貽羞點汚(이수점오)
2025. 9. 17. 07:16ㆍ좋은글
菜根譚
제 111장 : 貽羞點汚(이수점오) : 공론을 어기고 권문에 빌붙으면 수치와 오점을 남긴다.
公平正論 不可犯手 一犯則貽羞萬世
權門私竇 不可着脚 一著則點汚終身
공평정론 불가범수 일범즉이수만세
권문사두 불가착각 일저즉점오종신
공평한 정론에는 손을 대지 말라.
한번 어기면 만세토록 수치를 남기게 된다.
권세 있는 집안과 사적으로
얽힌 길에는 발을 들여놓지 말라.
한 번 들여놓으면 평생토록 오점을 남기게 된다.
이수만세(貽羞萬世)의 ‘이수’는 수치를 후세에
전한다는 뜻으로, 여기의 이(貽)는 남긴다는
뜻의 동사로 사용된 것이다.
전(傳)과 같다.
권문사두(權門私竇)의 두(竇)는 구멍을 낸다는
뜻으로 권세 있는 집안과 선을 댄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착각(着脚)의 ‘착’은 원래 옷을 입거나 신발을
신는다는 의미의 착(着)과 같다.
여기서는 발을 들여놓는다는 뜻으로 사용됐다.
점오종신(點汚終身)의 ‘종신’은 평생 동안의 의미로
사용된 부사어(副詞語)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한 것은 공과 사의 엄격한 구분이다.
사정(私情)이나 사욕(私慾), 사견(私見) 등을 쫓아
일을 처리할 경우 커다란 오점을 남길 수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공평한 언론에 반대하거나 권문세가에 선을 대어서
입신하는 것 등이 그것이다.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 이르기까지
그 오명을 씻기 어렵게 된다.
귀감이 될 만한 인물로는 전한(前漢) 안제(安帝)
때 태위(太尉)를 지내며 청백리의 표상으로
칭송을 받은 양진(楊震)이다.
[후한서] "양진전"에 따르면 그가 동래 태수를
역임할 때 지금의 산동성 거야현인 창읍(昌邑)의 현령
왕밀(王密)이 전에 신세를 진 은혜를 갚기 위해
은밀히 밤에 찾아와 황금 10근을 내밀자 양진이 사절했다.
왕밀이 말했다.
“이는 저의 조그만 성의를 표시한 것일 뿐입니다.
지금은 밤중이고 아무도 보는 이가 없고 이를 알고 있는
이도 없으니 받아 두도록 하십시오.”
여기서 나온 말이 모야무지(暮夜無知)이다.
밤중에 은밀히 하는 일이니 아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양진이 힐책했다.
“하늘이 알고, 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자식들이
아는데 어떻게 세상의 그 누구도 모른다고 하는 것인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개인의 절개와
지조가 드러나는 법이다.”
여기서 나온 성어가 ‘4지(四知)’ 이다.
천지(天知 ), 신지(神知), 아지(我知),
자지(子知)를 말한다.
왕밀은 ‘4지’ 얘기를 듣고 크게 부끄러운 나머지
곧바로 황금을 싸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양진의 이런 청렴한 행보가 자손들의 귀감이 되었다.
아들 양병과 손자 양사, 증손자 양표, 모두 삼공(三公)의
자리에 오른 게 이를 방증한다.
원래 그의 8대조 양희(양희(梁喜, 1515~1580))는
초한전 때 항우의 시신을 나누어 가져 제후에 봉해진
5명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고조부 양창(楊敞)은 한소제(漢昭帝) 때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부친 양보(楊寶) 역시 광무제(光武帝) 유수가
불러 관직에 임명했다.
양진은 생전에 제자 육성에 힘써 모두 3천여
명의 문하생을 두었다.
이들 문하생 가운데 나라의 동량이 대거 배출되었다.
자가 백기(伯起)였던 까닭에 사람들은 그를 ‘
관서공자(關西孔子) 양백기’로 불렀다.
이후 ‘관서공자’는 대유(大儒)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무덤의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
신도비(神道碑)도 그를 기리는 공덕비에서 시작되었다.
‘신도’는 죽은 자의 묘로(墓路)를 말한다.
조선조는 2품(판서, 현재의 장관) 이상의 관직을
지낸 자에 한해 신도비를 세우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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