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妓生) 소백주(小柏舟) - 82회

2025. 7. 8. 09:31수호지

★ 기생(妓生) 소백주(小柏舟) - 82회

제82회 기약(期約)

처음 만났던 그날 밤 한 동이 술을 마시고 한편의 시를 써서 그녀에게 보이고, 그 시를 보고 조건 없이 자신을 선택해 주었던 소백주를 생각하고 김 선비는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란 것도 그저 육체가 만나 타오르는 불꽃 같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 사랑 안에는 세상의 잡스러운 허위와 흥정을 대번에 휩쓸어버리는 가슴 짜릿한 통쾌함이 깃들어 있었고, 또 은밀하고 달콤한 꿀맛과 같은 희열이 있었다.

​“서방님의 시를 들으니 처음 만났던 그 밤이 생각나네요. 한 동이 술을 마시고 거침없이 써 내려가던 그 꾸밈없는 시가 참 마음에 들었지요.”

​“나 같은 사람의 시를 알아봐 주고, 또 거지나 진배없는 나를 받아들여 이렇게 화사한 꿈결에 살게 하였으니 비록 내 훗날 저승에 간다하여도 그대 소백주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김 선비와 소백주는 다시 술잔을 비웠다.
이제는 김 선비가 술병을 들고 소백주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술잔을 든 소백주가 그윽한 눈빛으로 김 선비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기약(期約) 없는 님이 오신다기에 오가는 사내들 혹여 임인가 그리워 대문을 열어놓고 님 기다리기 3년 꽃소식 몰고 온 님 버선발로 맞았네. 내 그 님을 모시고 꽃 속에서 3년 어젯밤 무서리 내려 꽃잎 시드니, 님은 그새 멀리 떠나려 하네”

​가슴속 끓는 이별의 슬픔을 시로 읊는 소백주의 눈가에 그새 뜨건 눈물이 자신도 모르게 스미어 올랐다.
희미한 등잔불에 반짝이는 이슬을 대롱대롱 맺혔다가 주르르 소백주의 뺨을 타고 구르는 뜨거운 것을 본 김 선비는 순간 가슴이 미어터지는 듯했다.

김 선비는 일부러 외면하며 술잔을 들었다.
이곳에 그냥 눌러앉아 지내며 꽃 같은 한 세월 지내 버리면 그만이겠으나 그것은 아니 될 일이었다.

잠시 어느 풍경 좋은 곳에 취해 넋 잃고 앉아 있다가 갈 길을 잊고 있었으니 가는 길이 비록 고단한 길일지라도 이제는 또 그 길을 운명처럼 떠나가야만 했다.

​“내 그대를 버리고 가는 게 아닙니다. 그대 내 마음에 꽃인 양 안고 갈 것이니 우리 좋은 시절에 다시 꼭 만납시다.”

김 선비는 소백주 쪽으로 다가가 어깨를 와락 감싸안았다.
소백주가 가늘게 흐느끼며 김 선비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왔다.

- 83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