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87화

2021. 9. 7. 06:58초 한지


★ 19금(禁)초한지 (楚漢誌) - 187화

☞ 장안으로 돌아오는 척씨 소생 조왕(趙王) 유여의(劉如意)

양운을 만난 주창은 이렇게 말했다.

“황제께서 내리신 조서는 잘 받아 보았소이다. 대왕은 생모께서 중병 중이라는 말씀을 들으시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시오.
자식된 도리로서는 당장 문병을 가셔야 옳을 것이오. 그러나 공교롭게도 대왕 자신이 지금 신병으로 자리를 보존하고 누워 계시기 때문에 도저히 문병을 가실 형편이 못 되는구려.
귀공은 그리 알고 오늘은 돌아가셔서 이곳 사정을 사실대로 여쭤 주시오.”
주창은 양운을 돌려보낸 뒤 조왕을 찾아와서 아뢴다.

“양운이라는 자를 듣기 좋은 말로 달래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두고 보십시오. 그자가 헛물을 켜고 돌아갔으니 여 태후는 조만간 다른 사신을 또 보내올 것입니다.
하지만 저들이 사신을 아무리 여러 번 보내와도 대왕께서는 저들의 함정에 결코 말려들지 말아야 하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경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리하여 조왕 여의는 우선 당면한 죽음을 모면할 수가 있었다.

한편, 여 태후는 양운이 헛물을 켜고 돌아오자, 길길이 분노하며 양운에게 따져 묻는다.

“조서를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병을 핑계로 오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냐?
여의가 병 때문에 못 오겠다고 했으면 네가 보기에도 그게 사실인 것 같더냐?”
“조왕을 직접 만나 보지는 못하고 주창을 통해 말만 들었을 뿐이옵니다.
짐작컨대 조왕은 병이 든 것은 아니오나 주창이 앞을 가로막고 못 오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말에 여 태후는 더 한층 분노를 금치 못했다.

“저런 죽일 놈이 있나? 주창이란 자가 중간에서 그런 농간을 부린다면, 이제는 그놈부터 죽여 없애야 하겠구나!”
한번 결심을 하게 되면 주저할 줄을 모르는 것이 여 태후의 성품이었기에 즉석에서 번쾌의 아들인 번항(樊亢)을 불러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그대에게 정병 5백 명을 줄 테니 그대는 지금부터 한단으로 달려가 주창이라는 자를 잡아오도록 하여라.
만약 그자가 순순히 불려오지 않으려 한다면 목을 잘라 와도 무방하다.”
번항은 명령을 받고, 곧 한단으로 떠났으나 주창은 첩자들을 통하여 그런 소식을 전해 듣고 크게 웃으며 말했다.

“대왕을 보내라면 못 보내겠지만, 나야 무엇이 두려워 못 가겠느냐? 나는 언제든지 소환에 응할 자신이 있다.”
주창은 그만큼 자신이 있었으나 조왕 여의는 크게 걱정하며 만류한다.

“여 태후가 군사를 보내 경을 부른다니 무슨 까닭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함부로 가셨다가 무슨 변을 당하실지 모르니 경은 가셔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신이 태후의 손에 죽지는 않을 것이오니 신에 대한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마시옵소서. 다만 신에게는 걱정스러운 일이 하나 있사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오라 신이 없는 동안에 누가 대왕을 보필해 드릴까 하는 것이옵니다.”
“나는 여기서 편히 앉아 있는 몸인데, 무슨 그런 걱정까지 하십니까?”
그러나 주창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진지한 얼굴로 말한다.

“이번 일을 그처럼 안일하게 생각하셨다가는 큰일 나시옵니다. 신이 이곳을 떠나게 되면 태후는 대왕을 장안으로 불러올리려고 또다시 사신을 보내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장안으로 가셔서는 아니 되시옵니다. 그 점만은 거듭 명심해 주소서.”
“알겠습니다. 경은 빨리 돌아오셔서 나를 끝까지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주창은 조왕과 눈물로 작별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자, 아우 주선(周宣)을 불러 부탁을 한다.

“나는 번항이 도착하는 대로 그와 함께 장안으로 떠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한단을 떠나기 전에 황제께 올릴 비밀 표문(表文)을 써 줄 테니, 너는 나보다 장안으로 먼저 달려가 표문을 황제께 빨리 올리도록 하거라. 그래야만 조왕의 일이 잘 되어갈 것이다.”
그러면서 주창이 혜제에게 표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다.

“....선제(先帝)께서는 태후가 여의 공자를 해칠 뜻을 품고 있음을 진작부터 알고 계셨기 때문에 그런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시려고 여의 공자를 머나먼 조왕으로 보내셨던 것이옵니다.
그리고 신에게는 ‘여의 공자를 최선을 다해 도와주라’는 특별 분부가 계셨기 때문에 신은 오늘날까지 전력을 기울여 조왕을 보필해 왔사옵니다.
그러나 선제께서 돌아가시자 사정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태후께서는 사신을 한단으로 보내어 조왕을 장안으로 빨리 올라오라고 성화같이 재촉하고 계시니 그렇게 되면 어떤 참변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하기가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리하여 신이 조왕의 장안 행(行)을 결사적으로 막아오고 있던 중에 이제는 신마저도 장안으로 불러올리셨으니 신이 이곳 한단을 떠나고 난 뒤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옛날부터 동기간인 여의 공자를 각별히 사랑하시는 줄로 알고 있사와 크게 걱정되는 바는 없사오나, 태후마마께서는 폐하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사오니 신이 한단을 떠나게 되더라도 폐하께서는 조왕의 신변에 아무런 불상사도 일어나지 않도록 각별히 도와주시옵기를 간곡히 부탁드리옵니다.
신하 주창 올림“

새로 등극한 혜제(惠帝)와 여의는 비록 이복형제이지만 혜제가 여의를 무척 사랑하는 줄로 알고 있었기에 주창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이런 표문을 비밀리에 혜제에게 손수 써 올린 것이었다.

이렇게 주창은 혜제에게 예방선을 쳐놓고 나서 떠날 준비를 했다.
주창은 곧 도착한 번항과 함께 장안으로 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런데 주창이 동관(潼關)이라는 곳에 도착하고 보니 그곳에는 관영 장군이 혜제의 명을 받고 주창을 마중 나와 있었다.
관영과 주창은 막역한 친구 사이라 주창은 크게 반가워하며 관영에게 묻는다.

“아니, 자네는 내가 어떻게 오는 줄을 알고 여기에 나와 있는가?”
그러자 관영은 번항이 들으라는 듯이 주창에게 손짓을 해보이며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 아닌가?

“태후마마께서 사신을 보내어 조왕을 상경토록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자네가 번번이 앞에 나서서 방해를 놓았다면서?
주상께서는 그 말을 들으시고 크게 노하시면서 자네를 당장 체포해 오라고 하셨네. 그러니 자네는 두말 말고 나와 함께 폐하한테로 가세.”
그리고 번항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주상의 명령대로 내가 책임지고 체포해 갈 테니 자네는 태후궁으로 가서 태후마마에게 사실대로 여쭙게.”
관영은 번항을 보내고 나서 주창에게 다시 말한다.

“주상께서 자네가 올린 표문을 보시고 크게 걱정을 하시면서 자네를 태후 앞으로 보내지 말고 어전으로 직접 데려오라고 하셨네.
그 때문에 내가 마중을 나왔으니 자네는 주상을 만나 뵙거든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도록 하게.”
이윽고 주창이 입궐하자, 혜제는 무척 반가워하면서 말한다.

“내 아우 여의 때문에 경이 많은 애를 써 오셔서 고맙기 한량없소이다. 문중에 불상사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니 내 아우 여의는 내가 온갖 힘을 다해 보호해 주도록 하겠소.
그러나 태후께서는 경을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시는 모양이니 무슨 일로 노여워하시는지 태후를 이 자리에 모셔다가 이유를 묻도록 하겠소.”
이윽고 여 태후가 들어와 상좌에 앉자, 혜제는 머리를 조아리며 묻는다.

“태후께서는 한단에 있는 조왕에게 장안으로 올라오라고 하셨는데, 어린 조왕을 무슨 용무로 부르셨사옵니까?”
태후는 주창을 증오의 눈으로 노려보다가 혜제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조왕의 생모인 척녀가 지난번에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아들을 꼭 한번 보고 싶다고 하기에 내가 조왕을 불러올리려고 했던 것이오.
그러나 주창이란 저자가 그때마다 조왕의 상경을 훼방한다기에 나는 저놈의 행실이 너무나도 괘씸하여 번항을 보내 저놈을 붙잡아 오라고 했던 것이오.”
태후로서는 주창을 죽이기 위해 장안으로 불렀다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혜제는 태후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시치미를 떼고 이렇게 말했다.

“선제께서 여의를 조왕으로 보내실 때 주창을 보필자로 따라 보내시면서 설사 조정에서 조서가 내려가더라도 조왕은 임지를 떠나지 말도록 분부가 계셨던 줄로 알고 있사옵니다.
그러므로 조왕을 장안으로 올려 보내지 않은 것은 선제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지 태후마마의 명령을 거역한 죄는 아닌 줄로 아뢰옵니다.
그러하니 그 일은 특별히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러나 태후는 혜제가 두둔할수록 주창이 더욱 미웠다.

태후는 주창을 잡아 오는 길로 곧장 죽여 버릴 결심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황제가 중간에서 주창을 두둔하고 나서는 바람에 태후는 입장이 매우 난처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생트집을 잡고 늘어진다.

“주창은 잘 듣거라. 조왕과 나는 모자지간(母子之間)이 아니냐? 그런데 그대가 중간에 나서서 조왕과 나와의 모자지정을 갈라놓았다.
그런 나쁜 짓을 한 그대를 조나라에 다시 보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그대는 앞으로 장안에만 머물러 있도록 하라.
나의 명령을 또다시 거역했다가는 결단코 용서하지 않으리로다.”
태후는 주창을 장안에 억류시켜 놓고, 그 사이에 조왕을 불러올려 죽여 버릴 계획이었던 것이다.

“............”
주창은 머리를 수그린 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태후가 돌아가 버렸다.
황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창에게 말한다.

“경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태후는 조왕 모자를 어떡하든지 죽여 없애려고 하고 계시오.
지난번에도 경이 중간에서 조왕을 상경하지 못하도록 막지 않았던들 조왕은 이미 태후의 손에 죽고 말았을 것이오.
그러니까 태후는 경에게 원한을 품고 한단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이것 참, 일이 매우 딱하게 되었구려. 그렇다고 태후의 명을 거역하고 경이 한단으로 돌아가 버리면, 그때는 조왕 모자의 장래가 점점 나빠질 것이오.
아무튼 경은 당분간 나와 함께 있으면서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기로 합시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성상께서 특별히 도와주지 않으시면 황실에 처참한 참극이 벌어질 것이옵니다.
신이 죽는 것은 조금도 두렵지 아니하오나 신이 한단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어린 조왕을 누가 도와드릴 것이옵니까?
보나 마나 태후는 제가 없는 틈을 타서 한단으로 사신을 다시 보내 조왕을 반드시 불러올릴 것이옵니다.
그렇게 조왕께서 멋모르고 장안으로 올라오시는 날이면, 그날로 참변을 당하시게 될 것이옵니다.
그러하니 주상께서는 그런 참변이 일어나지 않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주시옵소서.”
황제는 생각할수록 골머리가 아팠다.

“만약 조왕이 태후의 부르심을 받고 멋모르고 상경하게 되면, 어떤 방법으로 참변을 막을 수 있겠소?”
주창은 눈을 감고 오랫동안 생각해 보다 문득 고개를 들며 이렇게 말했다.

“만약 조왕께서 멋모르고 상경하시게 되면, 매우 외람된 말씀이오나 주상께서 패상(覇上)까지 몸소 마중을 나가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조왕을 그 길로 대궐로 모시고 오시옵소서.
조왕을 참극에서 구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 길이 있을 뿐이옵니다.”
혜제는 주창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경의 의견은 참으로 묘안이시오.
조왕이 언제 누구의 꾐을 받아 상경하게 될지 모르니까 몇 사람의 장수를 장안에 이르는 길목에 배치시켜 조왕이 상경하거든 우리가 먼저 알아내도록 합시다.”
혜제는 즉석에서 장륭, 이보, 축통 등 대장들을 한단에서 오는 대로(大路)를 검색하게 하고, 기퉁, 유범두 장군 등은 한단에서 오는 소로(小路)를 지키게 하였다.

황제는 이처럼 전력을 기울여 황실의 참극을 막아내기 위하여 애를 썼던 것이다.
한편, 태후는 태후궁으로 돌아오자, 심이기와 여수 등 두 심복 부하를 불러 명한다.

“주창이란 놈은 한단에 다시 돌아가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려놓았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여의를 장안으로 불러올릴 수 있겠느냐? 좋은 의견이 있거든 말해 보아라.”
심이기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한다.

“주창과 척비의 이름으로 조왕에게 ‘빨리 상경하라’는 거짓 편지를 보내도록 하시옵소서. 그와 같은 편지를 보내시면 조왕은 틀림없이 상경할 것이옵니다.”
태후는 그 말을 옳게 여겨 즉시 조왕에게 주창과 척비의 이름으로 두 통의 편지를 동시에 보냈다.

한편, 조왕 여의는 주창이 장안에서 빨리 돌아오기를 고대하고 있는 중인데, 하루는 근시(近侍)가 두 통의 편지를 가지고 들어와 이렇게 아뢰는 것이었다.

“장안에서 사신이 두 통의 편지를 가지고 왔사온데, 한 통은 대왕모마마께서 보내신 친서이옵고, 다른 한 통은 주창 대부께서 보내신 친서이옵니다.”
조왕은 그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하며, 두 통의 편지를 즉석에서 읽어 보았는데, 생모가 보낸 편지에는

“... 나는 병이 위독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형편이로다. 죽기 전에 네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구나.
에미의 마지막 소원이니 너는 하루속히 서궁으로 돌아와 이 에미를 만나다오.“
하는 사연이 씌어 있었고,

대부 주창의 편지에는
“대왕모마마의 신병이 이렇게나 위독하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지금 형편으로는 언제 돌아가시게 될지 모를 형편이오니 대왕께서는 제만사(除萬事)하시고, 빨리 상경하시와 최후의 효공(孝供)을 드리도록 하시옵소서.
신은 대왕께서 속히 상경하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있겠습니다.”
하는 사연이 씌어 있어서 어린 조왕은 두 통의 편지를 읽어 보고 울음을 터뜨리며 말한다.

“어머님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빨리 상경해야 하겠으니 길 떠날 준비를 급히 차리시오.”
하고 소신을 분명히 밝혔다.

그러자 중신들이 입을 모아 떠나기를 만류하였다.
그러나 조왕은 누구의 만류도 듣지 않고 그날로 장안으로 향했다.

- 제 188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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