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22. 05:22ㆍ자유게시방
드라마 징기즈칸을 보기전에 역사 공부 합니다
징기즈칸이 몽골제국을 건설할때(1206년)
중국은 남북조 시대였습니다
북쪽에는 금나라
남쪽에는 송나라
■금나라 (1115∼1234).
퉁구스족(族) 계통의 여진족이 건립한 왕조(1115∼1234).
■송나라(960년 - 1279년)
송나라는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데
전기를 북송 후기를 남송이라 한다
북송(北宋)(960년 - 1126년)
송태조 조광윤이 세운 나라
남송(南宋)(1127년 - 1279년)
북송이 정강의 변을 겪은 후 송고종에 의해 재건된 나라
■ 몽골제국 초대황제 징기즈칸
(재위:1206~1227)
초명은 테무친(1162년~1227년) 몽골제국을 건설하고 징기스칸이라 했다
몽골고원의 오논·케룰렌 두 강 사이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할거(割據)하고 있던 몽골계·투르크계의 씨족 및 부족 중의 한 몽골 씨족 출신의 테무친[鐵木眞]은 1189년경 자기 부족과 이어 몽골 여러 씨족을 통일하고 맹주(盟主)로 추대되어 1206년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받고 즉위하였다.
그 후 그는 주변의 타타르·메르키트·케레이트 등 부족들을 정복하여 복속시키고, 또한 서방의 알타이 방면에 근거지를 두고 대항하던 투르크계의 나이만 부족을 멸망시켜 세력을 확대하여, 몽골고원을 통일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칭기즈칸은 몽골을 지배하는 대칸[大汗]의 지위에 오르자, 그때까지의 씨족 및 부족제도에 바탕을 두었던 국가 기구를 개혁하여, 국내 유목민을 95개의 천호(千戶)로 하는 집단제로 분할하였다.
그가 구성한 천호 및 그것을 구성하는 백호(百戶) 집단은 행정단위이면서 군사단위였는데,
천호란 약 1,000명,
백호는 약 100명의 병사를 제공하도록 정해놓은 것이다.
천호장(千戶長)과 백호장(百戶長)에는 공신(功臣)을 임명하고, 그것을 좌익(興安嶺 방면)·중군(中軍)·우익(알타이 방면)의 총지휘관 만호장(萬戶長)의 지휘하에 두었다.
만호장·천호장·백호장의 자제는 케시크티라 불린 대칸의 친위대를 구성하고, 칭기즈칸 일족에게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각종 특권이 부여되었다.
칭기즈칸은 국가의 재정적 기초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 금(金)나라·서하(西夏) 등 남쪽방면의 농경지역에 침입하여 말·낙타·재물 등을 약탈하고, 그곳의 직업적 기술자나 농민들을 잡아 유목지대로 강제 이주시켜 촌락을 이루었다.
또 유라시아 대륙을 통하는 동서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서방으로 대군을 진격시켰다.
먼저 그는 나이만 부족 족장의 왕자 쿠츨루크가 서요(西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왕이 되었으므로 이를 토벌하여 이 지역을 병합하였다.
이어 서(西)아시아 이슬람 세계의 보호자로 자임(自任)한 호라즘 샤왕조에 통상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사절단 일행이 학살된 것을 계기로 삼아 서방세계에 대한 대원정(大遠征:1219∼1225)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호라즘 국왕은 전사하고, 그의 왕자도 패하여 인도지방으로 도망쳤다.
몽골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러시아 제공(諸公)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크림반도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한 후 귀국하였다.
칭기즈칸은 다시 서하를 토벌하다가 1227년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칭기즈칸은 서방 원정에서 승전하고 개선한 후, 영토 중 유목지역은 그의 여러 아들과 동생들에게 각각 분할 통치하게 하였다.
즉, 몽골 본토는 칭기즈칸 자신의 직할지로 하여, 넷째아들 툴루이에게 계승하기로 결정하였고,
맏아들 주치(Juchi, 朮赤)에게는 카스피해(海)와 아랄해 북방의 영토, 즉 남(南)러시아의 킵차크 초원지대를 분할하여 주었으며(후의 킵차크한국),
둘째아들 차가타이에게는 아무강(江) 평지이며 서요(西遼)의 옛 땅인 중앙아시아를 나누어 주었다(후의 차가타이한국).
또 셋째아들 오고타이(후의 제2대 황제 太宗)에게는 일리강 유역을 중심으로 외몽골 서부에서 톈산산맥[天山山脈]에 걸친 나이만 부족의 옛 땅인 몽골고원 일대를 나누어주었다(후의 오고타이한국).
그리고 동부 몽골고원과 중국의 북동지구(만주지방) 방면은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어 통치하게 하였으며, 남방의 농경지대는 그것을 그들 일족의 공유재산(共有財産)으로 하고, 거기에 다루가치[達魯花赤:총독]와 주둔군을 배치하여 치안유지와 징세(徵稅) 임무를 맡게 하였다.
■ 몽골제국 제2대 황제 오고타이
(太宗 :재위 1229년∼1241년)
오고타이(출생-사망1185 ~ 1241)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이며 이름은 우구데이(Ögedei)이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칭기스칸을 따라 싸움터를 돌아다녔고, 특히 서아시아 원정 때는 호라즘의 수도 우르겐치성(城)을 공략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의 공적을 인정하여 칭기즈칸으로 부터 봉토를 하사받았고 오고타이한국(汗國)을 세워 그 시조가 되었다. 성격이 관대 ·온후하고, 왕자로서의 인품을 갖추고 있어 칭기즈칸의 신뢰를 받고 일찍부터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1227년 칭기스칸이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1229년 몽골제국의 2대 칸이되었다.
거란족 재상 야율초재(耶律楚材), 위구르인 재상 전진해(田鎭海) 등을 등용해 중앙정부의 정치기구를 정비했고, 속령(屬領)에 통치관인 다루가치[達魯花赤]를 파견해 통치체제를 확립했다. 또한 오르콘강변에 수도 카라코룸성(城)을 건설한 뒤 그곳을 중심으로 제국 내의 교통망을 완비했다.
대외적으로도 칭기즈칸의 정복사업을 계승해 이란 ·남러시아 정복을 위해 그곳에 군대를 파견했다. 또한 그 자신도 동생 톨루이 칸과 함께 금(金)나라를 공격하여 하중부를 토멸했으며, 채주성(蔡州城)을 격파해 1234년 봄에는 오랜 꿈이었던 영토확장의 목적을 완수했다.
한편 정복사업의 속행을 꾀해 동방의 새로운 적국인 남송(南宋) 및 고려(高麗), 서방의 러시아, 유럽 및 인도 방면의 정복계획을 결정했다. 특히, 고려에는 1231년 장군 살리타[撒禮塔]에게 대군을 주어 침입하게 했고, 1232년 다루가치를 주재시키고 내정간섭을 시작했다. 1236년부터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서방원정군을 통해 러시아로부터 유럽 대륙 깊숙이 진입했고, 헝가리 ·폴란드의 각지를 공략함으로써 로마교황 및 유럽 봉건제후(封建諸侯)들을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의 치세(治世)는 몽골제국의 비약적 발전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만년에 일족 사이에 분규가 일어나면서 그것이 황제위 계승문제에 영향을 미쳤고, 결국 그가 죽은 후 제국의 통일 및 발전에 어려움이 생겼다.
■ 몽골제국의 제3대 황제 구유크
[定宗](재위1246∼1248).
몽골제국의 제3대 황제(재위 1246∼1248).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내정을 쇄신했다.
재정을 농단하던 압두르라하만을 처형했고, 황제권을 강화하면서 대외원정을 속행했다.
원어명=Güyük 출생-사망1206 ~ 1248
국적=왕조몽골
재위기간=1246년∼1248년
별칭=귀유(貴由),정종(定宗)
활동분야=정치
중국사에서는 원(元)나라 정종(定宗)으로 불리며, 오고타이 칸(태종)의 맏아들로서 성격이 억세고 완고했다고 한다.
랴오둥반도의 포선만노(蒲鮮萬奴) 정벌에 공을 세우고, 1235년 일족(一族)의 실력자 바투를 따라 유럽원정에 참가해 몽케칸과 함께 남러시아 알란족의 수도를 공격하는 등 전공을 세웠으나 바투와 사이가 좋지 않아 본국에 소환되었다.
1241년 태종이 죽자 바투와 중신의 반대를 물리치고 당시 섭정으로 있던 모후(母后)의 끈질긴 천거와 책모로 1246년 황제가 되었다. 이는 훗날 몽골제국 분열의 단서가 되었다.
즉위 후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내정을 쇄신했다. 재정을 농단하던 압두르라하만을 처형하면서 황제권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원정을 속행했다. 서쪽에서 킵차크한국을 건국한 바투와 대결하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향했으나 진군 도중에 병을 얻어 재위 3년 만에 사망했다. 그가 누군가에게 암살되었다는 추측도 있다.
■ 몽골제국의 4대 황제 몽케蒙哥
(재위 1251~1259, 칭기즈칸의 손자)
몽골제국의 제4대 황제(재위 1251~1259). 칭기즈칸의 손자. 올라, 카라코룸에서 번영을 누렸고, 몽골제국은 빠르게 확장되었다. 쿠빌라이에게 중국·티베트·다리·안남을, 훌라구에게 아바스왕조를 정복하게 하였다.
원명=Möngke 출생-사망1208 ~ 1259
국적=왕조몽골제국
재위기간=1251년~1259년
별칭시호=헌종(憲宗)
활동분야=정치
시호 헌종(憲宗).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훌라구의 맏형. 몽골군의 유럽 원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다. 1248년 정종(定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카라코룸에서 번영을 누렸으며, 몽골제국은 빠른 속도로 확장되었다. 한편, 쿠빌라이로 하여금 중국 ·티베트 ·다리[大理: 중국 雲南省 서부] ·안남(安南)을, 훌라구로 하여금 서아시아 이슬람교의 아바스왕조를 정복하게 하였다. 스스로도 남송정벌을 결의, 쓰촨[四川]까지 진군하였으나 병사하였다.
■ 몽골제국의 제5대 황제 쿠빌라이 Khubilai khan(1215출생~1294사망).
중국 원나라의 시조. 묘호(廟號)는 세조.
중국 이름은 홀필렬(忽必烈). 칭기즈 칸의 손자로, 일본ㆍ중앙아시아ㆍ유럽에까지 원정하여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몽고인의 우월성을 강조하였다.
1215년 칭기스칸의 손자(4남 톨루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쿠빌라이는 어려서는 별로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다. 쿠빌라이는 1251년이 될 때까지 톨루이 가문에서 둘째 아들이라는 위치로 인해 가문의 핵심 권력에서 소외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어머니 소르각타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중국인들을 탄압하고 착취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살피고 다독이는 정책을 취해 우리 몽골에 충성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을 멸시하기보다 이해하고 존중 해야 한다." 이러한 가르침은 훗날 그가 칸의 자리에 올라 중국을 다스리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1259년 형 뭉케가 남송 원정 도중 사망하자, 모든 이목이 쿠빌라이에게 집중 되었다. 칸으로 즉위하는 문제로 막내동생인 아릭베케와 대립했던 것이다. 1260년, 쿠빌라이는 상도에서 자신의 지지자들만을 모아 쿠릴타이를 열고 제5대 대칸에 올랐다.
아릭베케는 몽골에서 별도로 쿠릴타이를 열고 대칸을 선언하는데 킵차크 · 어거데이 · 차가타이칸국이 아릭베케 편에 서고, 훌레구가 이끄는 일한국은 쿠빌라이를 지지했다.
그 뒤로 두 칸이 싸우기를 4년, 마침내 아릭베케를 굴복시킨 쿠빌라이는 도읍을 베이징으로 옮겨 대도(大都)라 일컫고, 이어 1271년 국호를 원(元)이라 칭했다.
대원제국은 수립 이후 아릭베케의 잔당인 하이두(어거데이의 손자)와 도와(차가타이의손자)의 반란으로 인해 30여 년에 걸친 내전이 일어났다. 쿠빌라이가 실시한 주요 외정으로는 고려 · 동남아시아 · 일본 정복이 있다.
쿠빌라이의 만년은 만주에서 티베트, 중앙아시아까지 제국 각지에서의 잇단 반란과 그칠 줄 모르는 통치권 도전으로 시끄러웠다.
게다가 의지했던 황후 차비가 1281년에 죽고, 그녀가 낳은 황태자 친킨 역시 1285년에 병사하자 쿠빌라이는 인간적 고통과 고독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이후 10년 동안 정치 업무를 새 황후인 남비에게 일임하고 폭음과 폭식을 거듭했다. 그 결과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된 그는 1294년 사망하였고 친킨의 아들인 투무르가 대를 이었다.
■ 원나라 : 몽골족의 왕국(1271∼1368).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이다
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러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遊牧帝王)과 그를 둘러싼 유목봉건영주층(遊牧封建領主層),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었다.
이와 같이 유목제국에 잠재된 근본적인 결함을 극복하려고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중간의 아건조지대(亞乾燥地帶)에 새로운 정치적 기지를 찾아서 강대하고 집권적인 제국(帝國)을 영위하려 한 것이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世祖]이었다. 그는 형 몽케칸[憲宗]를 계승하려 하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를 제거하고 북방의 초원에 웅거한 유목봉건세력의 진출을 막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화북(華北)에 가까운 상도(上都)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大都:北京)로 옮겨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집권적(集權的) 관료국가의 확립을 꾀하였다.
그가 시도한 정치적 사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1271년 《역경(易經)》의 ‘大哉乾元’을 따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고 중국 역대왕조의 계보를 잇는 정통왕조임을 내외에 선언하였다. 이어 74년에서 79년에 걸쳐 화이허강[淮河] 이남 지역에 있던 남송(南宋)을 평정해서 명실공히 중국전토를 영유하게 되었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일본 ·베트남 ·미얀마 ·자바 등지에도 침략군을 보냈다.
원나라는 쿠빌라이칸이 다스리는 동안에 동아시아 전역의 대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쿠빌라이칸은 몽골제국의 종주권(宗主權)도 계승한 것이라며 서방의 한국(汗國)들(킵차크 ·차가타이 ·오고타이 ·일 한국 등) 위에도 군림하려 해서, 유목적 전통을 고집하는 한국들은 그를 마땅치 않게 여겨 원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대항하였다.
특히 오고타이한국의 왕 카이두는 이웃 차가타이 ·킵차크 한국의 왕들을 설득해서 반(反)쿠빌라이 동맹을 결성하여 원나라 북서변의 요지를 공략하여 쿠빌라이 정권을 위협하였다. 항쟁은 쿠빌라이칸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는데, 1301년 카이두가 사망함으로써 전운(戰雲)이 가셨다. 이로부터 원나라는 한국들과 친교를 맺고 제국(帝國)의 종주권을 회복하였다. 아시아 전역에는 이른바 ‘몽골족 지배하의 평화’가 찾아와 동 ·서의 문물이 자유롭게 교류하게 되어 국제무역이 번창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내부의 국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여 사회적 여러 모순들이 심화되어 갔다. 이에 편승해서 여러 지방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 일어났는데도 중앙에서는 권신(權臣)들이 정쟁(政爭)에 여념이 없었다. 폭동은 확대되어 한족(漢族)에 의한 민족적 반란으로까지 발전하여 주원장(朱元璋:洪武帝)에 의한 명조(明朝)정권이 출현하였다.
68년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명나라의 군대에 빼앗겨 혜종(惠宗:토곤 테무르)가 몽골 본토에 쫓김으로써 원나라의 중국지배는 끝이 났다. 그뒤 몽골본토에 터를 잡은 원군은 얼마 동안 명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쇠퇴하여 내분(內紛)으로 소멸되었다.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
■킵차크한국 (1243~1502)
남러시아에 성립한 몽골 왕조
금장한국(金帳汗國, Golden Horde)이라고도 한다.
칭기즈칸의 장자 주치[求赤:拙赤]는 이르티시강(江) 이서(以西)의 스텝을 영지로 받았으나 주치의 사후 그의 차남 바투는 몽골 서정군의 총수가 되어 러시아 및 동유럽각지를 석권함과 동시에 남러시아를 확실히 장악하여 킵차크 한국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바투는(출생1207 ~ 사망1255)칭기즈칸의 손자.
1227년 아버지인 주치[朮赤]의 영지를 계승한 뒤, 1236년에 유럽 원정의 총지휘관이 되어 루시의 여러 공국(公國)을 공략하고, 이어 폴란드에 침입하였다.
1241년 슐레지엔의 리그니트에서 슐레지엔공(公) 하인리히가 이끈 유럽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그해 오고타이칸의 사망으로 회군하였으나, 사라이에 머물면서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킵차크한국을 세웠다
신도(新都) 사라이가 이룩된 볼가강의 하류지방은 유라시아의 스텝을 경유하는 실크로드와 북방으로부터의 모피로(毛皮路)가 교차되는 요충을 점하여 오랫동안 투르크계 하자르족이 활약하는 무대가 되어 있었다.
몽골군이 출현했을 때에는 같은 투르크계 킵차크족이 북쪽의 불가르, 서쪽의 슬라브 및 동로마, 동남의 이슬람권과의 사이의 중계무역에 의하여 번영하였다. 또 몽골의 지배자가 급속히 투르크화, 이슬람화한 현상도 같은 사실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나라는 그 중계적 입장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제4대의 베르케 칸이 건설한 신(新)사라이는 구(求)사라이와 함께 국제시장으로서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제9대 우즈베크 칸의 최성기 이후 14세기 말부터 티무르군에게 유린되는 등 퇴색이 짙어져서 국토는 카잔 ·크림 ·아스트라한의 3한국으로 분열되고 그들이 대립 ·항쟁하는 가운데 멸망하였다.
■ 차가타이 한국 (1227∼1360).
Chaghatai Khanate
칭기즈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가 중앙아시아에 건립한 몽골 왕국(1227∼1360).
차가타이는 아버지에게서 4,000명의 군대를 얻고, 한국의 영지 비시발리크에서 사마르칸트에 이르는 톈산[天山]의 계곡지대를 받아가지고 본영(本營)을 일리 분지의 알말리크에 두었다. 한국은 처음에는 오고타이, 구유크, 몽케 등 대(大)칸의 통제를 받았으나 1260년 쿠빌라이가 원(元)나라를 세우면서 독립을 꾀하였다. 그러나 오고타이의 손자 하이두는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며, 그 결과 차가타이 한국은 하이두의 지배에 들어갔다.
1301년 하이두가 죽자 차가타이가(家)의 두와 칸은 원나라와 화해하여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두와의 여러 아들이 서로 분립하여 권력을 다투다가 마침내는 톈산 방면에 거점을 둔 동부 한가(汗家)와 서부 투르키스탄에 웅거한 서부 한가의 동서로 분열하였다. 서부에서는 투르크화한 한국의 귀족(아미르)들이 권력을 다투자, 그 중에서 티무르가 나타나서 서부 한가를 평정하고 1369년에 티무르 제국(帝國)을 건립하였다. 차가타이 한국은 조직화된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정주지대(定住地帶)의 통치를 하였는데, 특히 징세(徵稅)는 토착민인 이슬람교도의 대관(代官)이 행하였다. 서부 한가는 14세기 초부터 투르크 이슬람화하였으나, 에센 부카를 시조로 하는 동부 한가는 모구리스탄 한국으로 불리며 몽골의 유목적 생활전통을 유지하기도 하였는데, 16세기 초까지 톈산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오고타이 한국(1218∼1310).
징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를 시조로 하여 몽골제국의 일부를 이룬 오고타이가(家)의 국가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 원정을 떠나기에 앞서 미리 그 일대의 땅을 여러 아들에게 분봉(分封)했는데, 오고타이는 톈산북로[天山北路]의 에밀 지방(현재의 중국령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북서부에 위치)으로부터 이르티시강 상류지방을 소령지(所領地)로 받았다. 오고타이[太宗]와 그의 아들 구유크[定宗]는 잇따라 몽골제국의 대칸[大汗]이 되어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옮겨갔으나, 남은 일족은 원래의 소령지를 계승하였다.
구유크칸이 죽은 뒤 몽골제국의 대칸 자리는 툴루이가(家)의 몽케[憲宗]와 그 자손이 차지하여 오고타이가는 권력을 잃고 불만이 컸다.
특히 오고타이의 손자 카이두[海都]는 툴루이가의 쿠빌라이[世祖]가 원조(元朝)의 대칸이 되자 이에 항거하여,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한국도 지배하고 1260년대부터 1301년까지 원나라와 싸웠다. 그러나 카이두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차바르[察八兒]는 차가타이한국의 두와칸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1310년 도망하여 원나라에 귀순했기 때문에, 오고타이한국은 멸망하였다.
이 나라는 1세기도 채우지 못한 단명(短命)의 유목국가로서 제도나 문화면으로는 볼 만한 것을 남기지 못하였다.
■ 1123년 중국과 주변지도
■1142년 중국과 주변지도
■1211년 중국의 주변지도
■ 1219년 중국과 주변지도
■ 몽골제국의 최대영토 와 주변지도
■ 오늘날의 세계지도
■ 오논강 과 케롤렌강 두 강 사이의 상류지역은 초원지대로 칭기즈칸이 태어나고 자란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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