가 없었다.
황제는 매우 섭섭하게 여기며 말한다.

“그러면 오늘은 나만 다녀올 테니 현제는 편히 쉬고 있으라.”
황제가 조왕을 혼자 남겨 두고 사냥을 나갔다.

그러자 궁녀들은 그러한 사실을 즉각 태후에게 알렸다.
태후는 환관 한 사람을 보내 조왕을 이런 말로 꾀어 오게 하였다.

“소인은 척후(戚后) 마마께서 보내신 환관이옵니다. 척후 마마께서는 대왕이 상경하신지 10여 일이 지나도록 한 번도 찾아오시지 않으시므로 몹시 섭섭하게 생각하고 계시옵니다.
마마의 소원이 그러하오니 대왕께서는 오늘은 척후 마마를 꼭 찾아뵙도록 하시옵소서. 마마께서는 대왕의 내림을 무척 기다리고 계시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환관은 여 태후가 조왕을 꾀어 가기 위해 보낸 사람이었다.

조왕은 그러잖아도 생모가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던 판이었다.
그러나 근본을 모르는 사람의 말을 함부로 믿을 수가 없어서 즉석에서 이렇게 물어보았다.

“그대의 말은 잘 알겠네. 그런데 그대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심부름을 왔는가?”
문제의 환관은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뢴다.

“소인은 선제를 옛날부터 오랫동안 모셔왔을 뿐만 아니라, 척후 마마께도 총애를 받아 오고 있는 장록(張祿)이라는 환관이옵니다.
선제께서 돌아가신 뒤에는 줄곧 서궁(西宮)에서 척후 마마의 심부름을 돕고 있는 몸이옵니다.”
“아, 그래? 나의 어머님을 그처럼 도와드리고 있다니 고마운 일이네 그려. 지금 어머님의 병환은 어떠하신가?”
“병환은 별로 대단치는 아니하시옵니다만, 대왕마마를 만나고 싶으셔서 날마다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계시는 형편이시옵니다.”
조왕은 그 말을 듣고 나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려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어머님을 만나 뵈러 가야 하겠네. 어머님이 계신 곳으로 지금 당장 나를 인도하게.”
이리하여 조왕은 마침내 여 태후의 독수(毒手)에 걸려들고 말았다.

이윽고 조왕이 장록에게 인도를 받아 온 곳은 서궁(西宮)이 아니라, 여 태후가 거처하는 미앙궁(未央宮)이었다.
조왕은 그제야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채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도망이라도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여 태후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중문(中門)까지 마중을 나와 있다가 조왕을 부둥켜안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오오, 사랑하는 내 아들아! 네가 에미를 만나러 와 주니 세상에 이런 기쁨이 어디 있겠느냐?
에미는 그동안 네가 무던히도 보고 싶었느니라. 어서 들어가자.”
여의는 공포감에 전신이 떨려 왔다.

하지만 이제 와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태후에게 큰절을 올렸다.

“어마마마! 소자는 멀리 한단에 떨어져 있는 관계로 자주 문안을 드리지 못하와 불효 막급하옵니다.”
태후는 손을 설레설레 흔들며 말한다.

“네가 효성이 아무리 극진하기로서니 멀리 떨어져 있어서는 어쩔 수가 없는 일이 아니겠느냐?
우리는 그동안 너무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그리운 정이 태산 같구나. 오늘은 피차간에 쌓이고 쌓였던 회포를 마음껏 풀어 보기로 하자.”
말만 들어서는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모정이었으나 여 태후는 그렇게 수다를 떨며 여의를 내전으로 데리고 들어서더니

“여봐라! 오늘은 그립고 보고 싶던 내 아들이 멀리서 찾아왔으니 잔치를 성대하게 베풀어야 하겠다. 우선 주안상을 빨리 올려라.”
하고 궁녀들에게 명하였다.

이윽고 주안상이 들어왔다.
그러자 태후는 여의에게 손수 술을 따라 주며 말한다.

“오늘은 너를 하도 오랜만에 만났으니 네 술잔만은 내가 따라 주어야 하겠다. 어서 이 술잔을 받아라.”
여 태후가 여의에게 따라 준 술은 한 모금만 마시면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짐독주’라는 무시무시한 독주였다.

여의는 물론 그 술이 그렇게나 무서운 독주인 줄은 알 턱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술만은 마시지 않을 결심이었다.

그러나 태후가 내려 주는 술을 무작정 거부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여의는 생각다 못해 손에 받아 든 술잔을 태후에게 받들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어마마마 앞에서 소자가 먼저 술을 드는 것은 예절에 어긋나는 일이옵니다.
이 술은 어마마마께서 먼저 드신 연후에 소자에게 잔을 내려 주시옵소서. 그러면 소자가 기쁜 마음으로 받겠습니다.”
여의는 독주가 아니라는 확증을 얻기 위해 그렇게 꾸며 대었던 것인 바, 태후는 소리를 크게 내어 웃으며 여의를 나무란다.

“네가 예절이 그렇게나 바른 줄은 미처 몰랐구나. 그러나 예절에도 경우에 따라 여러 가지 방도가 있느니라.
너는 아직 나이가 어려 거기까지는 모르는 모양이로구나.”
여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후에게 반문한다.

“예절에는 여러 가지 방도가 있다는 것은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소자가 아직 미거하여 예절을 잘 모르오니 어마마마께서 자세하게 하교해 주시옵소서.”
태후는 여의의 어깨를 정답게 두드려 주면서 말한다.

“모르는 것을 알고자 하는 네 총명이 기특하기 이를 데 없구나. 너와 나는 모자지간이기는 하지만 오늘에 한해서만은 너는 주빈(主賓)이고, 나는 너를 대접하는 주인이 아니냐?
천 리 타향에서 찾아온 귀빈을 제쳐 놓고, 어찌 내가 먼저 술을 마실 수 있겠느냐?
그 대신 네가 술을 마시고 나거든 그 술잔을 내게 돌려라. 네가 주는 술이라면 나도 기쁜 마음으로 마시리로다.”
술을 먼저 마시고 난 뒤에 그 술잔을 자기한테 돌려 달라는 말에 여의는 한결 마음이 놓였다.

그 술이 독주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여의는 마침내 술을 마시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면 소자가 이 술을 먼저 마시고 나서 어마마마께 새로 따라 올리겠습니다.”
마침내 여의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술은 얼마나 독한 술인지 여의는 술을 두 모금 마시다 말고 별안간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방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연달아 몸부림을 치며 괴성을 지르는데, 그때 여의에 입에서는 이미 붉은 피가 연실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태후는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처럼 처참한 광경을 줄곧 회심의 미소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의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미친 사람처럼 방바닥을 구르고 기어 다녔다.

그러다 여의는 마침내 고개를 푹 꺾으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여 태후는 여의의 광적인 발작에 이은 죽음을 확인하자 별안간 손뼉을 치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호호호, 내가 이제야 원수 하나만은 가까스로 처치해 버렸구나.”
사람으로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악독한 말을 하고, 태후는 즉석에서 시종들을 불러 명한다.

“여봐라! 이 시체를 당장 끌어내 후원 오동나무 밑에 묻어 버려라.
그리고 이 사실을 입 밖에 내는 자는 결코 살려 두지 않을 것이니 모두 입을 조심하거라.”
달려온 시종들은 너무도 끔찍스러운 광경에 모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태후의 서슬이 워낙 푸른지라 이런 사실을 누구도 감히 입 밖에는 내지 못했다.
이리하여 어린 조왕 여의는 아무 죄도 없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단지 척비의 몸에서 태어난 죄로 여 태후의 손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하지만 악독하고도 처절한 이런 범죄 사실이 과연 언제까지나 비밀이 보장될 것인가.

한편, 혜제가 새벽에 사냥을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와 보니 여의가 대궐 안에 없지 않은가?
혜제는 깜짝 놀라 시종에게 물었다.

“조왕이 보이지 않으니 웬일이냐? 조왕은 어디 갔느냐?”
“조왕께서는 아무 말씀도 없이 어떤 사람과 함께 나가셨사옵니다.
짐작컨데 조왕께서는 미앙궁으로 태후마마를 뵈러 가신 것이 아닌가 싶사옵니다.”
혜제는 기절초풍할 듯이 놀랐다.

“뭐야? 조왕이 미앙궁으로 태후를 뵈러 갔다고? 그게 틀림없는 사실이냐?”
“자세히는 알 길이 없사오나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조왕께서는 태후를 모시고 술을 마시고 계셨다고 하옵니다.”
“뭣이? 조왕이 태후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혜제는 불길한 예감이 솟구쳐 올라 여의를 구출하려고 부리나케 미앙궁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미앙궁에는 조왕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태후는 혜제가 나타난 것을 보고 천연스럽게 묻는다.

“주상은 무슨 일로 이렇게 늦게 오셨소?”
혜제는 문안도 생략한 채 다급하게 물었다.

“조왕이 이곳에 왔다고 들었는데, 조왕은 어디로 갔사옵니까? 저는 조왕을 데려가려고 왔사옵니다.”
혜제가 노골적으로 태후를 비난하는 어조로 묻자, 태후는 별안간 얼굴에 노기를 띠며 황제를 나무란다.

“조왕을 데려가려고 왔다고요? 흥! 조왕은 주상의 원수요. 그런 놈을 데려다가 어떡하겠다는 것이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혜제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왕이 나의 원수라뇨? 태후께서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옵니까?
조왕은 사랑하는 나의 아우입니다. 형제가 어떻게 원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여 태후는 화가 동하며 거친 말을 쏟아내었다.

“주상은 내 말을 똑똑히 들어 보시오. 선제가 생존해 계실 때 선제는 여의 모자를 편애한 나머지 태자를 내쫓고 그놈을 태자로 책봉하려고 하였소.
그때 장량 선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놈이 천자가 되고, 주상과 나는 지금쯤은 죽거나 거지 신세가 되었을 것이오.
그 같은 과거가 있었음에도 불고하고, 주상은 그 원수 놈을 결사적으로 끼고 돌기에 나는 그 꼴을 보다 못해 오늘은 그놈을 꾀어다가 독주를 먹여 죽여 버렸소.”
“엣? 조왕을 독살시켰다고요?”
혜제는 까무러칠 듯이 놀라 이내 미친 사람처럼 태후에게 마구 떠들어댔다.

“여의를 독살하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여의와 나는 한 핏줄을 이어받은 형제지간이 아니오? 형제간에 누가 천자가 되는 것이 무슨 상관이라는 말이오.
어마마마는 자식을 죽였으니 이것은 천리(天理)에도 벗어나고 인도(人道)에도 벗어나는 짓이오.”
이렇게 혜제가 광태(狂態)를 부리며 덤벼들었다.

그 바람에 여 태후는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옆방으로 피해 버렸다.
그러나 혜제에게 공격을 받고 보니 ‘그년 모자’에 대한 태후의 앙심은 더욱 끓어올랐다.

- 제 189화에 계속 -

'초 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초한지 마지막회  (0) 2021.09.09
초한지187화  (0) 2021.09.07
초한지186화  (0) 2021.09.06
초한지 185화  (0) 2021.09.05
초한지184화  (0) 2021.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