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당

2023. 1. 19. 17:03자유게시방

<서당>


19세기 후반 전국의 거의 모든 마을에는 크고 작은 서당이 하나씩 있었다. 1910년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자 서당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서당에 대해서도 일제는 간섭과 탄압의 손길을 강화했다. 그런데도 1920년대까지는 제법 많은 서당이 건재했다.


1927년 청주 지방의 예를 들어보겠다. 당시 청주에는 총 202개의 서당이 운영되었다. 그 이듬해인 1928년, 청주군은 18개 면에 355개 마을이 있었다. 총인구는 16만 2402명이었다. 한국인이 15만 8724명, 일본인이 3434명이었다. 중국인을 비롯한 기타 외국인도 약간 있었다. 주목할 점은, 355개 마을에 202곳의 서당이 운영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정상철 편역, 『1929년도(소화 4년) 4월 충청북도 청주군 군세 일반』, 충북발전연구원, 2015).

청주의 서당 중에는 한글과 산수를 가르치는 신식 서당이 7개소, 한문만 가르치는 재래식 서당이 195곳이었다. 신식 서당에 다니는 학동은 총 118명으로, 여학생이 2명, 남학생이 116명이었다. 훈장은 8명이었다. 연간 학비는 학동 1인당 8원 78전이었다. 재래식 서당의 학동은 총 1432명으로 모두 남학생이었다.

훈장은 195명으로 서당 수와 일치했다. 학비는 1인당 10원 39전으로, 신식 서당보다 약간 비싼 편이었다(정상철, 『충청북도요람』, 충청북도, 1996).

19~20세기 서당의 시설은 열악했다. 초가집에 방 두 칸 정도의 규모가 일반적이었다. 한 칸은 훈장이 사용하고, 나머지 한 칸은 강의실이었다. 학동들은 각자 집에서 가져온 개인 책상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 규모가 더욱 초라한 서당도 적지 않았다. 즉, 개인집의 사랑채에 서산대와 글판만 갖춘 서당이었다. 초가집의 사랑방을 빌려 서당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이항재, 「충남지역 서당교육에 대한 연구(Ⅰ)」, 『교육사학연구』 18집, 1996, 164쪽).

하지만 전국의 모든 서당이 규모도 영세하고, 재정도 부실했던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사진이다. 여성이 교사로도 가르치고 있어 여성 입장에서는 상당한 발전을 이룬 모습이다. 하지만 남학생들은 학교를 다니려면 전부 머리를 짧게 깎도록 했고, 여학생과도 따로 구분해서 앉도록 일제가 엄격한 기준을 정했다. 앞줄 일렬로 앉은 학생들이 여성이며, 뒤쪽 남학생들은 머리가 모두 짧다. 칠판에는 한글과 한자가 혼용돼 쓰여 있다. 일제에 의해 옛 서당의 풍경이 사라져 버린 가슴 아픈 사진이기도 하다. 인화하기 전 흑백필름에 색깔을 입힌 채색칼라 사진이다. (제공: 정성길 기록사진연구가)


자료 출처: <전북의소리>에서 기사 일부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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