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
2025. 6. 18. 11:14ㆍ자유게시방
★ 2025년 15번째 독서 노트(2025.06.16.)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시진핑 망언에 대한 공개 질의서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심백강 지음
초판 3쇄 발행 2024. 11. 15.
이 책은 심백강(박사)의 저서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 책은 중국 시진핑의 “한국은 역사상 중국의 일부였다.”라는 발언에 대한 반박 글로 오히려 현재의 중국 수도인 베이징(北京) 지역을 포함한 중국 대륙 일부가 한민족의 역사적 터전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저자 심백강은 한글을 배우기 전에 한자를 먼저 배울 정도로 혈통이 중국이었으나 시진핑의 망언으로 중국을 증오하기에 이른 지중파 지식인이다.
이 책에서 심백강 저자가 “중국은 역사상 한국의 일부였다.”고 제시하고 있는 주요 역사적 사실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고조선의 광활한 영토와 중국 문명의 모태
∙ 북경 일대는 고조선의 영토
: 저자는 중국 고문헌을 근거로 현재 중국의 수도인 북경 일대가 한(漢)나라 시대에는 고조선(古朝鮮)의 영토였음을 주장한다. 한무제(漢武帝)가 이 지역을 침략하여 한사군을 설치했으나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다시 수복하여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 요하 문명과 홍산 문화
: 우리 민족이 중국의 토착민이자 선주민으로서 발해만 일대에 터를 잡고 홍산 문화를 창조하였으며, 이것이 황하(黃河) 문명의 모태가 되고, 중국 문명의 기초를 닦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2. 고구려의 서쪽 강역과 요수(遼水)의 위치
∙ 요수(遼水)는 현재의 역수(易水)
: 당 태종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요수와 갈석산(碣石山)에 가서 죄를 묻겠다.”라고 말한 기록을 통해 당시 고구려의 서쪽 강역이 현재 하북성(河北城) 보정시 역현(易縣)의 역수 유역과 갈석산 일대에 걸쳐져 있었다.
즉, 고구려 시기의 요수는 현재의 요하(遼河)가 아니라 역수로 불렸으며, 이는 고구려의 영토가 현재의 한반도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3. 대륙 백제의 존재
∙ 백제의 광대한 영토
: 중국 문헌인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 등에 “백제는 국내에 여러 왕과 제후를 세워 송(宋)나라, 제(齊)나라 시대로부터 이미 그러했다.
그렇다면 이는 국토는 넓고 백성은 많았다는 증거이다.”라는 기록이 있다고 언급, 백제가 한반도에만 국한된 작은 나라가 아니라, 대륙에도 광범위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을 주장한다.
4. 조선하(潮河)의 위치와 고대 조선의 무대
∙ 조선하(朝鮮河)의 위치
: 송나라 때 편찬된 <무경총요(武經總要)>에는 북경 북쪽에 조선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송대의 4대 사서 중 하나인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도 하북성 진도시에 조선이 있었다고 실려 있다.
이는 고대 조선의 무대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깊숙한 중원의 요서 지역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5. 중국은 다민족 국가로 한족(漢族)은 역사의 일부
∙ 중국 역사의 다양성
: 저자는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것이 한족이지만, 불과 10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여진족이 세운 청(靑)나라가 중국을 대표했고, 현재 중국의 판도를 만든 것도 청나라이다.
이를 통해 역사상 중국은 한족만의 나라가 아니라 조선족, 흉노족, 몽골족, 여진족 등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어울려 이룩한 나라였다.
저자 심백강은 이러한 주장들을 통해 한국사가 한반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중국 대륙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중국 문명의 기원에 우리 민족의 역할이 컸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맞서 우리의 고대사를 재정립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제시되고 있다.
☞ 사고전서(四庫全書) 속에 숨겨져 있는 고조선에 대한 자료가 공개됨으로써 발해의 모퉁이 요서에 있었던 고조선 왕국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 왜 지금 한국의 역사학계는 중국의 관점에 따라 남의 눈을 빌려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지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이제 중국의 눈, 일본의 눈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우리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을 지녀야 한다.
☞ 2천 년 전 서한시대(西漢時代) 유방의 손자 유안이 저술한 회남자(淮南子)와 1천5백 년 전 남북조시대 문인 유신이 쓴 유자산집(庾子山集) 등의 자료를 통해 우리가 수천 년 전부터 중국 한족의 영토로 알아 왔던 요녕성(遼寧省)과 하북성(河北省) 동쪽과 남쪽 모두가 고조선의 영토였고,
한족이 설치한 요동군, 요서군은 현재의 요하를 중심으로 그 동쪽과 서쪽에 있었던 게 아니라 북경시 장평구를 중심으로 그 북쪽과 남쪽에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밝혀졌다.
☞ 한국의 강단 사학이 고고학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1차 자료는 방기한 채 와당, 목간, 비문 등 이동이 가능한 2차, 3차 자료에 치중하면서 문헌, 사료 연구를 소홀히 한 것은 강단 사학의 치명적인 오류였다.
☞ 경제발전도 중요하고, 민주화도 중요하다. 그러나 발해만을 깔고 앉아 대륙을 지배한 고조선과 고구려의 민족혼이 살아나지 않고서는 경제발전도 정치발전도 여기서 더 이상 진전이 있을 수 없다.
☞ 중국의 고대 사서나 경전에 나오는 고대 한자의 발음표시는 한국어와 발음이 일치한다. 따라서 한자(漢字)는 한족(漢族)이 만든 글자가 아니라 한국인의 조상이 만들어 사용하던 글자라는 것을 증명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 한민족이 중국 대륙의 지배 세력이었던 발해 조선시대에는 조선어가 곧 중국어의 표준어였고, 한족어는 중국 서방의 방언에 불과했다.
유방의 한 왕조가 건국되어 한족이 중국의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점차 지방어가 주류어가 된 것이다.
☞ 중국은 역사상에서 영토적으로 고조선의 일부였고, 문화적으로 홍산 문화의 지류였으며, 사상적으로 복희의 아류(亞流)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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