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사의 친구란
2025. 11. 15. 10:07ㆍ자유게시방
정진사는 한평생 살아오면서 남의 가슴에 못 한번 박은 적이 없고
적선 쌓은 것을 펼쳐 놓으면 아마도 만경창파 같은 들판을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다보니 선대로 물려받은 그 많던 재산을 야금야금 팔아치워 겨우 제 식구 굶기지 않을 정도의 중농 집안이 되었다
정진사는 덕만 쌓은 것이 아니라 학문이 깊고 붓을 붙잡고 휘갈기는 솜씨는 명필이었다
정진사네 사랑방엔 선비와 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부인과 혼기찬 두 딸은 허구 한날 밥상 술상을 차려 사랑방
을 들락날락 하는것이 일과였다
어느 날 오랫만에 허법 스님이 찾아왔다
잊을만 하면 정진사를 찾아와
고담주론을 즐기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허법스님을 정진사는 스승처럼 대했다
그날도 오랫만에 허법 스님이 찾아왔다
사랑방엔 사람들이 가득차 처마밑 디딤돌에 앉아 기다리자 손님들이 눈치를 채고 우루루 몰려 나갔다
허법스님과 정진사가 곡차
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정진사는 친구가 도대체 몇명
이나 되오?
스님이 묻자 정진사는 천장을 보고 한참을 생각 하더니 얼추 일흔명은 넘을것같소
스님은 혀를 끌끌찼다
진사는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요
정진사는 눈을 크게 뜨고 문을 활짝 열더니 말했다
스님 가득 펼쳐진 저 들판을 모두 남의 손에 넘기고 친구 일흔명을 샀습니다
스님은 껄껄 웃으면서 친구란?
하나 아니면 둘 많으면 셋 그 이상은 친구가 아닐세
두 사람은 밤새도록 곡차를 마시다가 꼬꾸라졌고 정진사가 눈을 떳을때는 스님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음날 부터 정진사네 대문은 굳게 닫혔고 집안에서는 기침 소리와 의원만 들락거려 글 친구들은 발길을 돌렸다
열흘이 가고 보름이가도 정
진사네 대문은 열리지 않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날 밤에 곡 소리가 터졌다
빈소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부인과 딸 둘이 상복을 입고 침통하게 빈소를 지켰다
진사 생전에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글 친구들은 낯짝도 안보였다
그런데 한 친구가 문상을 와서 서럽게 곡을 하더니 진사부인을 살짝 불러내서 부인 상중에
이런 말을을 꺼내 송구스럽지만
그 친구는 품속에서 봉투 하나 를 끄내어 미망인에게 건넸다
봉투를 열어보니 차용증 이었다
정진사가 삼백냥을 빌리고 입동전에 갚겠다는 내용으로 진사의 낙관까지 찍혀 있었다
9일장을 치루는데 여드레가 되니 이런저런 채권자들이 빈소를 가득채웠다
내 돈 떼먹고 출상 못해
이 사람이 빛도 안갚고 저승
으로 줄행랑을 치면 어떡해
빈소에 죽치고 앉아 다그치는
친구들 면면을 보면 낯이 익었다
그때 허법스님이 목탁을 두드
리며 빈소에 들어섯다
미망인이 쥐고 있는 빛문서를
낙아챈 스님은 병풍을 향해 소
리쳤다
정진사 문전 옥답을 던지고
산 당신 친구들에게 빛이나
갚으시요
그 순간 삐그덕 관 뚜껑 여는
소리가 나더니 정진사가 걸어
나왔다
빛쟁이 친구들은 신발도 신지
않고 도망을쳤다
정진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허법스님은 빛 문서 뭉치를
들고 사또에게 찾아갔다
이튼날 부터 호출을 받은 진
사의 친구들은 동현뜰에 섰다
만초시는 정진사에게 삼백냥
을 빌려 쥤다지?
사또의 물음에 나으리 목숨만
살려주십시요
곤장 삼백대를 맞을텐가 삼백
냥을 부의금으로 정진사에게
낼텐가?
진정한 친구란?
내가 힘들고 어려울때 와
온 세상 사람들이 다 떠나도
나를 찾아주는 그 사람입니다
저무는 해는 내 모습과 같고
부는 바람은 내 마음과 같고
흐르는 물은 내 세월 같으니
관포지교(管鮑之交)
수어지교(水漁之交)
이런 친구는 있으신지?
나이 칠팔십 가이 무심(無心)이
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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