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면교사, 조선의 혼군

2026. 1. 30. 12:11자유게시방

 

[내일을 열며] 반면교사, 조선의 혼군

혼군(昏君)은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을 뜻하는 말이다.

대척점에 서 있는 성군(聖君)을 생각하면 의미가 분명하게 들어온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가 쓴 ‘혼군’을 보면

자명한 폭군(暴君) 연산군과 광해군, 더불어 왜란과 호란을 초래하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던 선조와 인조도 혼군으로 분류한다.

혼군에게 공통적인 특징은 불통이다.

연산군을 예로 들면, 그가 가장 싫어했던 말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능상(凌上)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경연(經筵)을 폐지한 것도 자연스러운 행보였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연산군은

“나는 경연이 아니라도 내 역량을 넓힐 수 있으니 경연을 하지 않고 내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왕과 신하들이 함께 토론하던 경연의 핵심은 왕권에 대한 견제 기능이었다.

견제 없이 왕에게 충성만을 강요했던 연산군은 신하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연이어 일으켰고,

조정의 신하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복지부동했다.

결국 연산군의 공포정치와 패륜은 중종반정으로 끝이 난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실용적 중립외교를 주창하고 대동법을 실시한 광해군은 성군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를 몰락시킨 건 미신과 비선 실세였다.

광해군은

“한양은 땅의 기운이 다했다”는 풍수지리사 이의신의 말을 믿고

파주 교하로 천도를 시도했다.

인왕산 아래 선조의 다섯째 아들 정원군의 집에 왕의 기운이 흐른다는 풍수지리사 김일룡에게 홀려 정원군의 집을 빼앗아 경덕궁도 지었다. 경덕궁에 더해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경복궁 자리에 10배 규모의 인경궁 공사를 시작하는 등 무리한 토목 공사는 계속됐다.

막대한 재원 마련을 위해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상황에서 부정부패는 횡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가운데 광해군의 총애를 받으며 인사권을 장악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은 상궁 김개시의 등장은 필연이었다.

연산군이나 광해군처럼 비록 탄핵을 당하진 않았지만

선조와 인조는 무능의 대명사로 통한다.

조선 최초의 방계 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선조는

왜란에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북쪽으로 도망갔다.

심지어 명나라로의 망명 시도까지 했다.

비겁한 왕에게 성난 민심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까지 모두 불태웠다.

병적인 시기심으로 일등공신 이순신을 박해하고,

곽재우 김덕령 등 의병장들을 역모로 몰기도 했다.

왜군이 물러나자 명나라 군대를 불러온 것은 자신이라고 공치사하기에 바빴다.

‘공은 내 것이고 과는 네 것’이라는 실패한 리더십의 전형이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어떤가.

급변하는 국외 정세를 따라가지 못하고 ‘친명배금’이라는 명분에 사로잡혀 두 번의 호란을 막지 못했고,

결국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했다.

그때 조선은 청나라 연호를 사용하고 세자와 왕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내기로 하는 등 굴욕적인 군신 관계를 맺는다.

그렇게 당하고도 인조는 바뀌지 않았다.

청나라에 대한 분노에만 빠져 있던 인조는 청나라에서 서구 문물과 새로운 정세를 배우고 돌아온 아들 소현세자를 시기하고 구박했다.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소현세자가 의문의 죽임을 당한 뒤에는 며느리와 손자까지 죽음으로 내모는 패륜적인 모습도 보였다.

반면교사라는 말이 너무나도 어울리는 혼군의 모습들이다.

- 맹경환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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