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나라의 상황이랑 비슷한 임진왜란 전의 조 선

2024. 5. 12. 09:47자유게시방

 

오다 노부나가라는 희대의 마인이 아케치의

손에 희생당하고 오다의 심복이었던 도요토미와
아케치와의 전쟁이 도요토미의 승리로 끝났다.

 

당시 도요토 미 에게 시마즈 일가를 처치하라는 명 아래에 오다가

지급한 30만이 넘는 병사가. 있었고, 그 정도의 병력을 가진 자가

일본에 도요토미뿐이었으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도요토미가 도쿠가와에게 어머니까지 인질로

보내며 일본의 전국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동시에 쇠붙이등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사무라이들의 목숨과 같은 칼부터 시작해서 시골농부의 허름한 창까지.

"이제 더 이상 전쟁은 없다. 큰 성을 쌓을 것이며, 거기에. 드는 쇠붙이를

확보한다"는 명분 아래 쇠그릇까지 박박 긁어모았다.

일본인들은 드디어 전쟁이 끝났다며 모두 기뻐했고,

 

 

몇 년 후 미치광이 도요토미의 명 아래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바늘을 팔며 무사들에게 아부를 떨던 원숭이라고 불리던 사내가

일본의 최고권력자가 되었고, 언젠가 오다가 "명나라나 쳐볼까?

잔나비야, 갈 테냐?" 하고 지나가는 말로 흘린 것을 잔나비

도요토미는 실행에 옮겼다.   조선은 무력했다.

 

임진왜란이 끔찍했다는 것만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조선이

끔찍하게 무능력했다는 사실 또한 사실이다.

대마도, 당시 쓰시마 도주는 4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노린다는 걸

조선이 상소를 올렸다. 시기와 병력의 수까지 자세하게 적어 올렸다.

 

조선의 조정은 왜구들이 그래봐야지, 하고 넘어갔다. 당시

조선의 병사실태가 어땠냐면...

타 국에서 사신이 오면 성 입구 부근에 병사 2~4명이 창을 들고

서있는 게 관례였는데 개부분의 마을들이 그럴 병사조차 없어 몰골이

말이 아닌 농부에게 허름한 갑옷을 입히고 봉 부분이 다 삭아가는

창 한 자루 쥐어주고 서있게 했다.

 

군사력을 자랑하려고 세워두는 병졸들이 그 모양이니 수차례

조선을 왕래한 쓰시마 일가와 일본 장수들이 뭐라고 생각했을까.

심지어 도요토미는 친절하게도 내가 니들 칠 거다, 하는

선전포고문도 보내주었다.

 

 

4년. 짧지만 긴 세월로 전쟁을 준비할 시간이 충분히 존재했으나

조정은 이를 무시했다. 일본의 모 장수가 조선에 들렀을 때에도 시

배틀이나 벌이려고 문장가들을 선별했던 조선...

무능력한 지도자만큼 백성들에게 공포적인 존재가 있을까. 성군이

최고요, 토벌왕이 둘째요, 차라리 무능력한 왕보단 폭군이 낫다. 는

말이 있는데 딱 그때 조선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임진왜란 때 잃은 인구수를 복구하는데만 2백 년이 흘렀을 정도니까 뭐....

말 다 한 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