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한지186화

2021. 9. 6. 08:31초 한지


★ 19금(禁) 초한지(楚漢誌) - 186화

☞ 여 태후의 한(恨)

여 황후는 이팔청춘의 꽃다운 나이로 무명 청년이었던 유방과 결혼하여 한평생을 유방과 더불어 생사고락을 같이해 왔었다.

유방이 천하를 얻어 보려는 대 야심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전선(戰線)에서 전선으로 동분서주하기를 장장 30여 년이 흘렀다.

그간 여 황후는 젊은 나이로 얼마나 많은 고독과 함께 불안과 걱정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을 것인가?
그러나 본시 성품이 강인하기 짝이 없었던 여 황후였다.

그런 여 황후는 남편이 대업을 성취하는데 아낌없는 협조를 다해 온 것은 물론이고,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는데 있어 내조의 힘을 유감없이 발휘해 왔던 것이다.

천하만 통일하고 나면 여 황후는 천하의 국모(國母)로서 유방과 더불어 여생을 행복하게 살아가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천하를 통일하고 보니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유방은 천하를 통일한 뒤에 여 황후에게는 오직 ‘황후(皇后)’라는 허울 좋은 명칭 하나만을 남겨 주었을 뿐 하룻밤도 따뜻한 애정을 베풀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통일된 이후에 남편 유방은 더 많은 찬란한 여색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
게다가 이제 여 황후는 너무도 늙어 버렸기 때문에 거들떠보지 은 것도 물론이었다.

더구나 수수 대전에서 참패할 때 하룻밤 인연으로 만난 젊고 아리따운 척씨 부인을 공공연히 서궁(西宮)에 데려다 놓고, 밤낮으로 가진 애정을 쏟고 있으니 여 황후는 자신으로부터 남편을 빼앗아 간 척씨 부인에게 이를 갈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오냐, 이년! 어디 두고 보자! 나는 이 원한을 언젠가 네년에게 반드시 갚고야 말리라!’
이렇게 독한 마음을 품고 있었지만 남편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남편의 위세에 눌려 감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면서 밤마다 독수공방(獨守空房)을 하며 치밀어 오르는 정염(情炎)을 억제하고 살아가자니 척비에 대한 복수심은 날이 갈수록 뼈에 사무칠 지경이 되었다.

문제는 거기에서만 끝나지 않았으니 여 황후는 자신의 아들인 영(盈)이 이미 태자로 책립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척비는 남편을 이불 속에서 구워삶아 척비의 아들 여의(如意)로 태자를 바꾸려는 책동까지 하지 않았던가!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이지만, 만약 여의가 자신의 아들인 ‘영’을 제치고 태자로 책봉된다면, 여 황후는 ‘황후의 자리’까지 졸지에 척비에게 빼앗겨 버리는 신세로 전락하지 않을 것인가?

천만다행으로 황태자를 바꾸려 한 문제는 조정 대신들의 적극적인 반대와 장량 선생의 도움을 얻어 원만하게 해결하기는 하였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갈등과 잡음은 따지고 보면 척비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니 자연스럽게 여 황후는 척비를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원수로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척비가 남편을 빼앗아 간 것만도 가슴을 치며 통곡할 노릇인데, 이제는 황후의 자리까지 빼앗아 가려고 유방을 꼬드겼으니 여 황후가 이를 갈며 복수심에 불타오르는 것은 여자로서는 당연한 감정이었을 것이다.

마누라를 둘씩이나 거느렸다면 세상 모든 남자들이 부럽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두 집 생활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의 선망(羨望)일 뿐이다.

정작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두 여자의 입장과 처신 사이에서 ‘애정’의 배분(配分)을 공평무사하게 할 수 있는 비결이란 결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뿐만이 아니라 남자가 가지고 있는 재물은 물론이려니와 그의 사회적인 위세와 집안에서의 위엄까지도 두 여자에게 공평하게 나눌 수는 없는 일이 아니던가!

그나저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씨앗 싸움이다.
일반 세인(世人)들 조차에서도 ‘씨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속담도 있다.

이러할 진데 유방의 경우에는 천하의 대권(大權)을 한 손에 장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떤 씨앗이 장차 이를 물려받을 것인가?

유방은 오랫동안 두 여인을 거느리고 살아온 관계로 씨앗 싸움의 심각성을 몸소 겪어 왔었다.
그러면서 여 황후와 척비는 공존(共存)하기 어려운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유방은 임종에 즈음하여 태자를 불러 놓고, 그 문제를 슬기롭게 처리해 주도록 간곡한 유언까지 남기지 않았던가!

※ 註) 실제 호색한(好色漢)으로 유명한 황제 유방이 두 여인만 있었겠느냐마는 주로 여황후 ‘여치(呂雉)’와 척씨 부인 ‘척희(戚姬)’ 사이의 갈등이 가장 심하였으므로 여기서는 이 두 여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함.

어떤 이는 제3의 여인 박씨 부인(薄氏 夫人)을 최후의 승자라고 하기도 하는데, 유방이 박씨 부인은 별로 찾지 않으니 여황후가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이로 인해 갈등이 없을 수밖에 없었으며, 나중에 박씨 부인은 자신의 아들인 유항이 대(代)나라 왕이 되어 임지로 갈 때 함께 가서 편히 지내게 된다.

※ 註) 박씨 부인(薄氏 夫人) : 서위왕 위표의 여인으로 유방이 위표를 죽인 후 그녀의 미모에 반해 후궁으로 들였지만 유방이 박씨 부인에게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고 함.

유방이 죽은 후 2대 황제인 유영을 대신해 섭정을 하는 여 태후는 자신의 친정 일족인 여씨들을 대거 등용하며 실권을 잡아 폭정을 하게 된다.

또한 자신의 아들인 유영도 독살시키며, 3대, 4대 황제를 자신이 허수아비처럼 앉혀놓고, 나중에는 자신이 직접 천하를 다스리다가 여씨를 황제로 세우려는 ‘여씨반란’ 사건을 촉발하게 된다.

이에 여태후가 죽은 후 대부 진평 등이 주동이 되어 여씨 일족을 완전히 몰아내고, 다시 유씨에게 황제의 자리를 이어주게 되는데, 이때 5대 황제로 등극하는 이가 바로 박씨 소생의 유항이다.

자신의 아들인 여의를 태자로 세우기 위해 베갯머리송사를 했던 척비는 아들도 살해되고, 자신도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지만, 박씨 부인(薄氏 夫人)은 5대 황제의 어머니로 결국 박태후로 떠받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조용히 지낸 박씨가 정치 일선에서 나라를 좌지우지한 여 태후나 미색으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은 척비보다 최후의 승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씨앗 싸움이란 유언 하나로서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유방이 죽었을 때 여 황후는 60 고개를 바라보는 노파였다.

게다가 남편이 죽고 자신의 아들인 태자가 제위에 오르자, 그녀는 태후(太后)라는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60이 다 된 일국의 태후라면 누가 보아도 점잖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씨앗 싸움의 감정에는 나이도 체면도 없었다.
남편이 죽고 나자, 그녀의 머릿속에 대뜸 떠오른 생각은

‘척비 년을 그렇게나 알뜰살뜰하게 감싸주던 영감이 죽었으니 이제야말로 그년과 그년의 아들을 내 손으로 죽여 버릴 때가 되었구나.
이 년 놈들 어디 두고 보자. 내 반드시 너희 모자를 죽여 없애리라.’
하는 복수심뿐이었다.

여 태후의 가슴속에는 척씨 부인 모자에 대한 원한이 이토록 사무쳐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남편이 숨을 거두기가 무섭게 여 태후는 동생인 ‘여수(呂嬃, 번쾌의 아내)’를 불러 이렇게 명했다.

“주상께서 돌아가셨으니 척녀가 아들에게로 도망을 갈지 모른다.
너는 지금 서궁으로 관헌(官憲)들을 데리고 달려가 그년을 당장 영항(永巷, 궁녀들의 감옥)에 가두어 놓고 엄하게 감시토록 하여라.”
여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한다.

“돌아가신 폐하께서 그렇게나 총애하시던 ‘서궁(西宮)마마’를 무슨 까닭으로 영항에 감금하시라는 분부이시옵니까?”
그러자 여 태후는 화를 발칵 내며 말한다.

“백 번 죽여도 시원치 않을 그년을 너는 어째서 ‘서궁마마’라는 존칭으로 부르고 있느냐?
아무튼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 당장 달려가 그년을 하옥시키란 말이다.
만약 나의 명령에 차질이 있게 된다면 너 자신도 무사치 못하리라.”
서릿발 같은 무서운 명령이었다.

태후의 명령이고 보니 여수는 감히 거역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수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다.

아무 까닭도 없이 ‘척비를 하옥시키라’는 태후의 명령이 너무도 무모하게 여겨져서 여수는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아뢴다.

“마마의 분부대로 그분을 하옥은 시키겠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하옥시키면 매우 복잡한 사건이 발생할 것 같사오니 그 점을 아울러 생각해 주시옵소서.”
“그년을 하옥시킨다고 무슨 복잡한 사건이 발생한다고 하는 것이냐?”
여수가 예측한 대로 태후는 앞뒤를 전혀 생각지 않았다.

그리해서 무작정 명령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여수는 조용히 이렇게 대답했다.

“마마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그분에게는 ‘여의’라는 아드님이 있사옵니다.
지금 ‘조왕(趙王)’으로 있는 아드님이 자신의 모친이 하옥된 것을 알게 되면 절대로 가만있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조왕 자신은 아직 나이가 어려 별로 두려워할 존재는 못 되오나 그의 곁에는 주창(周昌)이라는 명 모사(名謀士)가 있사옵니다.
만약 주창이 조왕모(趙王母)를 구출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켜 온다면, 그들을 어떻게 막아 낼 수 있을 것이옵니까?”
태후는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말에 크게 당황하였다.

지금 나라가 상중(喪中)에 있는 이 판국에 주창이 그년을 구출하기 위해 대군을 몰아쳐 온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년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가 도망이라도 치는 날이면 영원히 복수를 못하게 될 것이 아니겠나?
태후는 입술을 깨물며 오랫동안 심사숙고하더니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 결연한 어조로 말한다.

“나중에야 어찌 되든 간에 우선은 그년을 하옥시켜라. 그러고 나서 여의를 좋은 말로 꾀어다가 그놈까지 죽여 없애버리면 될 게 아니겠느냐?”
무서운 복수심이었고, 그러기에 여수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게 하실 바에는 그분을 옥에 가두어 나쁜 소문이 퍼지게 할 게 아니라, 숫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없애는 것이 훨씬 유리할 것이옵니다.”
그러자 태후는 고개를 흔들며 말한다.

“그건 안 될 말이다. 나는 그년 때문에 십 수 년을 애간장을 태워 왔었다.
그년을 죽이기는 죽이되 단박에 죽일 일이 아니라, 두고두고 애를 태우다가 몇 년 후에나 죽일 생각이로다. 그래야만 나의 한이 조금이라도 풀릴 것이다.”
악독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여자들의 원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했던가?
이렇게 태후의 말에는 무서운 독기(毒氣)가 서려 있었던 것이다.

태후는 척비를 하옥시키고 나자, 이제는 조왕 여의까지 죽여 버릴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유방이 사망했음을 알리는 동시에 신제(新帝)의 이름으로 위조 조서를 작성하여 환관 양운(楊雲)을 시켜 조왕에게 보냈다.

조서의 내용은 이러했다.

“선제(先帝)가 돌아가신 뒤에 너의 생모(生母)께서 병으로 위독하시니 빨리 오너라.”
조왕 여의의 나이는 이제 겨우 13살이었다.

따라서 아직은 어머니의 슬하에서 모정을 받아야 하는 어린 상태였기에 지금도 어린아이처럼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기에 여의는 조서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즉석에서 재상 주창을 불러 상의한다.

“아바마마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께서 병을 얻으셔서 위독하다는 소식이 왔으니 나는 장안으로 빨리 가봐야 하겠습니다.”
주창은 문제의 조서를 면밀히 검토해 보고 나서 조용히 아뢴다.

“이 조서는 위조 조서이오니 대왕께서는 조금도 염려하지 마소서.
황제께서 붕어하신 것은 사실이오나 대왕모(大王母)께서 병중이란 말은 근거 없는 거짓말이옵니다.”
“이 조서가 위조 조서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어머님이 병중이 아니라면 신제(新帝)인 형님께서 무엇 때문에 나에게 이런 조서를 보내셨겠습니까?”
“신제께서 대왕 앞으로 조서를 보내신다면, 반드시 친필 조서를 보내셨을 터인데, 이 조서의 글씨는 신제의 필적이 아니옵니다.
필적이 다른 것을 어찌 진짜 조서로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누가 무엇 때문에 이런 거짓 조서를 보냈다는 말씀입니까?”
주창은 오랫동안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다 결연히 입을 열어 답한다.

“황실의 내분지사(內紛之事)이므로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여 황후께서는 옛날부터 대왕을 살해(殺害)하려는 뜻을 품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장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여 황후의 뜻을 쉽게 이룰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 선제(先帝)께서 돌아가신 뒤 대왕모의 거짓 와병(臥病)을 핑계로 대왕을 장안으로 불러올려 살해하려고 거짓 조서를 보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나이 어린 여의는 그 말을 얼른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경은 이 조서를 거짓 조서라고 하시지만, 그 말씀을 믿고 상경하지 않았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하면 그런 불효(不孝)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조서는 분명한 가짜 조서이옵니다. 그것만은 신이 목숨을 걸고 단언할 수 있사옵니다.”
“어디다 근거를 두고 그런 장담을 하십니까?”
“필적도 신제의 필적이 아님이 분명하지만, 조서에 찍힌 어인(御印)도 황제께서 쓰시는 신인(信印)이 아니옵니다.
게다가 폐하께서 조서를 보내실 때는 어엿한 사신(使臣)을 보내는 법이온데, 이 조서를 가지고 온 양운이라는 자는 여 황후의 측근인 일개 환관에 지나지 않는 자이옵니다.
그러므로 이런 조서를 믿고 상경하셨다가는 대왕의 신변에 커다란 재앙이 일어날 것이옵니다.”
“음... 정말로 그럴까요?”
“그렇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신이 양운을 적당히 달래서 돌려보낼 터이니 대왕께서는 신을 믿어 주시옵소서.”
주창은 어린 조왕을 가까스로 달래 놓고, 가짜 특사인 양운을 만났다.

- 제 187화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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